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춤 관찰기: 다시 생각하는 아시아 춤 인프라(3)
3. 타이완 현대춤의 어머니, 채서월 그리고 타이완의 어두운 현대사
서정록_춤연구가

채서월(차이 루이유에 蔡瑞月)은 타이완의 현대무용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며 현대무용의 전파에 힘쓴 예술가이다. 그 생애는 한국의 현대 무용 선구자 중 하나인 최승희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그 생애를 우선 간단히 살펴보면, 1921년 타이난 시에서 출생한 그녀는,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현대 무용의 아버지인 이시이 바쿠 밑에서 무용의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실명의 위기에 있던 이시이 바쿠보다는 그의 수제자인 이시이 미도리(石井綠, 본명은 이가라시 하나코 五十嵐花子)에게서 가르침을 더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이시이 미도리 무용연구소(石井綠舞踊硏究所)의 단원으로 일본에서 활약하였고, 태평양전쟁 때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1000회 이상 일본 군대를 위한 위문공연을 하였다.

 



 종전 후 일본에서 귀국한 그녀는 현대 무용의 개념을 타이완에 도입한다. 귀국 당시 창작한 작품으로는 〈인도의 노래(印度之歌)〉, 〈우리는 타이완을 사랑해요(咱愛咱臺灣)〉 등이 있으며, 이후 500여편의 현대무용을 창작하였다. 또한 발레, 민족무용, 타이완 민속무용 등 여러 무용을 결합하여 타이완의 독특한 현대무용 형식을 발전시키며, 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타이완 현대 무용의 어머니(台灣現代舞蹈之母)’로 현재까지도 추앙받고 있다. 대표적 제자들로는 ‘타이완 현대 무용의 아버지’ 불리는 유호언(游好彦, 영어명Henry Yu), 채서월 기금회 이사장(蔡瑞月基金會董事長)인 소악정(蕭渥廷) 등이 있다.
 이렇듯 그의 약력만을 보면, 그가 타이완 현대 춤을 시작하고 보급하여, 타이완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를 타이완의 근현대사와 함께 살펴보면, 타이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생애는 한국의 최승희의 삶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타이완의 근 현대 역사, 더 나아가 타이완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일본이 세계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녀는 타이완으로 귀국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중국에서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피난하여 온다. 국민당과 중국(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일부’인 타이완에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피난 온 것이다. 여기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른다. 한편 타이완에는 ‘본성인(本省人)’이라 불리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중국 푸젠 성 등지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漢族(한족)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본래부터 거주하였던 타이완의 원주민들과도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들 본성인들은 본래 자신의 근거를 ‘중국(대륙)’이 아닌 ‘타이완(섬)’에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외성인들과 정체성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 사이에는 역사 인식과 정체성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본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성인들은 일본제국 대신 등장한 새로운 외세가 타이완을 점령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타이완의 역사는 곧 식민지의 역사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본성인들은 타이완은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외부 세력에 의해 통치를 받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이완은 근세 이후에야 세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물론 이 섬에는 그 이전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 정확한 역사를 알기 어렵고, 400여년전 현재 타이완인의 주류인 본성인들이 중국에서 이주하면서 타이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기에 당시 타이완 지역을 항해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포르모사(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라 이름 붙이면서, 세계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타이완 사람들 중에는 타이완을 종종 이 포르투갈 명칭을 한자(漢字)로 표현하여 ‘미려도(美麗島)’라 부르기도 한다.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세계에 알려진 타이완은 곧 네덜란드(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지역, 즉 타이완 남부)와 스페인(지룽, 단수이 지역, 즉 타이완 북부)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북부의 스페인 세력을 몰아낸 네덜란드는 다시 중국 명나라의 몰락과 함께 피난한 세력의 우두머리인 정성공(鄭成功, 1624 ~1662)에 의해 타이완에서 물러난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성공은 출생지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본래 해적이었다가, 명나라의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정씨 왕국(정식 명칭은 동녕국 東寧國)을 타이완에 건국하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가 침입하여 20여년 남짓의 정씨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되고, 청나라가 타이완 섬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또 다시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승리한 일본이 타이완을 할양 받아 이번에는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본성인들 중 상당수는 타이완 역사는 외부세력에 의한 식민지 역사라는 인식이 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 세력도 일본이나,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점령 세력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본성인들의 상당수는 타이완은 중국이 아니고 중국에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면에 외성인들은 이들 본성인들 중 상당수가 일제에 동조하여 친일행위를 한 매국노이거나, 혹 일제에 대항한 경우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 통치할 때,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게, 일본제국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시장(show Case)’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정책 속에서 상당수의 타이완 사람들(즉 본성인)이 타이완은 물론 당시 일본의 꼭두각시(괴뢰국 傀儡國) 나라였던 만주국(滿洲國)의 관리로 대거 진출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외성인 입장에서, 이들을 일제에 동조하는 친일세력으로 보는 것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들 외성인들은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이며, 언젠가는 공산화된 중국을 수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렇게 ‘타이완’에 대한 커다란 시각의 차가 존재하는 가운데,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륙에서 이주한 외성인들은 기존 타이완 사회의 주류였던 본성인을 차별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근대화된 교육을 받은 본성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전근대적이었던 국민당 정부의 만연한 부패와 노골적인 차별에 분개하기 시작하였고, 곧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은 타이완 사회 곳곳에서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1947년 2·28 사건이라는 타이완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로 나타난다. 이 사건으로 본성인 중 약 3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1949년 타이완 전역에 발포되고 38년간 유지된 계엄령 속에 타이완에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가 1995년 당시 국민당 소속이지만 본성인 출신으로 구속된 경험도 있었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최초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으며,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본성인들의 외성인들에 대한 저항은 결국 국민당 정부의 독재에 맞서 항거한 민주화 운동과도 연결이 된다는 점에서 타이완의 현대사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 당시 대만대학교 교수였던 채서월의 남편인 레이시유(뢰석유 雷石榆)도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추방되었고, 그 후 그들은 40여 년 넘게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채서월 본인도 뤼다오(綠島)에 있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이 교도소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의 서대문형무소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국민당 정권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뤼다오 형무소는 국민당 정권 아래에서의 정치범수용소로 다시 악명을 떨친다. 이 형무소에는 지금도 곳곳에 ‘멸공복국(滅共復國 공산당을 박멸하고 나라를 수복하자)’라거나 ‘아애국기 아애국가(我愛國旗 我愛國家 나는 국기를 사랑하며 국가를 사랑한다) 등 과거 한국에도 흔했던 것과 유사한 정치 구호들이 새겨져 있다. 결국 국민당 독재가 막을 내리고, 악명 높던 정치범수용소는 현재는 ‘뤼다오 인권문화원'으로 바뀌어, 지난 국민당 독재 시절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전시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형무소의 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채서월은 이후 타이완에서 ‘예술과 인권(藝術與人權)’의 대명사가 된다.

 

 

 출옥 후 1952년에 그는 타이페이에서 ‘중화무도연구사(中華舞蹈硏究社)’를 창립하고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가 창작한 무용은 대부분 타이완의 정체성을 강조한 민족무용(민족무도 民族舞蹈)이었다. 특히 본성인들과 타이완 원주민의 춤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 그의 작품에서 점차 발레와 현대무용의 비중이 커졌다. 특히 도리스 험프리(Doris Humphrey)의 제자 엘리너 킹(Eleanor King)이나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엘리자베스 카메론 달만(Elizabeth Cameron Dalman)과 같은 많은 미국과 호주의 현대무용가들을 초청하고 교류하며 서구의 현대무용을 타이완 무용계에 알렸다. 이와 함께 1970년대 채서월은 민족 무용과 서양적인 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융합시키며, ‘민족적인 현대무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춤들을 탄생시켰다.
 이러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독재 정부와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의 출옥 이후, 정부에서는 그의 공연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방해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은 1981년의 일명 ‘만하(晩霞) 사건’이었다. 이것은 당시 타이완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그의 작품인 ‘만하’가 정치적인 작품이라는 혐의를 씌워,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연 허가를 취소시킨 사건이다. 수십 년 동안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그는 결국 1983년에 타이완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게 된다. 본성인들이 중심이된 정당인 민진당(民進黨)이 정권을 잡은 2000년에 79세의 고령으로 타이완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옛 작품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였고, 2005년, 84세의 일기(一期)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좌우의 대립, 독재에 대한 항거와 친일청산 문제, 전통과 근대의 갈등, 중국에서의 독립과 중국과의 통일 문제 등등 어찌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와 비슷한 키워드들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리고 채서월의 춤과 그의 삶은 이러한 ‘타이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타이완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중화무도연구사(또는 채서월 무용 연구소)는 현재 타이완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건물은 본래 일제 점령기에는 일본 식민지 관리들의 기숙사였다. 1925년 전후에 수 십 동을 연결하여 만든 목조 기숙사가 중산북로(中山北路)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는데, 대부분은 목조로 지은 일본 주택 양식을 따른 것이었다. 채서월 무용연구소의 건물도 이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그 구조를 보면 일본 판임관(判任官)의 숙소로 쓰였다. 1953년에는 타이완 현대무용의 어머니인 채서월의 집이자 무용창작 및 창작무용 연습교실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후에 무용교실로 바뀌었다. 비록 화재를 겪었으나, 1999년 민진당 출신의 타이페이 시장이었던 천수이볜(陳水扁, 2000년에 민진당 최초로 타이완 총통으로 선출됨)의 노력으로, 이곳은 타이완 현재무용이 뿌리내린 곳으로 인정받고 재건되어,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고적(古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다양한 춤 공연은 물론 무용 교실이 운영되며, 무엇보다도 현대 타이완 춤의 요람이자 타이완 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대한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2018.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