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특집] 이순열을 말한다(7)
춤을 바라보는 ‘경계 없는’ 시선
김태원_「공연과 리뷰」편집인 / 춤비평가

 이순열 선생님을 뵙기 시작한 것이 1987년 즈음인 것 같다. 당시는 1982년에 첫 조직된 ‘무용펜클럽’이 이름을 바꿔 ‘한국무용평론가회’로 개칭되면서 채희완 회장·김채현 간사를 축으로 춤평론가 모임이 정례화, 또 재조직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그때 동료 이종호ㆍ김채현과 함께 신입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 선생님은『음악동아』에 편집장으로 몸담고 있어서 사실 1년에 한두 번 볼 수 있는 정도였다. 1988년인가,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음악동아』에서 그곳 예술비평란의 편집을 맡고 있는 작고한 김광협 시인이 내게 매회당 원고지 50매 분량으로 총6회 정도로 한국무용계와 춤예술의 문제점을 에세이 형식으로 게재해달라고 해서『음악동아』를 두세 번 들리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님을 잠깐씩 뵐 수 있었다.
 그 이후 선생님과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하게 된 때는 1992년 ‘춤의 해’때였던 것 같다. 그 당시‘춤의 해’의 행사 진행을 둘러싸고 한국무용협회/비협회권(圈)의 대립이 심했을 때, 춤평론가회 회원 전원은 비협회권에 속해서 이순열·김현자 선생을 중심으로 협회권과 ‘춤의 해’의 행사를 조율하고 진행시키기 위한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다. 이때 나는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비교적 자주 만났던 것 같다.
 그때 선생은 그 행사의 공동위원장을 맡아 그 두 계열은 물론 범 춤계의 단결과 화해를 도모하자는 뜻에서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어 ‘춤의 해’ 캐치프레이즈를 매우 시적(詩的)으로 정했다. ‘온누리를 춤의 꽃밭으로’가 그것이었다.
 그 이후 ‘춤의 해’를 치른 비협회권이었던 이들과 우리춤의 학술적·국제 교류의 수준 향상을 위해 1993년 한국미래춤학회를 결성하면서(송수남 최청자 하정애 김현자 국수호 김정수 김채현 김경애 그리고 나 등 참가) 선생님과의 만남이 더 이어지게 되었다.
 한 사람의 춤평론가로 이순열 선생의 존재성에 대해 당시 원로 춤평론가요, <춤>지 발행인이기도 했던 조동화 선생은 1980년도까지 한국무용평론계를 개관한 한 글에서, 특히 1970년대 후반 들어 “시인 김영태가 현대무용의 비평적 기록에 크게 이바지했다면, 이순열의 등장으로 춤의 현장과 평론 사이에‘새로운 긴장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짧게 언급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당시의 선생님의 평론과 대담(좌담)이 적지 않게 실린 『춤』지 등을 살펴보면, 선생의 발언과 평문은 기존 질서에 상당히‘파괴적’이라 할까,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들의 예술적 전문성에 대한 반성 없이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나름대로 견고한 아성(牙城)을 쌓고 있었던 무용계에 대해 가차 없는 ‘비평적 힐난(詰難)’이 퍼부어짐을 여러 지면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내가 생각키로 선생의 두 가지 춤 비평적 지론은 먼저 춤이란 사심(私心) 없는 영혼의 예술활동이란 것(따라서 거기에 어떤 경계와 아성이 있을 수 없다), 더불어 반드시 어떤 특정한(서구를 포함) 춤의 어떤 흐름이나 스타일이 절대적이 아닐 수 있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선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전자의 관점에서 선생은 당시 한국무용계의 불건강한 징후들 - 이른바 특정의 학맥이나 예술 인맥, 그리고 사제관계에 얽매인 특정 개인의 우상화 - 에 대해 사심 없이 질타했고, 이어 후자의 관점에서는 무엇인가 서구 추종적이 아닌, 한국적인 새로운 춤 예술의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상대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이 맥락에서 특히 후자와 관련, 선생은 배정혜 안무의 <타고 남은 재>(1977)라든지 그 당시 우리 민속무나 전통무용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한국무용의 현대화 작업에 대해 비평적 시각에 있어서 매우 긍정적이었고, 더불어 불완전하지만 당시 일부 대학권 발레라든지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이 시도하기 시작한 한국적 발레에 대해서도 퍽 관심을 가지고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물론 기술적으로는 많이 모자랐지만).
 그런 중에 특히 선생이 1970년대 후반 오늘날 ‘한국창작무용’으로 지칭되고 있는 한국무용의 현대화에 대해 시기적으로 매우 앞서 지지를 표했던 것(채희완 교수의 이론적 지지는 1980년도 이후다)은, 이후 그 흐름의 춤이 우리 예술춤의 한 흐름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나는 본다.
 그 같은 선생의 열린 시각은 1980년도 중반 들어 거의 고착화되었던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의 3분법화된 춤전공의 인위적 분화(分化)에 대해서도 자주 비판을 하게끔 했다. 곧 ‘춤’이란 그 속에 모든 것이 함께 있는 것이고, 형식과 스타일이 다르더라도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 교류하는 것이지, 어떤 인공적인 칸막이(제도)에 의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폭넓은 관점을 선생은 일찍부터 드러내었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1년에 한두 번 있는 춤평론가회의 제주도 등 지방 세미나에서 보게 되는 선생의 모습이란 진흙탕 속에서 아웅다웅하며 싸우는 무용계의 모든 지상적(地上的) 모습에서 떠난, 질퍽한 늪이나 수렁 위로 부는 ‘막힘없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의 모습과 같았다. 그 늪과 수렁 속에 빠져 싸우고 있는 무용가들이나 후배 평론가들이 보기에 종종 선생의 낭만성이 섞인 초연함은 마치 다른 세계를 살다온 립 반 윙클이나, 미국의 초자연주의자들인 에머슨이나 소로우 같아도 보였지만, 사실‘춤예술’의 참다운 모습은 더러운 늪이나 수렁 속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선생의 그 같은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만큼 신선했다 보겠다.
 근자 자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등을 인용, 스스로의 예술적 안목이나 자신의 미적 기준을 그 속의 시구(詩句)에 즐겨 환치시키고 있는 선생의 태도는 춤이란 거듭 인위적 경계를 넘는 순수 영혼과 미적 이념의 산물임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싶다. 선생의 한 뛰어난 에세이인 건축과 발레 예술의 상관성에 대한 글(1995년도『무용저널』10호에 실린「건축과 무용의 비상」)은 춤만이 꿈꿀 수 있는 그 같은 수직(垂直)의 시선과 영혼에 대한 선생의 공감과 지지를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오늘의 춤계에서 누구나 깨끗이 살기는 힘들다. 거의 모두 스스로 예술인임을 잊고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너무나 작고 사사로운 덫이나 인간적인 연(緣)에 얽매여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른바 예술혼을 고취시켜야 할 여러 계층의 춤의 지도자들은 나름대로의 생존과 계파 유지를 위해 제 식구 혹은 제 연줄 감싸고 챙기기에 바쁘다.
 그런 뜻에서 선생은 그런 인위적 그물〔網〕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자유롭고 초탈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분이 아닌가 한다. 90년대 후반인가 『음악동아』를 퇴임 후 경기도 퇴촌(退村)에 거주하게 되면서, 그 지명대로 자신의 생활철학에 있어서 일찍‘거리둠과 물러섬의 생활 태도’를 실천한 탓이라고 보고 싶다.
 나로서는 거듭 지금 병들지 않고 자연인 그대로의 삶을 소탈하게 살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정신적 힘이 되고 귀감이 된다.‘온갖 지저분하며, 뒤뚱거리는 가금(家禽)의 발자국이 난무(亂舞)하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끝으로 선생의 대표적 비평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건축과 무용의 비상”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무용이 갖는 고양(高揚, Elévation)과 비상의 꿈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은 무용가들이 적지 않듯이, 건축에 내재하는 상승의지를 외면해버린 건축가들은 없는지 나는 이따금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상승의지야말로 건축의 다이내믹한 에너지의 분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건축의 모든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건축물에는 날아오르려는 꿈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의 집은 거개가 단층이다. 그러나 기와집 지붕을 보라. 아래로 처지는 듯하고 처마가 별안간 하강을 멈추고 그 끝이 날렵하게 치솟아 오르는 그 상승곡선의 아름다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치열한 상승의지의 표출이 아닌가?
 (중략)치솟아 오르려는 의지가 마침내〔발레에서〕발가락 끝을 곤두 세워 그 끝만으로 서게 하는 쁘엥뜨(sur la pointe)를 가능케 했고, 거기서 다시 공중으로 상승하는 수많은 도약의 동작(jetée, sautée 등)을 가능케 했다.
 ‘어디든 지구 밖으로’(Anywhere out of the world)라는 보들레르의 절규로 표상되는 로맨티시즘의 시대에 누구보다도 먼저 발끝으로 서는 쁘엥뜨 동작을 시도했던 마리 탈리오니는 공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춤으로 관중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상승의지의 참다운 승리는 발롱(ballon)에서 구현되었다.”

 이순열 선생님의 건강과 선생님의 춤비평 선집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12.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