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춤 관찰기: 다시 생각하는 아시아 춤 인프라(5)
2. 태국 궁중무용 콘을 통해 살펴본 태국의 춤 인프라
서정록_춤연구가

지난 호에서는 태국 왕실의 가면춤인 콘(Khon)에 대한 내용과 이를 둘러싼 태국 사회와 춤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태국의 왕실 공연 예술 중 한국의 궁중 정재와 직접 비교할 만한 라콘 나이(Lakhon Nai)라는 태국 궁중춤에 대해 살펴보고, 콘과 라콘 나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태국의 춤 인프라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태국에서 춤이 태국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태국 궁중 춤, 라콘 나이

궁중 음악인 피팟(Pi Phat)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라콘 나이는 서사 무용이다. ‘라콘 나이(Lakhon Nai)’는 ‘드라마’를 뜻하는 ‘라콘’과 ‘…안에’, ‘…내’를 뜻하는 ‘나이’의 합성어이다. 본래 라콘 나이는 라콘 낭 나이(lakhon nang nai) 즉 ‘궁중 여인들의 공연’을 뜻하는 말의 줄임말로,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라콘 나이는 여성 무용수들만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상반되게 남성 무용수로만 구성된 것들도 존재한다. 이 경우는 라콘 나이 푸차이(lakhon nai phu chai)라고 한다. 여기서 ‘낭’과 ‘푸차이’는 태국어로 각각 ‘부인’과 ‘남성’을 뜻하며, 라콘 나이 푸차이는 조선 궁중 정재의 ‘무동(舞童)’과 유사한 의미이다.

 



 라콘 나이의 특징 중 하나는, 무용수들은 줄거리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느린 템포의 춤동작에 우선 집중한다는 점이다. 줄거리는 무용수의 동작과 함께하는 성악곡의 가사로 대부분 전달이 되며, 가면을 쓰고 하는 콘과는 달리 무용수들은 가면을 착용하지 않는다. 이들 작품들은 전체를 공연하면 일반적으로 4시간 가량 걸는데, 최근 들어서 도입부(Boek Rong)에 해당하는 부분은 빼고,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선보이는 2시간 정도의 공연이 보편적이다.
 라콘 나이는 타이족이 세운 두 번째 왕국인 아유타야(1351~1767)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별 작품들은 라마키안(Ramakien), 운나룻(Unnarut), 이나오(Inao), 다랑(Dalang) 등 모두 4가지 이다. 이들 중 라마키안는 콘과 같이 라마야난(Ramayana)를 배경으로 하는 춤이며, 운나룻는 인도의 신 중 하나인 비슈누(Vishnu)의 손자인 아루릇다(Aniruddha)의 이야기를 무용극으로 꾸민 것으로 둘 다 본래 인도의 서사시에서 유래한 작품들이다. 한편 이나오와 다랑은 인도네시아에서 유래한 작품으로, 고대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설화인 판지(Panji) 왕자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이나오와 다랑은 그 작품의 규모에서 차이가 있는데, 다랑이 이나오보다 규모가 크다. 결국 라콘 나이의 배경 이야기들은 모두 본래 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캄보디아에는 크메르어(캄보디아어)로 “라콘”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궁중춤이 존재한다. 제임스 브란돈(James R. Brandon)은 이에 대해 이들이 콘과 마찬가지로 크메르 제국(오늘날 캄보디아)을 통해 태국에 15세기 경 전래된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에 태국의 학자인 산티 팍디캄(Santi Pakdeekham)은 캄보디아 궁중춤이 19세기 태국의 궁중춤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사실을 강조한다.

 




태국 국립극장과 태국 문화 센터
 

태국의 춤 인프라는 대부분 왕실의 관심과 지원 그리고 왕실 춤과 직간접적인 관계 가운데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국 공연 문화의 상징인 태국 국립극장과 태국 문화 센터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태국에 본격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궁중에 있던 콘과 라콘 나이는 1932년부터 그 장소를 옮기어, 국립 박물관 안에 컨퍼런스 홀에 상주하게 된다. 그러다가, 좀 더 체계적인 보존과 전승을 위한 전문적인 장소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게 되면서, 국립극장 건립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에 왕실의 명령에 의해, 태국 예술부(Fine Arts Department)의 주도가 되어 예산을 마련하였고, 드디어 1965년 완공을 보게 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극장에서는 궁중 춤 외에도 다양한 태국의 전통 춤과 태국의 전통음악들이 무대에 올려지곤 하지만, 현재까지도 콘과 라콘 나이가 여전히 주된 공연 레퍼토리이다. 콘과 라콘 나이는 매월 첫 번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이 극장은 태국 전통 공연 문화에 상징과도 같은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또 한편 관광 대국인 태국에서 본 극장은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자, 세계 여러 나라의 중요 무형 문화재들이 자주 초청되어 공연되기도 하여, 태국과 세계와의 문화 교류의 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방콕의 중심부인 프라 나콘(Phra Nakhon) 켓(khet, 한국의 구)에 위치하고 있는 태국 국립극장은 폭 14.50m, 높이 11.50m, 그리고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2.00m 의 무대로, 2층 좌석수는 52석, 1층 좌석 수 893석 규모이다. 수준 높은 공연에 비해 입장료는 상당히 저렴하여 200바트(한국돈 6700원 정도)이다. 이는 보통 방콕의 상업 극장들의 입장료가 1000바트에서 1500바트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런 사실에서도 국립극장에 대한 태국 왕실과 정부의 관심과 후원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즉 태국 국립 극장은,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국 문화의 영광(Glory of Thai Culture)”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립극장과 유사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장소로 꼽히는 곳으로 태국 문화 센터가 있다. 방콕 후웨이꽝(Huai Khwang) 켓에 위치하고 있는 문화센터는, 지난 호에도 소개한 바 있는 마하 차끄리 시린톤 공주의 주도로, 얼마 전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1927 ~ 2016)의 60주년 생일을 기념하여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1987년 건립되었다. 이곳은 2000석 규모의 대극장과 500석 규모의 실내 극장 그리고 1000석 규모의 야외극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도 사회 교육관, 문화 예술 관련 도서관과 태국 문화를 보여주는 상설 전시관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왕실 춤인 콘과 라콘 나이는 물론 태국의 민속춤과 현대 무용, 발레, 태국 전통 음악, 서양 클래식 음악 연주 등 다양한 공연들이 무대에 오른다.




창 극장(Chang Theatre)

민간의 태국 춤 인프라 역시 태국 전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태국 왕실 춤과 관계가 깊다. 예를 들어, 현재 태국 현대 춤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피쳇 클런천(Pichet Klunchun)이 세운 창 극장(Chang Theatre, ‘창’은 태국어로 ‘코끼리’를 뜻함)이 바로 그것이다. 방콕 사우스 톤부리에 위치하고 있는 창 극장은 현대무용을 위한 전용 극장이다. 80석에서 100석 정도 되는 아주 소박한 규모의 이 극장은 현재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무용 공연들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이 극장의 성격은 한마디로 ‘태국 전통의 현대화 그리고 세계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는 설립자인 피쳇 클런천의 작품 세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태국이 자랑하는 현대 무용가인 피쳇 클런천은 16세부터 국보급 무용가인 차이욧 쿰마니(Chaiyot Khummanee)에게서 태국 궁중 가면춤인 콘을 전수받았다. 이후 출라롱콘 대학교에서 태국 전통춤을 전공하고, 태국에서 자신의 무용단인 피쳇 클런천 무용단 창단하고 이를 통해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세계 여러나라의 무용가들과 활발한 공동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태국 고유’의 미적 가치들을 현대화하는 작업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태도는, 제롬 벨(Jérôme Bel)과 공동작업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Pichet Klunchun and Myself〉(본래 제목은 Made in Thailand 였음)가 한국 공연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종종 지나치게 오리엔탈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한국에서는 제롬 벨에 대한 비판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쳇 클런천의 태국 전통 예술에 대한 강조가 이러한 논란에 크게 일조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국 전통 예술의 상징인 궁중춤은 태국 사회에서 태국 민족주의(종종 국수주의)의 결집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그러면서, 이러한 양식들은 서구 사회에 오리엔탈리즘을 강조하는 ‘이국적이면서도 관능적인(exotic)’ 것으로 자주 인식된다.

 



 주지하듯이, 이러한 국수주의와 이국적 관능미의 관계는 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 ~ 1970)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피쳇 클런천의 최근 작품인 〈I am a Demon〉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콘에 대표적인 등장 인물 중 하나인 톡사칸(Thotsakan: 콘에서 악마들의 왕 역)의 춤을 현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현재 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태국의 춤 인프라는 태국 문화의 정수라 인식되는 태국 왕실 춤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태국의 (전통)춤이 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다. 전통춤과 민족주의의 관계는 아시아에서 그 뿌리가 깊고, 그 양상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점에서 태국의 춤과 그 인프라는 이러한 아시아의 춤과 민족주의의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대한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2018.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