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기획_ 김진걸 10주기 추모공연 현장스케치 & 춤 연보
“산초춤은 나의 영원한 주제”
김영희_전통춤연구가
 신무용가 김진걸(金振傑, 1926-2008)을 추모하는 ‘故 김진걸 선생 10주기 추모공연’이 김진걸산조춤보존회와 사단법인 월륜춤보전회 주최로 12월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있었다. 햇수로 10년이 되는 2017년을 마감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선생의 춤길에 동행했던 원로 무용가들이 뜻을 모은 공연이었다.


 

 

 먼저 김진걸 선생의 <산조 기본>을 장장 25분에 걸쳐 장정희 외 12명이 춤추었다. 산조에 당신의 모든 춤을 넣었다고 했으니, <산조 기본>은 김진걸의 기본춤이며, 신무용 기본의 한 스타일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잉꼬〉라는 작품의 흑백 영상을 짧게 보여주었다. 잉꼬새 2마리가 부리로 상대에게 애정 표현을 하듯 남녀 두 춤꾼이 잉꼬의 움직임을 표현하며 부부의 애정을 보여주었다.
 〈화접(花蝶)〉은 유정숙(효산무용단 예술감독)과 김충한(전통문화관광재단 예술감독)이 추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꽃과 나비를 주제로 했으며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춤이다. 이 춤을 매개해주는 소품으로 긴 수건을 사용했다. 수건을 서로 감고 풀고 당기면서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수건에 다양하게 의미부여해서 춤추었던 신무용 작품으로 5분 이내의 춤이었다. 〈화접〉과 〈잉꼬〉는 1977년 국립극장에 올려진 정명숙(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후보)의 무용발표회에서 고 김진걸과 정명숙이 듀엣으로 추었던 춤이다.
 김진걸산조춤보존회 회장인 강윤나(고양무용단 예술감독)가 〈취향(醉香)〉을 추었다. 일종의 부채산조로 김진걸의 산조춤을 바탕으로 창작했다고 한다. 다음 작품 〈애상(愛想)〉은 김진걸이 이화숙(전 국립무용단 주역,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보존회 회장)에게 주었던 춤으로, 이 춤을 기억하며 헌무로 추었다고 했다.


 

 

 다음은 김진걸의 산조춤 〈내 마음의 흐름〉을 임미자(미주한국무용가협회 회장)가 추었다. 선생의 오랜 제자로서 나이 많은 제자이지만, 그런 만큼 김진걸 선생의 춤태를 가장 많이 보여주었다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역시 검은 벨벳 치마 저고리를 입고 반듯한 자세로 춤추었다. 근래 들었던 이 춤의 음악과는 다른 음원으로 춤추었다.
 이어 원로 무용가 조흥동의 〈한량무, 정명숙의 〈살풀이춤〉이 추어졌고, 조흥동 안무의 5인 남성군무 〈진쇠춤〉으로 추모공연이 마무리되었다. 김진걸의 제자들과 동료 무용가들이 정성을 모은 무대였다.


 

 

 추운 날씨에도 객석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으며, 고 김진걸과 함께 활동했고 그를 기억하는 원로, 중진 무용가들이 다수 참석했다. 하지만 젊은 무용가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젊은 세대도 관람하도록 유도했다면 신구세대가 함께 이야기할 춤의 장면들이 있었을 텐데, 이 점이 아쉬웠다.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 춤 스타일도 시시각각 변화하지만, 그럴수록 당장 발등에 떨어진 춤에 허덕이지 말고 뒤와 앞의 흐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 춤은 구태(舊態)이지만, 무용가들이 과거에 고민했던 예술적 접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걸은 소년시절 무용을 배운 이래 20세까지 조택원과 장추화의 공연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자신의 행로를 무용으로 정했다. 해방 후에는 대개의 무용가들이 그랬듯 모던댄스, 발레, 남방춤, 고전무용 등을 배웠고, 한국전쟁기에 군예대에서 무용계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무용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1957년 시공관에 처음 올린 신작무용발표회에서 〈환영을 안고서〉 〈짓밟힌 자유〉 〈페르사의 낭만〉 등의 소품과 무용극 〈아들이 떠나는 날〉을, 1959년 무용발표회에서 〈언덕 위의 봄〉 〈초혼〉 〈장단연시(長短連詩)〉 등의 소품과 무용극 〈깨어진 청자기〉를 선보였다. 이후 1962년 국립무용단의 초대 단원이 된 후 지도위원을 역임하기까지 국립무용단의 여러 작품에 출연하거나 안무했다.
 1974년 한성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열성을 다하였고, 1978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사임한 후 자신의 춤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1970년부터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에 맞추어 추었던 산조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89년 4월에 무보집 『내 마음의 흐름』을 출간했던 것이다.



 김진걸은 산조춤을 자신의 영원한 주제라고 말했었다. 1976년 월간 『춤』 3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선생은 “알겠지만 산조는 하나의 음악이다. 나는 그것을 무용화하려 했던 것이다. 나의 사유(四維)와 희노애락을 가능한 모든 나의 춤사위를 동원하여 표현해 본 것이다. 물론 나는 신념을 갖고 만든 것이지만, 꼭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산조를 앞으로도 계속 보충 완성시킬 예정이다. 이것은 나의 영원한 주제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춤의 영원한 주제로서 인생의 노정에서 느꼈던 사유와 감정들을 그 흐름대로 충실히 추고자 했던 것이다. 이즈음 극작가 고 차범석은 단체를 끌고 외국나들이만 다녀오면 유명브랜드가 붙는 무용계에서 장인처럼 자기세계로 몰입하고 침잠해 들어가는 김진걸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었다.
 1992년에 그의 산조춤 〈내 마음의 흐름〉이 한국무용협회에서 명작무로 선정되었고, 1998년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그동안 갈고 다듬은 산조춤의 전편을 공연했다. 김백봉의 〈부채춤〉, 정재만의 〈훈령무〉 등이 찬조 출연했으며, 제자들과 함께 했던 성대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김진걸은 지병으로 별세했다. 김진걸의 청장년 시절에 한국춤계는 신무용이 풍미하고 있었으므로, 다양한 신무용 활동을 했으며, 창작춤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에 최일선에서 물러나 당신의 춤을 정리하셨으니, 송범, 최현 등과 함께 신무용 세대의 춤 유산을 남겨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만 9년이 지나 김진걸을 기리는 공연이 올려진 것이다.



 

김진걸 이력
1926 서울 출생
1942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4 길목(일본인) 무용연구소 입문
1946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
1959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
1951~53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75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56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2 무용용어집발간위원회 위원
1978~85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74~92 한성대 교수
1981~1985 문예회관 운영위원
1989 문예진흥원 운영위원
1992 〈내 마음의 흐름〉 명작무 선정


수상내역
1983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
1987 한국무용협회 제7회 무용대상
1987 화관문화훈장
1988 예술문화 공로상
2009 보관문화훈장 (작고 후)


주요 안무작
〈아들이 떠나는 날〉 〈산조〉 〈깨어진 청자〉
〈무너진 성터〉 〈초혼〉 〈배신〉 〈향토의 선율〉
〈밤바다에서〉 〈내 마음의 흐름〉 등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를 책임편집하고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의 역사성과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검무전(劍舞展)’을 5년째 시리즈로 기획하고 있다.
2018.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