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B급 춤들의 향연 〈메갈로폴리스〉(독일, 콘스탄자 마크라스 안무, 도키 팍 컴패니)
관객이 변하고 있다는 걸 안무가만 모른다
이지현_춤비평가

 매일 도시를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매일 도시가 나에게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이어지고, 떠나고 싶은 열망 만큼이나 도시를 떠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힘이 빠진다. 이 도시는 그것도 경제적 불황을 겪고 있는 대도시는 유령스럽다. 한끝 차이로 호황의 도시가 무지개를 약속하며 사람들의 표정에 모든 행복을 담아 놓은 듯 하다가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법칙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는 이 생명체는 하루 아침에 사람들의 표정을 유령처럼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위대한 동시에 나약하다. 모든 걸 알고 있다가도 어떤 것도 선 뜻 바꿔 내지 못한다. 그러나 도시는 위대하다. 한순간에 바꿔 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인간은 도시에 대해 공포를 갖는다.
 그런 인간들의 군상, 아니 도시를 만든 자들과는 무관하게 도시에 모여 살게 된 루저들이 득시글 거리는 <메갈로폴리스>(2011. 9. 28. 아르코 대극장)는 분명 이 도시의 단면과 무관하지 않다. 콘스단자 마크라스(아르헨티나 태생, 독일에서 활동)는 뒷골목의 쓰레기 더미와 악취, 그 오물스러움을 무대로 옮겨 놓는다. 무대는 빌딩이 투사된 스크린과 키가 큰 가로등, 의자가 놓여진 국제전화방, 골목을 만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단층 건물, 그리고 그 건물의 옥상으로 꽤나 여러 곳을 배경으로 장면을 만들 수 있는 세트장처럼 다양하다. 카메라가 그런 세트장을 배타적으로 확대하여 마치 그럼직한 곳으로 비추는 것이 영상매체의 결과라면, 콘스탄자의 무대는 카메라가 막아 버린 시선을 무대 곳곳으로 돌아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 그래서 훤히 열려진 무대는 그것 자체로 환상적이다. <메갈로폴리스가> 결코 우아하고 상쾌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긍정적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대가 가진 환상적 재미와 더불어 그 배경을 고정시켜 놓고 무질서한 놀이를 하듯이 음악과 춤과 배우와 가수를 인형처럼 다루어 갖고 논다. 그래서 무대의 무거움은 순간 콘스탄자가 자기 방에 펼쳐놓은 동화책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상상속에서 매일 하던 놀이인 작은 인형극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주며 한껏 가벼워 진다. 그렇게 놀다보면 방은 어지러지고, 난장판이 된 채 인형을 갖고 놀던 아이는 지쳐 잠들어 버린 그런 방에 와 있는 착각을 준다. 그래서 인간과는 무관하게 규격화되고, 확장되는 도시라는 괴물의 이야기가 웃기고, 사랑스럽다. 그 안에 보여진 인간의 울음과 고독과 불통은 충분히 소격적이다.
 그래서 콘스탄자의 현대적 낭만주의로 보이게 하는 이 작품을 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은 유아적 취향이다. 아이처럼 어지러질 것을 걱정하지 않고, 아니 그것을 목적이라도 하 듯 모든 것을 던져 놓고 증식시키는 데 부담이 없다. 보여지는 춤들에서도 가리는 게 없다. 막춤, 힙합, 공식에 충실한 현대무용, 댄스 스포츠, 병신춤 등이 나열되고, 그 외의 장면은 그저 취해서 비틀거리는 몸짓이거나 폭력적인 쌈박질이다. 그것들을 주로 유치하게 나열한다. 안무가는 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아니 연기와 대사, 노래와 연주와 춤에 평등하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모든 군무는 유니슨이다. 별 고민없이 B급의 동작들을 모두 다 같이 춘다. 그러다가 대다수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남녀상열지사와 사건들을 위해선 모두 ‘듀엣’으로만 보여준다. 그런데 그 비중이 작품이 흘러 갈 수 록 균일한 것으로 밝혀진다.
 춤만 균일해 지는 게 아니다. 장면도, 짓거리도 점점 반복되고, 나열되고, 같은 정도의 크기로 구획이 나눠진다. 처음 무대가 주는 스케일의 시원함, 막굴리는 몸뚱이들의 자유로움이 확장되지 못한다. 그 빈틈은 처절한 대사와 울음, 우수에 차거나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개그식의 입담으로 메꿔진다. 한판 거나하게 푸짐하게 차려졌지만 몇 가지 먹어보면 모든 게 다 파악되어 버리는 그런 밥상이다. 먹어도 다시 먹을 수 있을 거 같은 다양함의 순환, 음식끼리의 오묘한 조화, 혹은 더 깊이 숨은 영양소의 궁합등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쾌하고 자유롭다. 춤이 신중하게 다뤄지지 않아 부담이 없고, 메시지는 뚜렷하게 언어로 다가와 명쾌하다. 나는 이런 류의 B급의 춤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춤에서 벗어난 춤 작품, 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춤 작품이 지금 의미있는 이유는 춤이 춤을 드디어 벗어나 바라보게 되었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다.
 춤에 대한 모든 담론은 지나치게 진지하다. 그러나 이미 진지함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많은 것들을 재미없고 힘들게 한지 오래다. 그리고 진지하게 만든 담론들만 유령처럼 떠돈다. 그리고 모두 그것에 취해 있다. 콘스탄자의 힘은 바로 이 거대한 도시를 뒤집어 볼 수 있는 힘이 진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비극적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비틀어 유치하게 B급으로 노는 것이라는 것을 주제에 걸맞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유치한 장면들은 여운이 길다. 모두 명품이 되려고 할 때 그 중앙에서 아무렇지 않게 B급의 배짱을 그녀가 갖고 있다. 그리고 그 B급을 즐기는 관객이 그녀를 존재케 한다. 객석이 변하고 있다.
 
 

 창작춤의 정신연령 - Lost Body Never Dreams, 신은주 & 수미 마사유키


 현대무용 modern dance의 출현이 이름만으로도 모더니티와 직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우리는 모던댄스를 만들어 낸 주체가 아니라 배워 수입하였기 때문에 그 탄생신화에는 무감하다. 우리의 초기 모던댄스 수입자들은 춤의 문화적 배경에는 무식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느라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급하여 그것을 고민할 틈이 없었단다. ‘고전주의의 顚覆’이란 모더니티의 존재이유는 형식적으로는 가장 크게 그간 쌓여온 주로 절대왕권의 비호를 받고 제국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형식적 규범을 깨트리는 반항에 있었다.

 개체발생이 개통발생을 반복하듯, 예술의 형식발생도 일반적인 발전의 논리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현대무용은 발레에 비하면 형식이 개인의 범주에 속해있다. 개인성이 형식의 규범에 앞선다. 이 개인성의 성장, 이전의 가치를 부정할 수 있을 만큼의 성장이 예술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경제적 발전, 근대국가의 출현, 주관주의 발흥이 모두 때를 맞춰 인류의 전면적인 성장과 변화를 만들어 갔다. 그 속에서 현대무용은 의미를 갖는다. 아방가르드와 다다에서 격렬하게 제기된 모더니티적 담론들이 몇십년 지나지 않아 변색될 위험을 두려워 하듯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의 자본주의 성장과 함께 다시 제기된다. 어쨌든 대중은 자신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을 아직은 먼저 시작한 예술가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들에게 관심과 돈을 몰아주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한 한 게 이미 60년대이다.
 나는 우리의 창작춤의 발생적 성장은 어디쯤일까를 매번 짚어 본다. 7, 80년대 신무용화 된 전통춤의 규범을 거부하고 창작춤이 출현한 것은 우리 무용사에서 사건임이 분명하다. 한국춤 모더니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창작춤과 지금의 창작춤을 비교해 보면 창작춤의 성장 속도와 도달지점을 파악할 수 있기에 그런 비교는 유용하다. 전통춤과는 다른 형식의 춤을 획기적으로 기획한 정신은 존재했으나 안무적으로, 작가적으로 그것이 폭발적으로 전면화되지는 못하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정신을 가진 춤작가 다수의 출현이 뒤따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형식은 다양화되지 못했고, 처음에 테잎을 끊은 작가들은 ‘전통의 현대화’와 같은 거대담론을 오랫동안 껴안은 채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처음의 신조를 지켜나간 몇몇의 굳건한 그룹들이 지금까지 창작춤의 맥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나 사실 2000년대 이후 출구를 못찾고 지난한 모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한국 창작춤에서 김선미의 <볼레로>가 새로운 큰 싹의 출현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이다. 역사적 출현의 정당성을 거대한 주제로 담아내려는 창작춤의 흐름을 개인적인 감성과 이야기로 소박하게 풀어내는 춤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춤의 진지하고 무거운 역사적 발걸음의 신성함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개인적인 것을 드러낼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주제로 하더라도 그것을 그려내는 자신만의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건 근대적이지 못하다. 근대적이지 못한 자아는 근대를 타고 넘어갈 수 가 없다. 아이가 갑자기 성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창작춤 작가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무대적 비주얼에 치중하거나 한국적 정서, 그 추상적 이야기에 머무는 것은 또 다른 신파이고 신무용과 동종임을 자처 하는 길이다. 창작춤 곳곳에 그런 징후가 만연하다.
 이미 몇차례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는 신은주와 수미 마사유키의 공동작 <잃어버린 몸은 결코 꿈꾸지 않는다>(2011. 10. 11. 자유소극장)는 여러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질적인 두 개의 춤 형식이 한 무대에서 대등하게 조화보다는 각자의 길에 몰입한 채 전개된다. 그 사이를 잇는 또 하나의 길은 야수다 노리유키의 타악연주이다. 무표정한 수미 마사유키의 강건하게 보이는 긴팔의 유선형과 신은주의 몸통에서 올라 온 기운을 주로 머리로 상승시켜 유선형으로 몰아 돌리는 흑색과 백색의 대조는 하나의 주제위에 서로의 이야기를 펼쳐가는 방식으로 시종일관하다.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몸의 거푸집 같은, 매미의 껍질같은 오브제는 그들이 몸이라는 유형의 틀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틀을 벗거나 입는 것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그것을 향해 가는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 둘이 막역한 예술적 친구임에도 이 둘의 무대는 시종일관 불편하다.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났지만 서로를 어떻게 배려하고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시골 노총각과 베트남 처녀 같은 서먹함이다. 마사유키의 춤은 부토를 경과해 온 이미 많은 부분이 관조된 그런 춤이었다. 그러나 부토로부터 관조의 방식을 배워 감정으로 부터는 거리를 유지하고 담담함을 유지하는 수준은 높으나 그의 춤 언어는 미학적 방향이 없이 무미건조할 뿐이다. 정신적 깊이로 들어가는 흥미로운 여정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신은주의 춤 주위를 떠돈다. 야수다 노리유키는 그 사이에서 다양한 타악기로 다양한 음색을 선사하며, 무대를 가로질러 걷거나 춤추며 음악적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극도의 응축이나 발산을 자유롭게 왕복하는 동안 두 춤꾼은 무겁게 굳어 있다. 신은주는 전통춤으로 단련된 솜씨로 단단한 춤집을 갖추고 자신의 호흡을 풀어간다. 그러나 그녀의 춤은 너무 단단하여 위태하다. 힘은 위태로운 고집이 되고, 긴장이 되어 춤으로 풀려 나오지 못하고 의식에 단단히 묶여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이 추구하는 주제와 춤은 모순이 된다.
 작품이 주는 많은 불편함은 바로 주제와의 충돌에서 생겨난 것이다. 창작춤이 했던 거대 담론의 폐해를 반복하고 있는 지점이다. 몸과 정신, 인간의 존재적 뿌리로부터 떠오르는 철학적 질문들이 주제로 있고, 춤은 그 문제를 풀어 내고 있는 척을 할 뿐이다. 춤에서 느껴지는 정서와 흐름은 어느 한 순간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설정하고 짜여진 대로 움직일 뿐이다. 존재적 고민의 이유가 바로 어떤 자유를 향한 갈망이라고 볼 때, 우리는 그런 자유를 줄 것같은 주제에 호기심을 가지고 공연장에 들어가지만 한껏 개인에서 한치도 자유로워 지지 못한 전근대적 자아를 만나고 답답함만을 가슴에 안고 나올 뿐이다.
 춤추는 존재와 주제의식이 맞아 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성찰의 부족이다. 그리고 철학적 사고의 빈곤이다. 그리고 이런 빈곤은 아직 개성이, personality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근대적 자아는 아직 성장하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 개성을 갖기 시작하면, 서투나마 자기의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성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꾸밈이 없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에너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춤은 그런 에너지를 설명없이 통찰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춤을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누구나 춤을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쉽다. 이제 더 이상 주제만 심오하고 춤은 답답하고 불편한 창작춤 공연을 관객들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것은 한시적인 것이었고, 우리 모두 그 시기를 함께 넘어 그것의 장단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자기 몸에 담겨 있는 자기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몸이 이미 개인의 역사와 지금의 시간을 담고 있는데, 자신만 모르고 딴 이야기를 한다면 보는 사람들은 불편하다. 그렇게 솔직담백하게 자기에 근거한 춤의 출현을 창작춤은 바란다. 그리고 그런 성장의 또 다른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김선미가 먼저 보여 주었다. 순간 신파에서 자유롭고, 거대담론에서 살짝 빠져 나온 성장의 단면!

2011.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