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까두무용단 〈휘어진 43초 속의 여행자〉
상대성이론으로 상상한 인간 관계
김채현_춤비평가

 까두무용단이 지난달에 올린 <휘어진 43초 속의 여행자>는 제목부터 특이하다(9. 2~3.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여기서 43초를 물리적 시간으로 받아들일 경우, 시간이 어떻게 휘어질 수 있겠는지 호기심부터 들 것이다. 그러나 43초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즉 여기서 초가 시간 단위가 아니라면, 제목부터 아리송한 작품이랄 수 있다. 그러면 43초는 무엇이고, 또 그렇게 휘어진 43초 속에 들은 여행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양계에서 지구를 비롯하여 8개의 별이 태양 둘레를 돈다. 그 가운데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수성이고, 사실 이번 공연 제목은 수성과 태양 사이의 관계에서 따왔다. 수성이 태양 둘레에서 그리는 공전(公轉) 궤도를 측정해보면 사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아주 미약하나마 차이가 나는데, 100년마다 근일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43초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공간의 각도 1도(1˚)의 3600분의 1에 해당하는 단위가 1초이다. 수성의 태양 주변 공전 궤도는 타원형이고 또 이 타원형 안에서 태양의 위치는 정중앙으로부터 약간 비껴 있다. 그러므로 수성의 공전 궤도에서 태양과 가장 먼 지점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 있을 것이고, 이 가운데 가장 가까운 지점을 근일점(近日點)이라 한다. 이 근일점의 위치가 100년간 43초 규모의 차이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20세기 이전 뉴턴도 그렇게 차이를 보이는 43초 현상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정작 그런 차이가 왜 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뉴턴 물리학이 풀지 못한 이 난제를 푼 사람은 아인슈타인으로서, 그는 이 43초라는 차이의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성이론을 확신하게 된다.

 상대성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가까이는 우리 주변의, 아주 멀리는 저 광막한 우주 공간은 평평하지도 균일하지도 않다. 뉴턴 물리학은 우주 공간이 균일하다고 믿고 사람들도 대개 그렇게 느끼지만, 상대성이론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런가.
 상대성이론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크든 작든 물체가 갖는 중력은 물체 주변의 공간을 휘게 하며, 그렇게 휘어진 공간 안으로 상대 물체를 빠뜨리는 것이 중력이다. 그러므로, 지구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데에다 지구의 20분지 1 정도로 크기가 작은 수성은 태양 및 다른 행성들의 가중된 중력 영향 때문에 100년을 기준으로 근일점에서 43초의 차이를 보인다. 수성의 공전 궤도가 그만큼 휘어진다는 것이다. <휘어진 43초 속의 여행자>는 중력 때문에 휘어진 43초라는 과학적 현상을 근거로 상대성이론에서 연상되는 가상의 현실 속에서 여행자들을 상상한다.

 비평에서 이처럼 작품 제목부터 장황하게 해설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만큼 작품 <휘어진 43초>의 상상력은 이색적이며 우리들에게 먼저 과학적 상식을 갖추고 관람하기를 요청한다. 결과적으로 관객이 작품을 본 후 상대성이론의 현상을 재인식한다면, 거꾸로 작품이 기도하는 바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필자 역시도 상대성이론을 이번 기회에 재정리하게 되었으니까. <휘어진 43초>가, 소개된 대로, 한국과학창의재단 융합문화지원사업 선정작임을 고려해볼 때 상대성이론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은 것은 시의성이 높을 뿐더러 공감할 만한 일이다.

 뉴턴 물리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과연 빛은 직진하고 공간은 평평하며 시간은 균일한가? 상대성이론은 중력 때문에 빛이 굴절하고 공간은 패이며 시간이 지체하는 경우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상대성이론이 제시하는 그런 빛, 공간, 시간은 <휘어진 43초>의 현실로 상정되고, 작품은 모두 10장으로 전개된다.

 우리의 시공간 개념이 헝클어진 <휘어진 43초>의 세계는 주로 연옥(煉獄) 같은 분위기로 시종한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작품 서두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졌다. 영상 디자이너 최종범의 손을 거쳐 다종다양한 직선으로 디자인되고 굉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빠르고도 현란하게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들은 암흑의 블랙홀을 대신하여 중력과 속도에 의해 사공간이 전도될 것임을 강하게 예고한다.

 사실 시공간이 전도된 세계가 연옥의 세계인지 아니면 천국인지 경험하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모를 일이고, 설령 그런 경험을 한다고 해도 경험의 주체가 인간일지 의심스럽다. 예술은 이러한 논리적이며 상식적인 의문을 넘어 작가 나름으로 마음껏 상상하고 고집스레 제시하는 특권이 있다. 무수히 상상해볼 만한 선택지 가운데 까두무용단이 택한 것은 연옥의 세계였다. 이 연옥의 세계에서 춤꾼 집단은 짙은 푸른색 조명을 받으며 전신을 빠르게 휘저으며 몰입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까두무용단의 장기라 할 질퍽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작들은 순발력 있게 되풀이하면서 객석을 춤으로 흡입하였다. 이어지는 ‘천상의 빛’ 장면에서는 박호빈이 여성의 시신을 넝마로 감싸고 여성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통해 어떤 구원의 조짐을 보여주었고, ‘쌍둥이 패러독스’ 부분에서는 집단들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가는 몸짓을 펼친다. 그런 중에도 연옥의 세계는 간간이 삽입되며, 인간(여행자)들은 재기하지만 쓰러지고 서로가 원만하지 않다. 중력 때문에 휘어졌거나 움푹 패인 시공간 때문에 인간은 제대로 설 수 없는 것 같고, 그래도 서로 관계를 맺으려고 분투하지만 연옥이라 그런지 제대로 관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시사된다.

 그렇게 암울한 와중에서도, 김윤아가 단독 출연한 ‘수성’ 부분에서 김윤아는 수성의 궤도가 그려진 한복판에서 하얀 드레스 차림에 선 자세로 고혹적인 연기를 펼쳤다. 이 부분에 연이어지는 ‘시간의 화살’ 부분에서 김윤아를 향해 켄타우로스(반은 사람, 반은 말의 형상을 지닌 그리스 신화 속의 족속)가 실제 화살을 날리지만, 그때는 이미 김윤아가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김윤아를 수성의 상징체로 볼 경우 수성과 켄타우로스의 관계가 불투명하지만, 반면에 여기서 화살을 시간과 광선의 화살로 볼 경우 수성과 화살의 관계는 좀 분명해진다. 상대성이론에서 광선은 중력에 의해 전송 경로가 휘어져서 직선으로 날지 못하기 때문에 켄타우로스가 날린 화살도 이미 김윤아가 사라진 상태에서 지옥의 문에 내리 꽂혔을 뿐이다. 관객이 이 부분을 해석하자면 얼마간 예비 상식이 필요할 것 같고 전달되는 느낌 역시 저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수성’ 부분은 마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김윤아를 통해 그 자체로는 꽤 환상적인 질감을 바탕으로 상대성이론을 묘사하려고 애쓴 흔적이 돋보였다.

 박호빈 안무의 <휘어진 43초 속의 여행자>는 굳이 분류하자면 내러티브를 따르는 현대춤이다. 막연하게 이해되는 과학 이론을 내러티브 소재로 접근한 것은 춤에서 내러티브 짜기에 능한 박호빈다운 작업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전체 10개의 장에 제시된 다수의 에피소드들을 손질하면서 여행자들의 관계를 인간들의 관계로서 보다 선명하게 제시하고 혹은 더 나아가 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우리들의 환상적 기대감을 충족시킬 장치는 더 보완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시공간의 상식적 인과율을 거스르는 상대성이론의 현상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상상할 계기를 찾고 차제에 과학과 춤의 융합을 모색하는 작업은 분명 신선하다. (전재: 한팩 리뷰: 2010. 10.)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