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춤 관찰기: 다시 생각하는 아시아 춤 인프라(9)
크메르 제국의 왕실 춤
서정록_춤연구가

크메르 제국의 간략한 역사 동남아시아 지역 중 인도차이나 반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본래 이 땅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은 현재 캄보디아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인 크메르인이었다. 9세기경 지도를 보면 앙코르(Angkor)를 중심으로 세운 크메르 제국(Khmer Empire, 802–1431)이 오늘날의 남 베트남에 해당하는 지역인 참파 왕국(Kingdom of Champa)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이전 크메르 제국은 캄보디아 분열기에 오늘날 자바에 위치한 사일렌드라(Shailendra)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 c. 770–835)라는 영웅이 나타나 분열된 크메르 세력을 통합하여,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조(Shailendra dynasty)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는 재위 중 혼란된 국내의 재통일에 힘썼으며, 힌두 전통의 정치 사상인 신왕숭배(Parameshwara, 神王崇拜) 사상을 도입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이는 왕은 시바(Shiva)신 혹은 비슈누(Vishnu)신의 화신(化身, Avatar)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개념이다. 실재로 자야바르만 2세는 비슈누신의 화신이라 자임하였고, “우주의 왕(universal monarch)”이라 스스로 선언하였다. 이후 이러한 전통은 크메르 왕국의 기본 통치 이념이 된다.




9세기경 크메르 제국의 판도(붉은 색)




 크메르 제국은 그 이웃 경쟁자인 참파 왕국과 끝임 없는 전쟁을 벌리며 영토를 확장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힌두 신앙(Hinduism)를 믿었던 크메르 인들은 힌두 신화에 의거하여 도시를 만들고 힌두신들을 위한 사원들을 건설하였다. 이 때 세워진 도시들과 사원들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바용(Bayon)이나 앙코르(Angkor)와 같은 도시와 사원 유적들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을 흔히 불교 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이 당시 이들 도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예를 들어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의 수도였던 앙코르의 거주 인구는 75만명으로, 동시대인 12세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1만8천명이었던 것을 상기하여 보면, 앙코르가 얼마나 번창하고 거대한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학자들과 무용가를 비롯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자야바르만 2세와 같은 군주와 왕실 그리고 왕실과 연계된 사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왕실 소속 무용가들과 춤은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영어로는 “Royal ballet of Cambodia” 혹은 프랑스어로 “Le ballet royal du Cambodge”로 불리며 외부에 알려진 캄보디아 궁중 춤(Robam Preah Reach Trop, របាំព្រះរាជទ្រព្)이 그것이다.


크메르 제국과 타이족

이 지역의 역사가 복잡해지고, 인종 구성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바로 몽골제국 때문이다. 13세기 당시 중국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은 그 여세를 몰아 송나라 남쪽에 위치한 대리국(大理國, 937-1253) 마저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중국에 편입시킨다. 이 대리국은 현재 중국의 운남(云南)에 위치한 대리국이 멸망하자, 이 지역에 거주하던 태족(泰族, 중국어 발음으로는 다이족)이 남쪽인 오늘날 동남아시아 쪽으로 대거 피신한다. 현재도 운남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내에는 태족 즉 타이족이 소수민족 중 하나로 120만 명 가량이 살고 있다.
 이들 타이계 민족의 이동이 동남아시아로 이동할 때, 집단적으로 일시에 움직인 것이 아니고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정착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일부는 치앙마이(Chiang Mai)를 중심으로 란나(Lanna)왕국이 수립되었는데 후에 란나 왕국이 쇠퇴하면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을 중심으로 한 란쌍(Lan Xang) 왕국이 세워진다. 이 란쌍 왕국은 오늘날의 라오스의 기원이 되고 있다. 또 다른 타이족의 일부는 더 남하하여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본래 라오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오족과 태국의 타이족은 같은 민족에서 기원하였다. 그런데, 타이족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시기에 이미 크메르 제국이 있었기 때문에, 타이족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연히 초창기 타이족의 역사는 이들 선주민들 즉 크메르인들과 수 많은 전쟁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 당시 타이족의 주요 관심사는 이 지역에서의 생존이었다.




크메르 제국의 타이족 병사들(앙코르 와트 부조)




 타이족들이 이곳에 정착할 때, 이 지역은 크메르인이 건설한 막강하였던 앙코르를 수도로 한 크메르 제국(현재 캄보디아)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었다. 아마도 이 당시 새롭게 집단 이주한 타이족의 여러 소규모 왕국들 상당수가 초기에 크메르 제국의 부용국(附庸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대한 증거로 유명한 것은 바로 12세기 중반 크메르 제국의 왕이었던 수르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재위 1113-1150?)때 크메르 왕국의 모습을 기록한 앙코르 와트의 부조에 보이는 타이족 병사 모습이다. 앙코르 와트를 지은 수르야바르만 2세는 크메르 왕국의 최성기를 구가한 왕으로 당시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오랫동안 강력한 왕국이었던 참파(Champa)를 공격하여 그 수도인 비자야(Vijaya, 현재의 뀌년, Qui Nhon)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앙코르 와트의 부조에 보이는 타이족 병사들은 수르야바르만 2세가 참파와 전쟁을 할 때 동원된 이들로 당시 타이족과 크메르 왕국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당시 타이족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태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현재까지도 종종 사용되는 “시암(Siam)”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원래 캄보디아 언어로는 '검정색 혹은 갈색’의 의미로 ‘좀도둑'이라는 뜻을 가진다.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르야바르만 2세




크메르 제국의 춤과 태국 왕실 춤

그런데, 13세기 때부터 막강하였던 크메르 왕국은 무리한 원정과 사원건설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틈을 타서 타이족인 아유타야 왕국의 군대가 1431년 크메르 왕국을 침략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유타야 왕국 군대는 6개월간의 포위 끝에 크메르 왕국의 수도였던 앙코르를 점령하였다. 찬란했던 크메르 왕국은 이를 계기로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여기서 문화사적으로 주목할 점은 아유타야 왕국이 앙코르를 점령하였을 때, 그곳에 있던 수 많은 크메르 궁중의 지식인들(브라만)과 예술가들이 납치되어 왔는데, 이들은 아유타야 왕국에 선진 제도와 세련된 문화들을 전파하였다. 앙코르 와트에서 납치되어온 관료들의 행정 및 통치경험이 아유타야의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당시로써는 선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고, 크메르 왕국에서 온 이들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의 선진 문물의 전파는 이후 태국의 궁중 문화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중에는 궁중에서 춤과 음악을 담당하던 예술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춤과 음악은 아유타야 궁중에 소개되어, 오늘날 태국 왕실 춤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한다.




크메르 제국의 여성 무용가들(앙코르 와트 부조)




 그러므로 태국의 왕실 춤과 캄보디아의 왕실 춤은 본래 그 뿌리가 같은 데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태국의 왕실 춤은 캄보디아에서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이런 이유로 각 나라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인 왕실 춤을 가지고 양국은 지금까지도 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힌두 전통의 이들 무용가들 특히 여성 무용가들을 압사라(Apsaras)라고 부른다. 압사라는 본래 힌두 신화에서는 하늘에 사는 천녀(天女, 영어로는 Celestial maiden라 부른다)를 뜻하는 말로, 음악과 춤을 담당하는 신인 간다르바(Gandharva)의 부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캄보디아 궁중 춤은 종종 압사라 춤(Apsaras dance)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정록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대한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

2019.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