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포럼Ⅱ: 커뮤니티댄스의 가치
상상의 민족, 춤의 공동체
필리파 로스필드_호주 라트로브대학 교수 / 춤평론가

 

 


Ⅰ.  문화적 구성으로서의 민족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nation)은 상상의 정치 공동체입니다. “아무리 작은 민족이라도 그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거의 다 알거나 만나거나 심지어 들어볼 수도 없고, 그러면서도 각 구성원의 마음에 그 집단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¹근대민족국가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마을과는 다릅니다. 민족이 상상의 정치 공동체라는 앤더슨의 개념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어떻게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 즉 하나의 동일한 정체 안에 속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가? 앤더슨에게 있어 그 답은 집단적인 문화적 상상 속에 있습니다. 민족국가는 무엇보다 먼저 문화적 인공물, 즉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앤더슨은 근대민족국가가 문화적으로 구성된, 사회문화적 힘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민족 정체성의 역사적 기반이라고 할 만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그것은 구성의 산물입니다. 거대한 사회적 집단이 스스로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고 느낄 수 있는 메커니즘이 추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사진의 정치적 소속의 근원으로 기꺼이 민족국가를 떠올릴 수 있는가? 앤더슨은 그 메커니즘이 근대성의 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앤더슨은 근대민족국가 안에 상상의 구성요소가 있어 이것이 그 시민들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자신들을 상상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족은 고유한 공동체로 이해됩니다. 그 시민들은 이 공동체에 소속된다고 느낍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를 아는 채 살아가는 진정한 공동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민족은 집단적 상상의 행위를 통해 세워집니다. 앤더슨의 요점은 근대국가가 그 시민들에게 자신이 하나의 고유한 독립체에 속한다고 상상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체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민족국가는 전환, 분리, (재)통일의 시기를 겪습니다. 국경도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족적 정체성은 상상을 통해 구축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사회적 상상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치가들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베트남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위한 싸움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존슨은 베트남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투쟁이 군사 선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대중의 상상이라는 영역도 의미가 있습니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그것이 거짓이거나 오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상은 문화적 힘으로서 매우 진실된 것입니다. 광고에서는 항상 이를 이용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MM91NNqr45Q&feature=plcp  
아마 런던 올림픽 기간 동안 시청자를 한국인으로, 한국 선수들은 한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런 광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맥도날드는 다국적 브랜드로, 민족적 정서를 지나칠 정도로 기꺼이 자본화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경우는 잘 모르겠으나 호주 사람들은 최근 올림픽에서 호주 선수들의 경기에 (광고가) 집중하는 것을 보고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호주 교외의 가족들이 함께 올림픽을 관람하는 장면을 담은 광고가 TV에 도배되었습니다. 마치 민족 그 자체가 동시에 선수들의 경기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앤더슨의 주장은 이러한 광고가 올림픽처럼 광고비로 수십억 달러를 창출하는 맥락 안에서 민족을 하나로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광고의 몇 가지 특징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올림픽을 TV에서 관람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올림픽 기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집에서 개인적으로,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호주팀의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을 그리는 광고가 몇 개 있었습니다. 따라서 민족적 통합이라는 경험이 TV를 통해 매개되고 광고의 이미지를 통해 강조됩니다.

앤더슨은 TV로 올림픽을 보면서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하나로서의 민족 –하나의 상상 공동체- 이라는 개념이 신문, 라디오, TV와 같은 대중매체, 그리고 현재의 경우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TV와 같은 근대적 기술은 경제든, 국가나 정부, 지도자의 상황이든 같은 주제에 거대인구가 동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앤더슨은 이러한 동시성의 현상은 동일한 시간성을 경험할 수 있는 근대적 가능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문, 라디오, TV, 그리고 지금의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있기 전에는 앤더슨이 말하는 동일한 시간과 많은 인구를 연결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디쉬어의 옛 속담에 유럽의 외진 마들 ‘shtetl’을 묘사한 것이 있습니다. 대략 해석하자면 “전보를 부치는 데 2주가 걸린다”는 것입니다.²전보로 2주 떨어진 외진 마을은 근대성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근대성이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의 일부로, 동일한 시간의 감각에 속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전지구적 시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뉴스를 보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페이스북에 로그인합니다. 이러한 체험 은 시간적으로 탈구되어 있지 않고, 상호연결된 동시성의 감각만 있을 뿐입니다.

TV 이전에는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적 독립체의 일부로 느끼게 해 주는 수단이 라디오였습니다. 이것은 2차 대전 중 영국에서 중요한 열쇠였습니다. 라디오 주변에 모여 앉아 함께 소식을 듣는 장면이 자주 묘사돼 있습니다.

 

 

 

http://www.bbc.co.uk/schools/primaryhistory/world_war2/daily_life/  
이제는 유명해진 윈스턴 처칠의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싸울 것입니다…그러나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민족적 “우리,” 라디오 기술을 통해 잉글랜드 전역에 동시에 알려진 이 포괄적 표현을 언급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상상의 감각을 지탱하는 사건들은 많이 있습니다. 문화적, 정치적 휴일 또한 나라를 공동체 의식으로 묶어주는 기능을 합니다. 역사적 내러티브나 오래된 전통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공통된 일정이라는 점이 동시에 전 민족이 휴일을 즐길 수 있게 만듭니다. 한국에서는 최근 추석을 보냈을 것입니다. 추석이 전통, 공동체, 가족, 마을, 수확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방식들에 대해서도 여러분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전통은 어떻게 민족적 정서와 결합되는가? 모든 한국인들이 즐기는 민족적 휴일로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마을, 시골, 나의 뿌리로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는가? 만약 그렇다면 한국에서 수확, 가족, 농촌의 삶을 민족적으로 기념하는 형태로 실현되는, 공유된 상상의 공동체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추상과 신체사이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고 근대 기술의 산물이라는 앤더슨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추상적입니다. 근대성은 시민들 간에 추상적 형식의 연관성을 가능케 하고 이는 소속감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제 추상의 영역에서 물질의 영역, 실제와 실제 간의 관계로 넘어가 보고자 합니다. 물질의 영역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들을 직접 모은다는 것이 무엇이며, 공동체의 형태로 모인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근본적으로 전시를 위해 모이는 형식이 몇몇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사행진은 국가의 군사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군사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군사기계로 보이도록 훈련 받은 군인 개개인이 동일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데서 나옵니다. 군사행진은 움직임, 타이밍의 준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계화된 통일성을 거창하게 보여줍니다. 스텝, 행진의 리듬은 완벽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라기보다는 힘, 권력의 형태를 과시합니다. 각 군인은 집단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의 기능은 권력의 표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스포츠의 관중 또한 구체적인 인간의 측면에서 형성되는 집단의 하나입니다. 거대한 축구경기장에서 관중들은 연속적으로 파도를 타며 경기장 전체가 움직임의 흐름을 끊임없이 만들도록 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Qfovr85UqVQ  
파도타기는 정해진, 짜여진 움직임이지만 또 자연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몇 천의 관중이 협력하고 참여해야만 가능합니다. 실현하기보다는 관람만 하는, 경기라는 공통된 스펙터클과는 대조적으로 참여를 통해서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Ⅲ. 참여

이러한 사례들을 구분짓는 것은 참여입니다. 누가 어떻게 참여하는가? 선택과 참여의 기반은 무엇인가? 참여 자체가 집단의 정체성을 창출하는가? 아니면 이미 갖춰진 집단의 정체성이 참여를 통해 가시화되는가?

베키 힐튼(Becky Hilton)은 멜버른 출신의 아티스트, 안무가이자 퍼포머입니다. 그는 뉴욕의 스티븐 페트로니오 무용단에서 10년 넘게 활동했고 유럽 전역에서 권위와 학식을 갖춘 교사이자 리허설 감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공동체의 정치, 물질적 참여의 정치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용어는 “공동체 참여”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육체적, 감정적, 사회적, 문화적, 촉각적 의미의 접촉, 연결, 현존, 그리고 살아있음입니다. 그녀에게 커뮤니티 예술은 도시적 소외의 해독제, 고립에 대한 집단적 대응입니다.

그녀의 작업 하나를 예로 들고자 합니다. 2006년, 멜버른에서 영연방 경기가 열렸습니다. “위험에 놓인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로 ‘빅탑합(The Big Top Hop)’이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에서 4개의 청소년 그룹이 만들어졌습니다. 각 그룹은 호주 원주민 출신의 젊은 힙합 아티스트와 수개월간 연습하였습니다. 그 결과물은 800석짜리 ‘빅탑’ 텐트에서 무료로 공연되었습니다. 베키는 청소년들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정렬하고 공연을 올리는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고 쇼(The Go Show, 2006)> 역시 지역을 기반으로 그녀의 멜버른 교외직역인 풋스크레이(Foortscray)에서 이뤄진 행사였습니다. 풋스크레이 지역예술센터의 예술감독 제릴 렉터(Jerril Rechtor)는 센터를 거쳐간 많은 공동체를 관찰해보았지만 그들은 서로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레지던스 아티스트로서 베키의 지침은 공연을 통해 다양한 공동체를 한데 모으자는 것이었습니다. 지역 풋볼팀을 파트너로 찾아 베키는 이 행사를 스포츠-예술 프로젝트로 고안했습니다. 그녀는 12개월에 걸쳐 풋스크레이의 모든 공동체 –뜨개질 클럽, 독서모임, 풋볼 치어리더팀, 축구팀, 중국 해피에이지(Happy Age) 볼룸댄스 모임, 보 투앗(Vo Thuat) 베트남 무술, 힙합 그룹- 을 방문하였습니다. <고 쇼>의 기본 원칙은, 참여를 원하는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베키의 목표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보이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 쇼>는 2006년 3개 장소에서 올려졌다. 3대의 버스가 대규모 풋볼경기장에서부터 아담한 풋스크레이 지역예술센터까지, 각 장소로 관객들을 데려다 주었고 관객들은 퍼포머들을 1:1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 쇼>는 2008년 멜버른 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다시 한번 공연되었습니다. 베키가 풋스크레이의 거리를 걸으면 많은 주민들을 알아보고 그들 역시 그녀를 알아봅니다.

그녀의 작업은 단지 지역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서울 나비아트센터의 박순호와 협력한 다국적 프로젝트인 ‘헬로우 2011’에도 참여했습니다.
http://spatialaesthetics.unimelb.edu.au/projects/large-screens-and-the-transnational-public-sphere/hello-project-2011-performance  
베키는 이 프로젝트에서 여러 개의 질문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고 그 제스처들을 한데 엮어 하나의 연결된 움직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움직임을 호주 무용수에게 가르치고, 그 무용수는 실시간으로 영사되는 대형스크린을 통해 한국 참가자 2명에게 이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참가자들은 이 움직임을 “복제”하여 또다른 호주 참가자들에게 보여주고, 그 사람은 다시 한국인 2명에게 제스처를 반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베키의 창조적인 인풋(과 천재성)은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이동하는 불안정한 물질적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변형가능성은 호주의 신체와 한국의 신체 사이의 번역문제로서의 신체간 소통에 더해지는 공통적 요소입니다. ‘헬로우 2011’은 다국적이었습니다.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여 실시간으로 신체를 연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커뮤니티 댄스는 보다 지역적인 기반을 통해 지역적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가자와 그 친구, 가족들을 위해 더 좋을 것입니다. 공동체 자체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댄스하우스(Dancehouse)라는 멜버른의 무용 공동체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댄스하우스 이사회장을 몇 년간 맡아오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주 묻게 되었습니다. 댄스하우스 공동체는 누구인가? 또 기업경영의 용어를 빌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우리의 주주인가. ‘기업’이라는 단어는 신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corpus’에서 왔습니다.
댄스하우스는 최근 20주년을 맞았습니다. Expressions of interest were invited from artists to perform in a celebratory show. 그 기념행사의 일부로 아티스트들에게 2분 동안 강연과 공연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의 참여는 기획이라기보다는 자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댄스하우스의 10주년 기념행사로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다이안 라이드(Dianne Reid)가 창작한 커뮤니티 댄스의 이야기로 마치고자 합니다. 다이안은 나를 포함한 여러 무용수들에게 어떤 재료의 일부를 즉흥으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그것을 촬영하고 그것들을 이어 붙여 3분짜리의 쭉 이어진 움직임 재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용수-교사의 작은 조를 만들어, 참가자들이 이 움직임을 배워 댄스하우스 근처의 길거리에서 추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댄스하우스와 관련 있는 아티스트들의 신체에서 형성된 커뮤니티 댄스를 신체에서 신체로 이전시켜 댄스하우스 공동체가 추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베키 힐튼의 표현에 따르면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가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입니다.
DVD 상영



 Ⅳ. 결론

우리는 먼저 민족국가가 상상 공동체의 감각을 형성하는 수단들 –그리고 매스 미디어, 문맹률 저하, 거대소비, 통일된 시간- 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리적, 물질적, 실제적 공동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체간 관계에 기반해 사람 대 사람의 적극적 참여와 개입을 제공합니다. 베키 힐튼에게 이것은 도시적 소외의 해독제로서 적극적인 소속감을 더욱 구체적인 감각으로 확립해줍니다. 다문화 혹은 이주민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필요성이 더더욱 요구됩니다. 몇몇 커뮤니티 댄스 프로젝트가 예를 들면 포크댄스 등으로 분명한 문화정체성을 지탱, 강화합니다면, 힐튼의 <고 쇼>는 풋스크레이 사회의 다양성을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장소별로 관객들을 데려다 주었던 각각의 버스에, 현지 선원, 스포츠 기자, 풋볼 선수, 원주민 노인, 최근 수단에서 온 난민 등 지역 정체성의 요소를 심어놓았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개인을 하나의 공동체의 일부로 가시화시킴으로써 공연에서 확립되는 공동체의 폭넓은 개념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참여와 가시화를 장려하는 것은 포용, 참여,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것은 커뮤니티 예술 창작 영역에서 감지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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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es, p.15.
*2. “Tsvei wochen ein telegram”

2012.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