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유니버설발레단 황혜민ㆍ엄재용 고별 무대 〈오네긴〉
방희망_<춤웹진> 편집위원
유니버설발레단의 간판 무용수 황혜민과 엄재용이 은퇴를 선언, 11월 26일 〈오네긴〉으로 고별 공연을 가졌다. 각각 2000년과 2002년 입단한 엄재용과 황혜민은 그동안 뛰어난 파트너십으로 한국 발레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현장 스케치를 곁들여 고별공연의 이모저모를 엮었다. (편집자 주)




■ 현장 스케치


드라마와 삶이 포개지는 순간



 
 드라마와 삶이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11월 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 마지막 무대는 이 공연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황혜민-엄재용 커플과의 ‘예정된 이별’이었다.
 성숙한 감각,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두 무용수가 정든 무대, 관객과의 이별을 결심하는 것은 타티아나가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는 오네긴을 떨쳐내듯 분명 알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일 터였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이번 〈오네긴〉 공연은 2013년의 초연에 이어 두 번째인데, 재작년 이 작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이 강수진의 은퇴공연으로 내한한 바도 있어 국내에서 활동해온 걸출한 두 스타의 은퇴공연이라는 의미를 덧붙여 유니버설발레단만의 색채가 어떻게 어우러져 나올지 궁금했다.
 언제나처럼 문훈숙 단장이 무대에 올라 작품해설을 하는데 이번에는 특히 무대장치와 소품이 가진 의미에 중점을 두어 설명을 했다. 문단장이 지난 16년간 유니버설의 간판스타로 활약해온 황혜민과 엄재용을 떠나보내는 고별무대임을 알릴 때 눈물로 목이 메는 모습을 보이자 일순간 객석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막이 오른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은 외적으로는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이나 다른 유럽 혹은 미국의 발레단과 세트, 의상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구체적인 풍경화를 그려내듯 화려한 유럽 무대의 세트와 달리 유니버설발레단의 세트는 나무 몇 그루와 건축물의 기둥만으로 장면을 가름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심심하다고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오히려 상징적으로 압축된 그것이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되었다.
 충동과 격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여러 인물들을 앞에 두고 굳게 선 나무와 기둥을 대비시켜 보노라면, 이 모든 감정의 파노라마는 결국 우리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특히 1막에서 오네긴의 등장부터 눈에 띄는 ‘사선’의 이미지는, 배경의 곧게 뻗은 선들과 바로 대비되면서 안무가 크랑코가 춤과 동작 속에 인물의 성격을 고스란히 녹였음을 느끼게 한다. 그의 걸음, 회전하더라도 사선방향으로 묘한 각을 이루는 독특한 동작들은 오만하고 독야청청한 오네긴 그 자체인 것이다.
  1막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꿈 속 파드되에서 현란한 리프트 속에서도 타티아나가 취하곤 하는 비스듬한 사선의 자세 역시 위험스럽게 내면의 정열을 내뿜는 타티아나를 상징한다. 그에 비하면, 클래식한 직각을 이루는 그레민과의 파드되는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인가. 안정된 사랑과 위험한 정열을 더욱 직관적으로 대비시키는데 세트가 한 몫을 한 셈이다. 

 


 타티아나의 생일파티에서 벌어진 유니버설발레단 군무의 오밀조밀한 연기는 이 단체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시골 사람들 속에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오네긴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예기치 않은 타티아나의 연서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 대한 불만이 돌출행동을 촉발시켜 렌스키와 결투하게끔 끌어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좋은 장면이었다.
 극 전개가 타당하도록 장면과 장면 사이를 채우는 연기의 섬세함이 요구되는 드라마발레에서 군무의 연기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리 발레단들이 갖고 있는 약점인데, 유니버설발레단이 나름 많은 준비를 했다고 느껴진 한 컷이었다.




 공기를 한껏 품은 듯 가벼운 황혜민의 춤은 1막 꿈의 파드되에서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설령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랑의 꿈을 꿀 수 있는 시골 소녀의 자유분방한 매력이 객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5년간 부상 한 번 없이 철저히 관리해온 근성의 발레리나가 마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처럼 빛나는 춤을 선보이는 모습은 이대로 떠나보내기가 아까울 정도다.
 황혜민 혹은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의 타티아나가 노선을 달리한다는 것은 3막 오네긴과 재회 후 이별하는 파드되의 의상에서도 나타난다. 그 의상은 어깨를 드러내게 하고 아워글래스 실루엣으로 사회적 지위를 갖춘 성숙한 여인의 관능미를 강조하는 외국의 경우와 달리 차분한 금빛 드레스로 우리 무용수의 가녀린 체격에 어울리게 제작되었다. 타티아나가 결혼 이후에도 예전의 청순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다 더 강조하는 장점도 있었으나, 15년 세월의 흐름을 오네긴 혼자 맞이한 듯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는 단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인생의 쓴맛을 겪고 중년이 되어 변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남녀가 갑작스럽게 맞이할 치명적인 찰나의 유혹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타티아나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순진하던 처녀적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 낭만적이다.
 어긋난 타이밍으로 회한의 눈물을 삼키게 되는 첫사랑의 아픈 기억을 소환하는 〈오네긴〉이지만, 황혜민 엄재용 커플의 은퇴공연을 겸해 관람하면서 역설적으로 안온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랑의 가치를 더욱 느끼게 되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공연의 막이 내린 뒤 관객들은 발레단 측에서 준비한, 두 사람이 그간 활약한 공연내용이 압축된 동영상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백조의 호수〉나 〈지젤〉 같은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청〉〈춘향〉 등 유니버설발레단이 개척해 온 레퍼토리의 최전방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은 무언가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황혜민과 엄재용 커플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발레단 측에서 은퇴공연의 주인공 몰래 깜짝 이벤트로 객석마다 꽂아놓은 플래카드에는 “발레 해줘서 고마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랜 시간 민간발레단의 간판스타로서 자리를 지켜온 미덕을 동시대의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 분명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기꺼이 그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와 기립박수를 보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12.
사진제공_김경진/유니버설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