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르코예술극장 40주년 강경렬·신호
무용인과의 합심 협력으로 전문성을 다듬었지요
  • 일    시
    2021년 10월 18일 오후 2시
  • 장    소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김채현_춤웹진 편집장

김채현: 대학로에 소재한 아르코예술극장이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았습니다. 1981년 문예회관 이름으로 서울에서나마 처음 열은 이래 전국 도처에 문예회관들이 세워지는 계기를 마련한 극장입니다. 이처럼 아르코예술극장은 한국에서 문예회관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전에는 시민회관 시대였지요. 지난 10여 년 사이 극장과 공연장이 다변화되어왔습니다만, 적어도 2010년까지 아르코예술극장은 공공 극장으로서 한국의 춤예술 전개에서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갖는다는 것이 제 개인적 판단이며 춤계의 중론일 것입니다. 그만큼 무용인들한테 중요한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 공간이 40년 동안 쌓아온 실적을 토대로 그 가치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아르코예술극장 40년이 춤과 연관해서 실제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살폈으면 합니다.
 이런 점들이 언젠가는 짚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온 터에 올해 아르코예술극장이 4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40년 역사를 공공 극장으로서 공연예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등 다각도로 짚고 그 명암을 재조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선은 극장 무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업하신 분들을 모셨습니다. 강경렬 선생님은 극장 개관 초기부터 1998년까지 무대감독을 맡으셨고 신호 선생님은 1999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조명을 담당하셨습니다. 두 분은 이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시지요. 아르코예술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기계 분야에서 역할 하신 분들은 많으시겠습니다만 사정상 두 분만 모시게 되어 널리 양해부터 구하며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밤의 플랫폼 팸플릿 표지 스캔본, 아르코예술극장 앞 마로니에공원의 현수막 ⓒ김채현



아르코예술극장 입구벽에 부착된 밤의 플랫폼 현수막 ⓒ김채현




김채현: 극장 측에서도 아르코예술극장 개관 40주년 기념 아카이브 프로젝트 ‘밤의 플랫폼’ 전시 프로그램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1~2층에서 10~11월에 하더군요.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저도 ‘밤의 플랫폼’ 프로그램을 가서 봤습니다. 거기에 극장 스태프로 근무하신 강경렬(무대 담당), 조갑중(음향 담당) 선생님, 두 분의 회고담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던데, 그 자리에서 마침 10페이지 정도로 정리된 강 선생님 인터뷰도 일별했습니다. 인터뷰 중에서 호기심을 끄는 대목도 있더군요. 예를 들면 1983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준비할 적에 연출 계획상 소형 차량이 실제 아르코극장 무대에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그 당시 극장 측의 반응이 일단 부정적이었다더군요. 강경렬 선생님께서 시말서를 쓸 각오로 소형 차량이 등장하도록 한 사실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결국 공연예술계에서 호평을 받았었고, 이후 그 정도 무게를 극장 무대가 충분히 견뎌낼 수 있고 그런 식으로 연출을 도우는 극장이라는 인식을 공고히 하게 됐다는 말씀이 회고담에 나옵니다. 오늘은 두 분을 모시고 아르코예술극장의 변화상을 공연, 춤 공연 현장과 연관해서 이모저모 짚어봤으면 합니다.




아르코예술극장 2층에 전시된 극장 스태프진 증언 텍스트 ⓒ김채현




강경렬: 저는 1981년 문예회관 공채 1기입니다. 그 당시 공개 채용을 했고,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부산시민회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입사를 희망했습니다. 초대 관장님이 부산MBC 가요 피디를 하셨던 분이었어요. 예술성도 뛰어나고 대학 때 연극을 전공한 분입니다. 극장을 잘 만들고 싶어 했고, 극장 운영에 굉장히 노력하셨어요. 문예회관이 개관하기 전에 1974년에 연극인회관이 세실극장(서울 정동)으로 옮겨졌죠. 그리고 1981년에 문예회관이 개관했습니다. 그전에 제가 세종문화회관에 3년간 근무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봤고 진행 상황과 조명을 많이 익혔죠. 당시에 소극장에 근무했던 분들, 조그마한 세실극장에 있던 분들은 문예회관을 커버하지 못하더라고요. 입사 후 관장님이 개관 전에 이 극장의 문제점을 7가지만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시더군요. 순진한 마음에 보이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걸 보고 본부장이 굉장히 화를 내셨다고 합디다. 막 입사한 신입 사원이 허점을 지적했으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정되었으면 하는 점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이 극장에서는 이런 일이 재발하면 안 되겠다’ 그리고 ‘문턱이 낮은 극장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랬는데, 오해를 샀던 기억이 납니다.

예들 들면 어떤 문제점을 지적하셨던가요?
강경렬: 첫째로 무대가 박스형으로 가로, 세로 17m였습니다. 그래서 원근감이 조성되도록 앞 양쪽을 1m 정도씩 줄여서 가로 15m에 세로 17m로 만들자고 했어요. 그리고 무대 막이 자줏빛 붉은색이었어요. 라이트가 들어가면 밝아지기 때문에 블랙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또 무대 바닥이 굉장히 딱딱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목재를 썼으면 좋겠다는 등 7가지를 적어냈어요. 결국 무대막이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바닥은 10년이 더 지나 바뀌었는데, 나머지는 제가 극장을 나올 때까지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원근감 있는 무대 구조를 마련하자는 뜻이셨는데... ‘밤의 플랫폼’ 대담 내용을 보니까 이제는 세로가 24m인데 재직 당시에 우선 가로를 양쪽으로 1m씩 줄이자는 방안을 제시한 내용이 있더군요.
강경렬: 제가 나올 때까지는 가로, 세로 17m를 그대로 썼습니다. 후배들이 들어오고 시대가 많이 바뀌고 또 예술을 아는 분들이 극장장이 되면서 결국 바뀌었어요. 일본식 가부키 극장은 가로가 길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럽에 가면 앞은 좁은 편인데 깊이 쪽으로 굉장히 깁니다. 그걸 보고 가로를 줄이자 했지요. 지금은 뒤로 주차장 쪽으로 7m가 늘어나서 훌륭한 극장으로 변모되었죠.




강경렬 ⓒ춤웹진




극장 변천사를 들으니 흥미로운데, 천천히 더 듣도록 하지요. 당시 공채 1기로서 함께 입사하신 분들이 어느 분들이었죠?
강경렬: 조명 쪽에는 문예진흥원에서 운영했던 세실극장에서 있던 김의중 씨 그리고 정진덕, 박종찬 씨 세 분이 있었죠. 무대 쪽은 그 당시 사람이 없었고 조명 쪽만 있었어요.

선생님은 어떤 직책으로 입사를 하셨는지요?
강경렬: 무대 주임으로 있었어요. 그 당시 3급~1급까지 있었는데요. 총무부장이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손기준이라는 동기가 국립극장 조명을 담당했어요. 손기준과 저는 경험이 많아서 1급을 줘야 마땅하기 때문에 조금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럼 언제 1급이 되셨어요?
강경렬: 1987~8년 경에 1급으로 승진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자료를 보니까 1988년에 선생님이 무대감독으로 취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98년까지 무대감독으로 계셨던 거지요?
강경렬: 그전까지는 무대 주임이 무대감독 역할을 했어요. 후에 무대감독이라는 정식 명칭을 받았습니다. 품위유지비라고 5만 원과 매일 신문 2부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무대 분장실 위에 창고가 있었습니다. 사무총장님이 그곳을 무대감독실로 쓰라더군요. 그러나 무대감독이 떨어져 있으면 안 되어서 그 방을 쓰지 않고 무대실에서 쭉 근무했습니다.

1981년에 극장을 열었는데, 문예회관에서 있었던 춤 공연 조명을 김의중 선생, 정진덕 선생, 박종찬 선생이 하셨을 테고 무대 주임으로서는 선생님께서 전적으로 맡아서 하셨던가요?
강경렬: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에 81년도 오픈할 때 연극을 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무용 쪽에서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도 해야 한다고 해서 무용이 들어왔어요. 김의중 씨와 정진덕 씨가 조명을 했습니다만, 무용 조명을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진덕 씨가 무용 조명 분야에서 발전이 훨씬 빠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이상봉 씨가 81년도에 건설본부에 들어와 있었고 그다음에 다른 분도 무용 조명을 했는데, 이상봉 씨는 굉장히 진취적이었습니다.

이상봉 선생은 문예회관에 정식 직원으로 계셨다가 다른 곳으로 옮기신 줄로 압니다만...
강경렬: 네. 건설본부에 계시다가 조명으로 왔죠. 예술의전당 개관할 때 그분은 조명 차장, 저는 무대 차장으로 가기로 내정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종덕 이사님이 둘 다 못 보낸다고 했죠. 이상봉 선생만 옮겼지요.

선생님 계실 적에는 문예회관으로 개관했고 극장 이름이 아르코예술극장으로 바뀐 게 언제였던가요?
강경렬: 2002년에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05년에 아르코예술극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르코예술극장 2층에 전시된 사진 자료 중 극장 장치 반입구 변동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 ⓒ김채현




문예회관이든 아르코예술극장이든 갈 때마다 극장이 편안하다고 느껴요. 앞 좌석과 뒷좌석이 시선을 방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고 객석 경사가 급하지 않고 편안한 관람 분위기입니다. 그 극장이 처음 만들어지고부터 지금까지 극장의 구조는 거의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데, 객석 배치는 조금 달라졌어요. 전체 구조에서 무대 폭과 깊이가 달라졌을 것이고, ‘밤의 플랫폼’ 소개 내용을 보니까 장치 반입구 같은 것이 조정됐다는데 극장의 물리적 변화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강경렬: 극장을 김수근 선생이 설계했고 현대건설에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술하는 사람들이 혹평을 했습니다. ‘잘못 지어졌다. 어떻게 객석의 벽을 벽돌로 만드냐. 소리가 튀지 않겠느냐’고요. 그리고 분장실이 지금도 협소합니다. 차라리 지하 연습실 한쪽을 분장실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장실이 딱 두 개였어요. 그래서 혹평들을 했었는데 외국단체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극장에 대해 호평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 의견들이 수그러들었어요.

외국인들이 호평하는 이유는 뭘까요?
강경렬: 무엇보다 시각 각도였습니다. 그 다음에 김수근 선생이 객석을 만들 적에는 나열식, 일자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람 뒤통수를 보는 객석이 아니라 사이로 보도록 했습니다. 앞뒤 좌석에 가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연기자들이 무대를 바라봤을 때 편하게 느껴진다는 거에요. 일자로 있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는 거죠. 이런 게 호평의 요소였습니다. 그때 외국 단체가 객석이 왜 길지 않고 열 석밖에 안 되느냐고 물었어요. 통로가 지금은 세 개인데, 그때는 네 개였어요. 가운데 하나가 줄었어요. 그다음에 소방법 때문에 열 석 이상 연결을 못 하게 되어 있어서 잘랐는데, 소방법이 바뀌면서 가운데 통로를 줄여서 객석을 만들었죠.

객석이 늘었나요?
강경렬: 좌석이 커졌고 앞뒤 간격을 늘여서, 처음에 객석이 709석이었는데 지금은 음향, 조명실이 있다 보니 606석입니다.

709석 시절에도 많이 갔습니다만, 저로서는 그 시절 좌석이 더 나았던 느낌입니다.
강경렬: 훨씬 예쁘고요. 무대와 관객석 사이에 거리가 있었습니다.

극장의 장치 반입구 개조는 언제 했었지요?
강경렬: 이 극장 뒤를 늘리면서 바꾼 거죠.
신호: 2002년 경으로 기억합니다.

그전에는 반입구가 극장을 애당초 처음 만들 때부터 썼던 그대로 유지됐었지요?
강경렬: 그래서 적어냈던 일곱 가지 중 반입구가 좁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사실 폭이 240cm 넘으면 못 들어옵니다. 옆으로 대각선을 세워 들어왔는데, 연극 같은 경우 장치를 철수하면 밤 12시 가까이 됩니다. 12시 넘어 새벽에 장치가 들어오지 않습니까. 장치가 들어오려면 시끄럽기 때문에 극장 옆 주택가에서 항의하곤 했었습니다. 극장 어느 옆집의 안주인이 불러서 ‘밤에 안 할 수 없나요’ ‘잠을 잘 수 없어요’라고 하소연한 것을 본관에서 알았죠. 반입구 문이 작은 때문에 항의가 들어오니까 제가 81년도에 문이 작다고 했던 말이 맞다는 걸 그제사 알게 되었죠.

무대 폭과 깊이, 그 조정을 언제했죠?
신호: 2000년인지 2002년인지...
강경렬: 무용 공연 준비 과정에서 밤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기 쉽지요. 그러니까 관장님이 제가 밤을 새웠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런데도 계속 밤을 샜습니다. 왜냐하면 밤에 장치를 교체할 적에 다투고 문제가 생겨요. 극장 직원은 규정을 지키려 하고 공연하는 단체는 조금 어기면서도 더 해 보려고 하므로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요. 그 당시 전국의 극장 영화관 공연장 등의 입장료에서 3%를 걷어 문예진흥기금으로 쓰고 극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극장을 사용하는 예술인들의 기세가 더러 셌습니다. 우리가 낸 기금으로 봉급 타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어요.




  

아르코예술극장 2층에 전시된 극장 스태프진 증언 코너 ⓒ김채현




말씀을 들어보면 극장 공학에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시기에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상당히 이해가 가는 일이고 또 그런 시행착오를 딛고 나아가는 것도 발전일 텐데, 지금 세대는 도저히 피부에 와닿지 않을 발전이겠죠. 감독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시 대학로의 문예회관에서 있은 춤 공연에는 대부분 다 관계하셨을 것이고, 그동안에 우리나라 춤의 흐름이나 변화도 피부로 느끼셨겠죠. 그동안 재직하면서 무대감독을 하신 작품의 무용가 또는 춤 단체가 얼마나 될까요?
강경렬: 참 많을 겁니다. 무용은 극장 대관을 개인 공연 아닌 행사의 경우 대극장 일주일, 소극장 이주일 해줬습니다. 무대에 직원들이 다섯 명 있었는데요 극장 운영을 안 했었기 때문에 어떻게 운영하는지 몰랐어요. 무용은 큐를 줘야 하는데, 우리가 모든 걸 다 해 줬습니다. 별도 페이 없이 조명도 음향도 무대감독도 다 제공해준 거예요. 어느 단체이든 다 지원해줍니다. 밤을 새워서더라도요. 밤을 새워서 일하지만, 큐 하나 잘못 주면 무용은 1초를 갖고 다투니까 본의 아니게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무용을 안 맡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저한테 무용을 맡으라 해요. 말썽이 있어도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거의 하다시피 했어요.

문예회관 현직에 계시면서 무대감독 직무로 접촉한 무용가들을 기억나시는 대로 거명해보시지요.
강경렬: 〈춤웹진〉에서 미리 부탁을 받고 무용인들 명단을 정리해왔습니다. 그 명단은 이렇습니다. 강경모 · 강미리 · 강미선 · 강선영 · 강송원 · 국수호 · 금슬회 · 김경희 · 김근희 · 김기인 · 김나영 · 김남식 · 김말애 · 김매자 · 김명숙 · 김민희 · 김백봉 · 김복선 · 김복희 · 김삼진 · 김선희 · 김성한 · 김소라 · 김숙자(전통) · 김숙자(창작) · 김순정 · 김영미 · 김영희 · 김예림 · 김온경 · 김용걸 · 김용복 · 김 원 · 김인숙 · 김정학 · 김종덕 · 김주원 · 김진홍 · 김현자 · 김혜은 · 김화례 · 김화숙 · 김효분 · 남수정 · 남정호 · 문일지 · 민준기 · 박금자 · 박기자 · 박명숙 · 박상원 · 박숙자 · 박인숙 · 박인자 · 박일규 · 박재희 · 박현옥 · 발레누보 · 발레블랑 · 배정혜 · 서미숙 · 서정자 · 서차영 · 설무리 · 성재형 · 손관중 · 송수남 · 송준영 · 송화영 · 신은경 · 안귀호 · 안병순 · 안병주 · 안신희 · 안애순 · 안은미 · 애지회 · 양길순 · 양성옥 · 오율자 · 오은희 · 육완순 · 윤덕경 · 윤미라 · 이고은 · 이길주 · 이노연 · 이동안 · 이매방 · 이선옥 · 이숙재 · 이영희 · 이원국 · 이윤자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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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무대감독이라든지 또는 무대 스태프가 문예회관 대극장을 계기로 대한민국에서 전문직으로 정착되었다고 봐도 되겠죠?
강경렬: 그렇습니다. 문예회관이 오픈하기 전에 명동예술극장 있었고, 연극은 74년도 연극인 회관, 77년도에 세실극장이 있었고 그 당시 엘칸토예술극장도 있었어요. 삼일로 창고극장과 공간사도 있었죠. 공간사랑에서는 무용을 더러 했죠. 무용인들은 그런 곳에서 하다가 정통적인 극장은 문예회관이 처음이었기에 사실상 무대를 사용할 줄 몰랐어요. 연극도 문예회관에 오면서 장족의 발전을 했고 무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무대감독이 어떤 역할인 줄 몰랐어요. 문예회관에서 공연 연습이나 리허설에서 스태프진들을 대할 적에도 그런 직책으로 부르는 경우가 초기에는 드물었어요.

자료를 보니까 대관을 해도 무대 리허설 개념이 별로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시간 여유를 가지면서 스태프진과 창작진이 협의해서 작품을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그런 여유가 없었다고요...
강경렬: 시간 여유보단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고, 연습장에 가 본 적이 없죠. 연습장에 모여 협의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일이 쉽지 않았어요. 장치가 내려온다고 하면 바닥까지인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무용인이나 우리나 처음에는 개념이 없었죠. 연습장에 가본 일도 없었고 작품 해석도 몰랐어요.

그런 시행착오 내지는 수습, 견습 기간이 흐른 후 전문성이라 할까, 무대 기술팀과 창작진의 상호협의 하에 작품을 만들어가게 된 것은 언제쯤인가요?
강경렬: 한 3년 걸렸어요. 84년경부터 작품 연습을 보러 갔고, 큐시트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무대감독 하시면서 춤 분야에 얽힌 일들이 많았을 텐데요.
강경렬: 초창기에 천장의 장치 바텐이 16개였습니다. 음악 하시는 분들이 음악을 위해 반사판을 만들어달라면서 극장에서 공연하겠다고 했어요. 음악 반사판을 만드니까 세트 바텐이 7개로 줄었습니다. 세트 바텐이 16개에서 7개로 줄어버렸으니 가로, 세로 17m에서 7개로 움직이려다 보니 조명과 배경이 허술해지는 거죠. 당시 1세대 무대미술 작가들의 그림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무용인들이 장치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치를 만들어옵니다. 천장 공간이 비어 있는 줄 알고 큰 입체를 만들어 와서 달아 달라는 참 난감한 경우들도 있었지요. 극장 구조를 잘 모른 채 입체 장치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제작했지만, 결국 못 쓰게 된 경우가 드물지 않았죠.

시행착오가 많았었군요.
강경렬: 무용 분야 조명 발전을 이야기하면 초창기에는 이상봉, 정진덕 씨가 두각을 나타냈어요. 굉장한 라이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장에는 굉장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조명은 수동이었죠. 정진덕은 조심스럽게 올리는데 이상봉은 쉽게 올립니다. 그래서 한국무용 분야는 정진덕이 으뜸이었고 현대무용 분야는 이상봉이 으뜸이었어요. 신호 씨는 다른 극장 생활을 좀 했어요. 우리 극장엘 굉장히 오고 싶어 했어요. 이 친구는 극장에서 셋업하고 공연하는 걸 많이 보고 사전에 공부를 많이 했어요. 이 친구가 이상봉 씨, 정진덕 씨의 장점을 다 참조한 거예요. 조금 변형해서 더 잘 만들어 지금의 신호 자신의 것이 된 거죠. 그냥 넘어갈 것도 다시 한번 시도해보는 거죠. 국내 춤 무대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신호 ⓒ춤웹진




신호 선생은 문예회관 조명 스태프로 오고 싶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디서 작업하셨던가요?
신호: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85년 1월에 대학로에 왔어요. 파랑새 소극장이라고 낮에는 어린이 연극, 저녁에는 일반 연극을 하는 극장에서 일했어요. 연극 일을 하는 거죠. 무용은 대학 때 드라마센터에서 졸업 작품 발표회 한 것 외에는 없었지요. 그때까지 저는 주로 연극, 뮤지컬에 특화된 스태프였던 것 같아요. 당시 대학로에 하나밖에 없는 문예회관이라는 극장에 멋진 선배님, 선생님들이 계셨었죠. 아르바이트 겸 배우려고 밤새우는 일을 계속했어요. 가끔 선배님이 불러서 했는데, 그때는 지금과 같이 52시간 근무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 작품씩 바뀌었어요. 특히나 무용 같은 경우는요. 그러니까 전날 밤에 준비해서 그다음 날 아침에 조명을 시설하고 오후에 리허설을 간단하게 하고 저녁때 공연하는 거죠. 그럼 저녁에 가는 팀, 새롭게 들어오는 팀이 있어요. 그래서 하루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인 거죠. 저는 85년도부터 대학로에 와서 선생님들의 관행을 보면서 공부를 시작했죠. 그때는 빛돌이라고 해서 조명을 어디에 비추는지에 따라서 진행을 하는 일, 전선을 따로 만드는 일들, 사다리를 잡는 허드렛일을 밤에 했지만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저는 사실 무용을 되게 무서워했어요.

아르바이트할 적에도 무용 아르바이트를 하셨나요?
신호: 그것은 선배님들의 요청에 의해 하는 거고, 주로 다른 작업을 했었어요. 89년도에 동숭아트센터가 만들어지면서 개관 공연 때 무용을 했는데, 그때부터 무용을 실질적으로 접하게 된 거죠. 제가 무서웠던 이유는 선생님들 목소리가 굉장히 부드러운 거 같은데 날카롭습니다. 제가 동숭아트센터에 있으면서 문예회관에 있는 선배님, 선생님이 참 많이 왔고, 이것저것 요구했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무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장르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작업은 조금씩 했어요. 그러다 99년 2월 1일 문예회관에 입사하면서 저한테 각오가 생겼어요.

왜 문예회관 대극장에 가야겠다고 소망하셨어요?
신호: 그전에 92년도에 오라고 한 적 있어요. 그런데 그 극장에 가면 죽을 것 같았어요. 그 공간이 하루하루 움직이는 숨막히는 공간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연강아트홀로 도피했어요. 동숭아트센터, 연강아트홀(두산아트센터)에 다니면서 무용보다는 연극, 뮤지컬, 콘서트를 주로 조명하였고 대관담당, 기획, 공연장 운영도 함께 업무를 보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인생의 전환기를 만들고자 했지요. 92년도에 저와 이인연 감독에게 입사 의뢰가 왔고, 이인연 감독이 93년에 문예회관에 입사했습니다. 이인연 감독님이 잘 하는 모습을 보다가 최형오 감독님이 오셔서 5년만 있어 보라고 권하여 왔다가 15년 동안 있게 되었죠. 그때부터는 무용을 무조건 해야 했어요. 이 극장이 가진 주류 공연 100% 중에서 공연 기간을 별개로 생각하면 작업 비중은 60%가 무용, 40%가 연극과 그 의외의 공연이었어요. 그래서 무용을 더 공부하게 되었어요. 강경렬 선생님이 1년에 큰 행사를 2~3개 하세요. ‘현대춤작가12인전’이나 ‘서울무용제’, 또는 개인 공연 무대감독으로 오시는데, 선생님과 정진덕 선생님 것을 보면서 조언도 많이 얻고 공부도 많이 됐어요. 어느 날 강 선생님이 2005년 즈음 “신호, 너 많이 늘었다”고 하셔서 제가 조금 더 하면 무용에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오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2007년도 이후 춤이라는 것에 눈을 떴다고 생각해요. 그전까지는 춤 공연할 때 잘하든 못하든 밤새워 극장에서 일했어요. 무용인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지 참 고민했죠. 몇 년 동안 고생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좋은 말씀 해주시고, 2007년 좀 지나서 긍정적인 반응들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극장 조명 스태프로 1999년에 문예회관 입사한 초장부터 바로 무용공연 조명에 관계했었던가요?
신호: 혹독한 신고식도 했죠. 페스티벌, ‘세계 음악과 만나는 춤’, 서너 개 팀이 한다든지 ‘대학무용제’ 해서 40개 팀이 하기도 하는데 하루 만에 제가 어떻게 합니까. 리허설 시간이 40분씩 주어졌는데 계속 시간이 늘어지게 되는 거죠. 분장실에서 어느 선생님이 “한 시간을 기다렸어요, 단원들이 가진 정신적 스트레스나 배려를 왜 해주지 않냐”고 굉장히 화를 많이 내셨어요. 눈물이 글썽하는데, “제가 실력이 모자라서 늦어지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어요. 객석 뒤에 앉아서 청승맞게 울었는데, 제가 그때 마흔 살이었어요. 정말 불쌍한 직업이란 생각을 하면서 후회한 적도 있어요. 어느 무용단은 정기공연을 소극장에서 했는데 정말 밤 새웠어요. 연습실도 열심히 다녔지요. 그래서 작품을 잘 끝냈어요.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고생했더라고요. 무용이 일반 연극 같이 사전 요구가 명확했다면 작업이 어느 정도는 편했겠지만 추상성이 있고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무리 시놉시스를 보더라도 와닿지 않고 또 감성적 형용사들이 일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진행됐을 거라고 짐작하기가 예사겠죠. 방금 말씀하실 적에 하루에 모든 걸 다 처리하고 다음 날 또 다른 작업을 맡았다는 게 80년대 중반 시절 이야긴 것 같은데요.
신호: 80년대 중반 문예회관 시절에 그렇게 선배님들이 작업하실 때 저는 입사하지 않았지만, 가장 좋은 극장이니 주어진 여건이 된다면 무엇이든 가서 배우려 했어요.

무대, 조명, 음향, 기계 분야마다 직책이 있고 그에 따른 호칭이 있는데, 호칭이 바뀐다는 것은 그 호칭을 가진 사람에 대한 개념이 바뀌는 거죠. 예술적 전문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81년도에 개관한 이후 시행착오도 겪는 가운데서도 스태프진으로서의 전문성을 축적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예회관 시절이나 아르코극장 시절이나 스태프진이 진지한 자세로 작품들에 임하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인상이었어요. 언젠가 대학로 문예회관을 주제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는데, 국내에서 전문 공연을 하기에는 500~700석의 소담한 중극장 규모도 적절한 것 같고 하우스 관리자들도 친절이 몸에 익은 데에다 무대 스태프진도 현장 무용인들과 호흡을 맞춰간 듯합니다.
신호: 첨언을 드리면 아르코 또는 문예회관이라는 곳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81년도 개관 때부터 가진 책임 정신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열정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지 않았나 해요. 괜찮은 조명이나 무대를 가진 공공 극장이라도 극장 전속 단체가 있으면 전속 단체와는 잘 통할지 몰라도 외부에 대관하는 공연에는 잘 협조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아르코라는 공연장은 스태프 20여 명이 열린 마인드로 있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선배님들이 만들어놓은 틀을 간과할 수 없지요.
강경렬: 극장 초대 관장(설상영)이 진취적인 분이었고 그분이 1대1 트레이닝을 시켰어요. 자기가 다 체크한 거예요. 그분이 이 극장의 문턱을 낮추어 이렇게 만드는 바탕을 깐 것 같습니다.




아르코예술극장 1층에 설치된 아카이빙 테이블 ⓒ김채현




조명 스태프진으로 근무하면서 설비라든지 변화가 있었던가요?
신호: 99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좀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프로시니엄 브리지라는 것을 만들어서 앞에서 비추는 부분을 기계로 업다운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음향 스피커도 트러스 기둥 속에 스피커가 숨겨져 있지만, 공연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스피커를 확산시키고 모니터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개혁도 일어났고, 주무대 뒤 장치 반입구를 주차장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게끔, 그 부분이 무대로도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안전 진단을 받고 시설물을 뜯어내고 바텐도 생기고 또 장치를 반입할 수 있는 공간도 확대되었어요.

음향반사판 때문에 바텐이 줄어들었다고 했는데 바텐은 다시 늘어났습니까?
신호: 그렇죠. 음향 반사판은 1년에 일주일밖에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공자금으로 운영하는 극장이지만, 이 통계치를 근거로 하고 또 문예회관 공간에서 하는 음악회의 퀄리티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고려하여 차라리 음향 반사판 철거를 하자고 했죠.
강경렬: 아까도 말했듯이 입장료 3%를 공제해서 모은 진흥기금을 갖고 운영되던 때라 음악 하는 사람들이 우리도 기금을 내는데 문예회관에서 왜 음악을 못 하게 하느냐면서 피아노도 들어오고 또 각종 의자도 들어온 때가 있었지요.

장치를 설치할 때 쓰는 유압사다리는 언제 들어왔어요?
강경렬: 88년도인가. 타워에 올라가서 일하다가 넘어졌고, 직원이 다리를 다쳤어요. 사고가 난 뒤로 유압사다리를 샀어요.
신호: 85년도 이후 제가 문예회관에 가서 밤새워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A형 사다리였어요. 그래서 출렁거리는 곳 위에 올라가야 했어요. 그리고 무용을 하면 플로어를 깔잖아요. 플로어 위에 유압 사다리를 못 올려요. 현재 전국 공연장 플로어 위에 사다리를 못 올려요. 아르코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르코는 서비스에 대한 부분이나 안전을 많이 생각하고 무용에 나름대로 특화되어 있습니다. 유압사다리는 작습니다. 회전 바퀴가 찰고무로 되어 있어서 댄스플로어를 훼손시켜요. 고소작업대 받침대를 설치하면 회전 반경이 넓어져요. 바퀴도 그만큼 커지지요. 그렇기 때문에 플로어 위를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있어요.

전국에서 유일한 거지요?
강경렬: 유일합니다. 제가 소개한 극장의 문제점 7가지 가운데 또 한 가지 보충하자면 바닥이 안 좋다고 적어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바닥이 딱딱한 목재였습니다. 사람들이 뛰면 뒤통수가 당기거나 정강이라 저렸는데, 옐로우시다라는 걸로 교체했습니다. 캐나다에서 나오는 건데, 제가 직접 가서 골랐습니다. 그 나무는 길면 길수록 비쌉니다. 처음에는 세종문화회관에만 있다가, 그다음에 국립극장이 선택했었죠. 그다음에 1995년 우리 문예회관이 그걸로 교체했었죠. 이 목재는 쿠션이 있습니다. 인체 충격이 훨씬 덜 하죠. 동절기와 하절기에 신축과 이완으로 생길 수 있는 라인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닥을 유압사다리가 들어와도 큰 흔적이 안 생긴다는 거죠.

옐로우시다로 교체하고부터 영구적으로 부착되어 있나요?
강경렬: 블랙으로 칠했죠. 국가 행사를 가지고 외국에 많이 나갔어요. 무용하는데 바닥이 다 까맣습니다. 댄스플로어 없이도 할 수 있어요. 확실히 사람들이 돋보이더군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블랙으로 칠하자고 하니까 욕을 먹었어요. 올 블랙은 아니고 행사할 때도 쓸 수 있게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칠한 거죠.

대극장과 소극장 모두 그렇게 했습니까?
강경렬: 아닙니다. 대극장만 했습니다.

제 개인 경험으론 90년대 중반 때 보면 공연에서 고무판이 우는 현상들이 더러 보였는데, 요즘은 눈에 안 띄더라고요.
강경렬: 그때는 전동 매트였죠. 고무판이 우는 것은 무대 쪽에서도 문제가 있고 또 조명 쪽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전동 매트가 상당히 얇은데 굉장히 당겨야 해요. 30cm 이상 늘어납니다. 조명 쪽에서 라이트를 내려놓아 열이 강하면 부풀어 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바닥이 우는 겁니다.




아르코예술극장 2층에 전시된 사진 자료 중 당시 노조 활동을 나타내는 사진 자료 ⓒ김채현




신호 선생님은 특히 조명 스태프로서의 인생, 결정적인 시기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다듬었다고 할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신호: 2014년 8월에 그만두었는데, 좀 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만두었고 조명가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지만, 아직도 아르코극장을 동경하죠. 아르코예술극장은 최고의 극장입니다. 제가 나오고 또 후배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경험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죠. 저는 또 새로운 도전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아르코에 공연은 상당히 한정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개 행사성의 공연, 페스티벌, 서울연극제, 서울무용제를 하다 보니까 옛날에 그 많은 공연이 스태프진에게 자극과 윤활유 역할을 했던 것과 달리 제가 안주하는 것 같고, 또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조명을 좀 더 하고 싶다면 차라리 도전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었어요.

문예회관 현직에 계시면서 조명 담당 직무로 접촉한 무용가들을 기억나시는 대로 거명해보시지요.
신호: 저 역시 〈춤웹진〉에서 미리 부탁을 받고 무용인들 명단을 미리 정리해왔습니다. 혹시 명단에서 착오가 있으면 양해를 부탁드리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강경모 · 강준하 · 김경영 · 김기인 · 김길려 · 김남식 · 김남용 · 김동규 · 김매자 · 김보라 · 김복희 · 김설리 · 김성한 · 김성훈 · 김수현 · 김숙자 · 김승일 · 김영미 · 김영희 · 김용걸 · 김용철 · 김 원 · 김윤수 · 김은희 · 김장우 · 김정학 · 김지영 · 김태연 · 김향금 · 김현태 · 김혜림 · 김화례 · 남수정 · 남정호 · 류석훈 · 마혜일 · 문영철 · 박명숙 · 박은화 · 박재홍 · 박종현 · 박해준 · 박호빈 · 방희선 · 배정혜 · 백연옥 · 서연수 · 손관중 · 손미정 · 신창호 · 안귀호 · 안병주 · 안성수 · 안애순 · 안영준 · 예효승 · 오은령 · 오은희 · 우현영 · 우혜영 · 유경희 · 유장일 · 육완순 · 윤명화 · 윤미라 · 윤성주 · 윤전일 · 이경옥 · 이경은 · 이고은 · 이미영 · 이상만 · 이숙재 · 이연수 · 이영일 · 이윤경 · 이은주 · 이정연 · 이정희 · 이준모 · 이지희 · 이청자 · 이태상 · 이홍재 · 임혜경 · 장유경 · 장윤나 · 장은정 · 장정윤 · 장현수 · 전건호 · 전미숙 · 전순희 · 전혁진 · 전홍조 · 정명훈 · 정보경 · 정석순 · 정영두 · 정은혜 · 정의숙 · 정혜진 · 제임스 전 · 조성희 · 조원석 · 조윤라 · 조재혁 · 조흥동 · 차진엽 · 채상묵 · 천성우 · 최데레사 · 최두혁 · 최문석 · 최상철 · 최 선 · 최성옥 · 최성이 · 최수진 · 최재선 · 최지연 · 최진욱 · 한상근 · 한정미 · 한 칠 · 허용순 · 홍경화 · 홍승엽 · 황규자 · 황미숙씨 등입니다.

두 분이 그 방면에서 전문성을 계속 축적하며 완성을 향해 나가는 활동들이 후배 후진들에게는 모델이 되었을 거로 생각하고 아르코예술극장이 정말 좋은 시스템,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도 큰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해요.
강경렬: 지금도 저는 무대 작업을 할 적에 신인 자세입니다. 한 번도 틀어지는 게 없습니다. 제자가 많지 않습니다만 좋은 제자도 있어요. 이 제자가 저한테 14년간 있었어요. 독자적으로 활동하는데, 상당히 발전해나가고 있어요. 무용만 특화해서 하고 있습니다. 저의 스타일 그대로 갑니다. 조금 편하게 갈 수 있는 것도 편하게 안 가요. 자랑스러운 제자입니다.

극장이나 공연장이 특성화, 전문화를 이루지 못했던 시대의 시행착오라 볼 수 있겠는데, 그 시행착오를 시행착오라고 인지할 만큼 그간 시대가 많이 변하였습니다. 단적으로 80년대 후반 이후로 국내 공연장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예술의전당이 90년대 초 개관하고 또 연극 같은 경우는 민간극장이 대학로를 중심으로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또 국립국악당이 80년대 말 개관했고 또 전국에서 문예회관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극장 공연장 수가 많아지고 그래서 그 당시 서울 문예회관으로 몰리는, 경합률도 점차 낮아져갔습니다. 2009년에는 대학로예술극장이 개관해서 아르코예술극장과 함께 역할을 나누고 있는 듯합니다. 90년대 중반 무렵까지는 문예회관 대극장 대관 허가를 받으면 로또 당첨된 듯한 기분을 공연인들이 가졌음 직합니다. 이제 아르코 극장의 발전을 위해 스태프진에게 들려줄 조언을 두 분의 경험에 비추어 말씀해주시면 어떨까요?
신호: 지난 몇 해 동안 밖에 있으면서 아르코에 가서 보기도 하고 작업하러 가기도 합니다. 저는 아르코가 시설 면이나 서비스가 좋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다리 하나만 보더라도 악세사리 받침대가 있어서 댄스플로어 위를 다닐 수 있는, 300만 원밖에 안 되는 걸 투자함으로써 작업이 편합니다. 타 공연장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약합니다. 모든 설치 작업을 끝내고 난 다음에 추가로 설치해야 하거나 조명을 수정해야 할 때 사다리가 들어올 수 없으니까 합판 몇 장을 깔아서 그 자리까지 이어가야 하는 등 극장이 업무를 힘들게 합니다. 아르코는 참 좋은 극장입니다. 극장 소속 사람들이 모두 다 디자인하고 창조하고 또 안전관리에 노력하다 보니까 조명시설 자체도 굉장히 그냥 새것 같아요. 조명이나 무대 시스템들에 대해 구성원들의 마인드가 다르다고 봅니다. 대체로 극장 공연장들에서는 물, 불, 밀가루를 정말 못 쓰게 하잖아요.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국내에서 먼지가 안 나는 정제된 모래가 있는데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그런 방법을 찾아서 제안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르코라는 공간의 장점이지 않을까 하지요.

창작진과 협의할 수 있는 체제가 되어 있다는 거죠.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극장이 긍정적인 공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스태프진의 적극적인 태도가 요망된다는 건가요?
신호: 객석에도 먼지가 일고 천장에 있는 기자재에도 먼지가 쌓이면 청소 비용으로 얼마가 드는지 알아보니 몇십만 원이 든답니다. 비용이 들더라도 관객 친화적으로, 공연자 친화적으로 하려면 스태프진들이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겁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아르코에 비해 타 공연장들은 제재가 더 있을 듯합니다. 그래야 그만큼 덜 들여올 거고 그만큼 신경을 덜 쓸 거고 그만큼 사고가 덜할 테니까요. 그래서 법을 만들려는 거죠. 그 법이란 게 문화예술을 지원해주는 법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아르코가 완벽한 것은 아닐 것이고 개선의 여지도 있을 테지만, 관객과 예술인 친화적으로 관점을 다듬어야 할 듯합니다.

작품의 크레딧에 무대감독, 조명디자이너, 음향 감독 등 명단이 길게 나오잖아요. 물론 작품 제작 또는 창작진의 일원이란 뜻이겠죠. 함께 만들어가는 평범함의 상식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단순히 극장의 직원 차원이 아니라 창작진의 일원이라는 의미에서 스태프진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강경렬: 초장기 때보다는 많이 세분화되어서 이제는 이름이 박혀 있죠. 그러나 조금 더 욕심을 내도 좋겠다는 거지요.




신호, 강경렬, 김채현 ⓒ춤웹진




아르코예술극장은 문예회관 시대를 열은 극장이었고 공공 극장으로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역사에서 블랙리스트 같은 사태도 있었고, 긴 역사의 명암을 헤아리는 일도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극장이 춤 현장 작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가졌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극장의 흐름을 짚었습니다. 아르코예술극장의 50주년을 내다보며, 극장이 전문성을 축적해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데 있어 현장 스태프진으로서 기울여온 노력과 책임 의식을 새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긴 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