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무회 35주년 정기공연 〈몸, 기도하다〉
세기말 그리고 춤
이지현_춤비평가

 원고를 쓰기 위해 일어난 새벽 어제 發 빅뉴스의 제목은 ‘한국 부도위험’이다. 요지는 달러환율은 오르고 주식시장은 무너지는 양상이 리먼사태때 보다 심각하며, 한국의 국가부도가능성 지표는 어느 때 보다 높단다. 당연히 투자자들의 공포심리도 3년 이래 최고치이며 이 경제위기의 영향력과 지속은 과거 어느 때 보다 크고 길 전망이라는 얘기다. 물론 지금은 ‘세기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기초’다. 이 글의 제목은 틀렸으나, 현재의 시점을 가르키는 단어라기 보다는 현재의 징후를 가르키는 가장 적절한 뉘앙스로 선택되었다. 요즘 일련의 사태가 주는 불안과 공포가 심각하긴 한 듯하다. 저절로 이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경제의 문외한인 나 조차도 세계 경제라는 허상과 그 허상이 만들어낸 수 많은 불합리한 부의 편중과 시스템적 오류의 문제를 피부로 느낀다. 넓게는 ‘문화’라는 것으로 묶어 낼 수 있는 경제와 정치, 종교와 교육 등의 체계들이 내 삶이 접해있는 환경이기에 내가 몸으로 느끼는 우리의 문화적 수준 속에 그것들의 실태를 체감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이 사태를 지금까지의 문제와 모순에 의한 자체 정화 내지 자체 해결의 솔루션으로 본다면 위기를 기회삼아 인류가 새롭게 고쳐 그려야 할 그림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사실 이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수많은 0과 1로만 존재하는 경제와 테크놀로지의 매트릭스 속에서 자연재해를 포함한 파국적 위기에서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다.
 얼마 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후, 어떤 색다른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 선생님 한분을 사적인 자리에서 다시 뵐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마른 체형으로 꼿꼿함과 깔끔한 인상이었고, 말은 간결하고 또박또박함이 칼날의 날카로움과 속도를 느끼게 했다. 연약함과 강함이, 여유와 긴장이, 날 섬과 후퇴가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의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 분을 만난 경험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충격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선 내가 문제를 대하고 풀어가는 몸에 밴 ‘편의성’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속도를 핑계삼아 빠른 해법과 방안을 내어 놓는 것이 무슨 벼슬인양 쓸데없는 속도전을 펼치느라 나는 나 스스로에게 속고 있었다. 끊임없는 문제의 연속이라는 인생의 게임에서 문제가 아닌 해결에 비중을 두고 문제로부터는 피하고 있었다. 문제와 해결의 분리...
 춤이 왜 대중과 친하지 않은가를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전광석화처럼 스친 생각이 있었다. 11살때부터 춤에 담가버린 인생이 습관처럼 춤을 대하거나 춤학문을 한다는 다분히 분파된 사고가 놓치고 지나간 부분이었다. 생활하면서 답이 찾아지지 않을 때 주로 생각을 적거나, 책을 펴거나, 영화를 보는 나는 그 속에서 삶의 전선에서 얻어진 지혜와 경험, 혹은 진지한 장면을 마주 한다. 그런데 춤에서는 그런 지혜와 경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춤 안에 답이 없다. 그래서 춤 공연을 보고나면 공허하다. 관객들은 그 공허함을 춤은 그런건가 보다 하고 대충 덮고 지나가거나(지혜롭다!), 나는 그 안개같은 공허를 질문으로 바꿔 밥 먹듯이 싸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춤에 삶이 없다”이다. 춤이 삶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며, 춤추는 자기자신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창무회 35주년 정기공연 <몸, 기도하다>
 2011. 9. 8 - 9.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1976년에 창단한 창무회의 35주년 기념공연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말하자면, 창무회는 80년대 춤 르네상스의 기수였고, 대학동문 무용단의 선두주자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창작춤을 잉태하고 키워낸 위치를 한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무용단이다. 자유소극장에서 조촐하게 치러진 기념공연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는 소박한 것이었으나, 어쩌면 그래서 관록과 안정, 진지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스스로를 포장하는 데 힘을 쓸 필요가 없어진 역사적 무게랄까..

 김선미 <월령2011-2Empty 2Sun>, 최지연 <내딸을 백원에 팝니다-이것은 시가 아니라 통곡이다>, 김지영 <박신>의 3작품이 올려진 무대는 창무회가 키워 낸 차세대의 안무가들의 각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창무회의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춤의 예술적 방향성을 가르킨다는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지 세 작품은 뚜렷하게 ‘차이’를 담고 있었고 그 차이는 과거를 담아내고 미래로 확산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였다.
 김선미는 창무회의 가장 굵은 선인 ‘절제된 제의성’을 현대화하는 맥락을 보여준다. 창무회의 1세대로써 ‘전통을 현대화’하겠다는 예술적 중심을 꾸준히 모색해 온 결과이다. 그러나 물론 그 선언은 김선미 고유의 색채로 실현되고 있다. ‘천불탑 월령’ 시리즈로 작품을 해오고 있는 안무가는 하늘과 땅, 해와 달, 비움과 채움 속에서 춤을 춘다. <춤본>(1986/김매자 안무) 이후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우주적 주제로 승화된 제의성이 김선미의 춤 안에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난다. 과거의 천지를 바라보는 주제가 그 운행원리를 구상화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면 그 원리는 그간의 <춤본> 시리즈 작업에 의해 동작 원리로 내재되었고, 김선미의 춤에서 소우주 인체의 원리적 춤동작이 인간의 숨결로 다시 숨을 토하는 경로를 보여준다. 물론 개인 안무가의 소극장 공연이어서 그간의 군무의 구도를 느낄 수 없었기에 보여지는 모습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김선미의 춤안에 자리잡은 ‘절제된 제의성’은 춤동작의 엄격함과 단단함, 안정감과 더불어 그것을 뚫고 나오는 인간적인 소박함과 섞여 현재의 춤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최지연은 1세대처럼 창무회의 초기적 기운을 받고 있지는 않으나 그 초기적 강렬함이 다음 세대로 타고 넘어갈 수 있도록 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왔다. 어쩌면 건조해지기 쉬운 ‘추상화 된 제의성’은 최지연의 춤을 통해 한국적 제의의 맛이 어떻게 예술춤으로 모색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을 얻었다. 현장적 제의가 갖고 있는 거칠음을 최지연은 그 안에서 이른바 ‘한’의 정서를 추려내어 ‘시나위’적인 무정형의 틀 안에 풀어 놓는다. 서구의 춤들과는 다른 무대춤 구성과 언어에 대한 추구가 몇 년 전부터 상당히 뚜렷하게 주제로 설정되었고, 현실적 부조리에서의 막막함과 슬픔을 여과없이 뿜어내는 ‘발산적 정서와 호흡’의 순도를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새로운 창작춤 문법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드러났듯이 강렬한 한의 정서가 관조와 절제를 내포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신파로 갈 수 있는 위험을 드러내었다. 무대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과 감정에 대한 긴장을 잠시 늦추면 발생할 수 있는 과잉으로 감정이라는 것과 표현이라는 것의 예민한 줄타기가 필요한 지점이다.
 김지영은 춤에 대해 문학적인 접근을 한다. 창무회의 현대적 발걸음의 자유를 문학적 사유에 근거한 자신의 감각으로 탐색한다. 그러나 아직은 춤과 문학적 접근 사이에서 갈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끊임없이 묻고 질문 하듯 자신에 대해, 이 삶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나, 춤으로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때론 김지영의 춤은 무게있는 정서를 유지하나 그 정서를 자신의 이야기로 전개해 나가지 못하고 춤의 언어에 휘말려 버린다. 모든 게 그렇게 실종되어 버린다. 하지만 넉넉한 춤만큼 깊은 곳에 바다가 있는 듯하다. 그 바다가 너무 검고 깊어 모든 걸 마셔 버리지만 만약 그 바다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면 그것 자체로 장관이 되리라는 걸 예측할 수 있다. 더 깊이 침잠하고 더 깊은 울림을 들을 때이다.
 창무회의 미래를 만들어 갈 3명의 안무가들의 각각 다른 지점들은 긍정적이다. 일률적이지 않아 그렇고 자기에 근거한 단단함이 그렇다. 하나에서 셋으로 그것도 잘 키운 3명으로 가족을 불렸다는 건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현재와 호흡하려는 긴장감과 자신에 대해 진솔하게 사유하는 집요함을 지금처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 나는 지금같은 화려함에서는 어느 정도 빗겨난 분위기가 그들을 무르익게 하기에는 더 좋은 조후(條候)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을 채워나갈 새로운 세대가 준비되어야 할 때이다.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