춤, 현장

다큐멘터리 영화 〈기생, 꽃의 고백〉
예인으로서의 기생 조명, 그들은 전통 지킴이
김영희_전통춤 연구가
다큐멘터리 영화 〈기생, 꽃의 고백〉은 기생을 예술인으로서 조명한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자료의 발굴이나 전체적인 구성의 다양성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기생에 관해 연구했던 김영희의 적지 않은 분량의 멘트는 오늘날 기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를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국악방송과 한국영상대학교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생, 꽃의 고백〉이 1월에 개봉했다. 그동안 기생에 대한 방송물들은 잊을만하면 만들어졌었다.
 다큐멘터리뿐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져 그즈음 기생 역을 맡은 배우나 의상, 대사, 촬영장소 등이 회자되기도 했었다.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어차피 픽션이기에 구성을 위한 하나의 요소로서 다양한 비중으로 기생을 등장시키지만, 다큐멘터리의 경우 기생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기생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달라진다.
 그동안 제작된 기생 관련 다큐멘터리는 기생이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 일화라든가 연애사나 시각적 이미지들을 분석하는데 집중했었다. 또는 굴절되고 왜곡된 근대 기생과 일본 게이샤를 역사적 관점 없이 비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기생, 꽃의 고백〉은 기존 다큐멘터리 영화와 달리 예인(藝人)으로서 기생에 초점을 맞추고 접근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었다. 영화는 현재 91세인 장금도(張錦桃, 1928~ ) 예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전개된다.
 장금도는 군산 소화권번 출신의 기생으로 11세에 권번에 들어가 기예를 배웠고, 이후 결혼과 양육 과정에서 기생이었음을 숨기며 기예 활동을 했었다. 그러던 중 1983년에 한국일보 기자 구히서에 의해 소개되고, 국립극장 소극장에 올려진 ‘한국명무전’에서 〈민살풀이춤〉을 추어 한국 전통춤의 한 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분이 은둔한 예인이었기에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고,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준 현재의 쇠약한 모습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기생, 꽃의 고백〉은 전통예술의 계승자로서 근대 기생을 조명했지만, 계승의 현재적 상황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소극적인 고백에 그치고 말았다. 기생을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에 대한 이미지 내지 인식은 20세기 전반기에 형성되었다. 그 시기 일제강점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서구지향의 근대화과정에서 기생은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 여러 역할을 감당했었다. 전통 악가무(樂歌舞) 뿐만이 아니라 수입된 서양 공연 장르의 예인으로서, 대중매체의 총아로서, 신여성으로서, 패션의 아이콘으로서, 그리고 성적 욕망의 대상이기도 했었다.
 이렇게 다양한 위상에다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기생은 여인으로서 또 다른 굴절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기생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들 사이에서 늘 회자되며 다층적인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가 중첩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하급 기생문화가 일제강점 후반기에 조선 기생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었다. 그래서 기생제도가 없어진지 70년도 지났건만 –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기생들의 가무를 금하는 명령이 떨어졌고, 해방과 함께 근대 기생과 권번 조직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에 형성된 ‘기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은 현재까지 기생의 본 모습, 기생 본연의 기예와 활동상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즉 전통 공연예술을 핵심적으로 담보(擔保)했던 기생들은 오랜 세월 악가무를 행하는 예인이었기에, 1908년 경시청이 궁에서 기생들을 쫓아내고 정치적 의도에 따라 기생조합으로 재조직하고 관리감독한 이후에도, 그들의 본래의 일이었던 악가무를 행하는 기업(妓業)에 충실했다. 궁중의 가무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연예물들이 수입되면, 흥행사들은 가장 먼저 기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연예(演藝)를 선보이게 했다. 1917년 다동기생조합의 정기연주회에서 서양무도라는 제목 하에 서양의 사교춤이나 포크댄스를 춤추었고, 덴카스곡예단이 인기를 끌자 그들의 마기술과 레뷰댄스도 배워서 무대에 올렸다.
 평양기생들은 가무극을 배워 연주회를 했으며, 연극과 영화의 배우로 나서기도 했고, 라디오와 레코드 축음기가 주요한 매체로 등장하자, 판소리 민요뿐만 아니라 신민요 등을 부르는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렇게 기생들은 기생조합과 권번의 봄 가을 정기연주회에서 갈고 닦은 악가무를 선보였으며, 복지 단체나 수해 구제를 위한 자선연주회에 늘 앞장서 있었다. 또 각종 초청 공연에 응하였고,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의 경우 기생들은 16종의 궁중무와 3종의 민속춤을 공연함으로써, 기생들은 조선가무를 계승하고 연주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태평양전쟁 말기에 총독부는 기생들에게 가무를 금하고 접대만 응하게 하면서, 접대부라는 명칭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일제강점 초기부터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재조직되고 관리감독을 받았던 기생들은 일제가 행한 전쟁의 말로에서 500년이 넘게 이어져온 악가무를 행하는 본업과는 관계없는 일에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과 전쟁 이후에 더욱 높아진 서구 지향의 사조에 따라 서양 연예물들이 물밀 듯이 수입되고,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 예술들은 더욱 궁벽한 처지에 몰아넣어졌지만, 기생들은 그 후예들에게 전통의 악가무들을 계승시켰던 것이다. 즉 20세기에 접어들며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끊임없이 변했지만 그 중심에서 기생들이 전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통해 우리의 악가무는 한국 공연예술의 튼튼한 뿌리이며, 마르지 않는 샘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현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며,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늠하기 위함이다. 현재 다른 단어로 번역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다층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기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결국 우리 전통예술이 나아갈 바를 위함일 것이다.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를 책임편집하고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검무전(劍舞展)’을 5년째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다.
2018.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