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이애주 vs 채희완
생명 본원을 향해 되묻는, 춤의 사회적 실현을 위하여





채희완: 새해를 맞이하면서 벽두에 <천명>이라는 공연을 하셨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올해는 또 갑오 동학혁명 120주년의 해이고 선생님 춤 인생과 춤 삶이 60년이 넘어가는 해이기도 해서 한 해의 첫 벽두를 큰 공연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을 듣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날 1월 6일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 8시에 모인 관객층을 보니 일반 춤 공연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체로 춤 공연은 연극 공연과는 달리 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마치 가족 춤잔치 하듯이 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의외로 50~60대 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관객들의 공연에 임하는 자세도 진지할 뿐만 아니라 엄숙하기까지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번 공연의 커다란 무엇을 던져주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번 공연을 마치신 후의 소감만이 아니라 의도하셨던 바나 절실한 욕구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하신 것인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이번 공연의 의의나 주안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애주: 말씀하셨듯이 춤 가족도 많이 오셨고, 무용 판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일반 관객과 시민들 다양한 계층이 모였습니다. 제가 ‘무용’을 옛날 70년대부터 ‘춤’이라고 썼던 것처럼 춤의 융합적인 의미라고 할까요. 사회와 역사가 포함된 그러한 춤, 큰 의미로는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갖고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함께 추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오래간만에 옛 친구들이 모였어요. 공연을 하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어요. 항상 춤을 추고 난 다음에 기록을 보면 흠집이 많고 부끄럽고 합니다. 알면서도 육신은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60년 이상 춤을 춰왔는데 흉하든 괜찮든 간에 몸과 소리의 흔적을 영상에 남기고자 하는 사명과 책임을 느꼈습니다.
 몇 년 전 왼쪽 다리와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 몸을 쓰지 못하였을 때, 육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2년 전부터 공연을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실에서 판을 만드는 일이 어려운 것을 아는데, 제가 염원을 하니 주위 여러분들이 나서 주셨습니다. 춤에서 흔치 않은 춤판을 만들기 위해서 사전에 제작 후원이라는 제도를 연결했어요. 어르신들, 선후배들, 동료들이 도우셔서 그 힘으로 이번 춤판을 연 것입니다.
 2013년 6월에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원로교수와 세종문화회관측 관계자께서 판을 벌여주려고 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연결이 되다보니 성사가 되질 않았어요. 그래서 올해가 가기 전, 음력으로는 뱀의 해가 지나가기 전에 하고자 했어요.
 2014년 새해 벽두에 잡다보니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채희완 선생님도 아시듯이 춤에서 ‘신명’이 본질이긴 하나, 선뜻 신명으로 붙이긴 어려웠어요. ‘천명’이라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이 존재, 하늘이 이어준 춤이라는 것, 큰 것 같지만 겸허한 생각으로 했어요. 우리가 천명의 존재로 태어난 것이듯이 자기의 명이 무엇인지,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명을 받고 춤을 추는 나는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몸짓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천명을 붙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근원적인 데로 돌아가서 존재자체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나 채선생이나 후배들이 문화1세대라고 이름 붙였듯이 70년대 초부터 거의 반세기가 돼 가는데 사실은 험난한 시대를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삶과 생명이라는 것, 생명의 예술과 삶의 중심을 고민하며 시대를 지나왔으니 시대의 사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0년대 초에 우리가 화두를 잡은 민족·민중·민주란 무엇이며 그것이 시민과 서민의 삶의 문제 등과 겹치면서 ‘천명’으로 잡았습니다. 시대상황이, 겉으로 사는 것은 나아진 것 같지만 아직도 본질을 찾지 못하는 것은 70년대 초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한 물음들이 다 모여서 춤 한판을 연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모이신 분들도 그런 물음을 가지신 분들이기에 보통 춤공연 분위기와는 다르지 않았는가 합니다.




춤의 사회성과 춤의 본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축약된 공연

 

채희완: 저도 오신 분들을 다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대체로 춤이 예술적인 춤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그것을 확인하고자 오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80년대 이후 선생님의 사회·역사·정치의식이 첨예화된 그런 춤이 과연 21세기로 넘어 오면서 어떤 식으로 정착을 보고 또 나가는지에 대한 설레는 기대도 가지고서 오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춤추신 내용을 봐도 그러한 뜻이 소봇이 담겨져 있다고 전 봤습니다. 공연 1부는 전통춤으로 특히 선생님께서 고이 간직하시고 전승하고 싶으신 춤의 맥락에서 다시 춤의 본질뿐만 아니라 삶의 본원적 자리를 확보하고 되돌이켜 튼튼하게 자리 잡고자 하신 그 의도에 해당되는 종목들이고요. 2부는 사회의식이 첨예화하던 그 당시 사회 현장의 춤을 축약해서 무대 공연물로 옮겨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춤을 통한 선생님의 춤 정신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사회와 춤과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해야 될 것인지 그것이 또 앞으로 춤의 사회적 기능으로 다시 확보되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춤의 사회성과 춤의 본질을 작품 내용 속에서 정리하고 싶은 게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가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총체적인 뜻을 ‘천명(天命)’이라는 주제와 제목을 통해서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 이름을 짓기까지 여러 생각이 있으셨을 것인데, 아마도 춤과 삶과 사회에 대한 집결지점이 ‘천명’이라고 하는, 하늘이 이 땅의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던져놓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가하는 것을 지시한 것으로 생각을 모으셨고, 아마도 의무라고까지 생각하셔서 ‘명’자를 붙이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천명’이라는 용어는 어떤 책에서 혹은 어떤 이야기에서 찾으셨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천명'은 존재자체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몸짓과 사유의 모든 것이다 
 

이애주: ‘천명’은 중용(中庸)의 첫 글자입니다. 첫 구절인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는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에서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에서 그 도를 닦아나가는 것을 교(敎)라고 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이 세 문장 안에 압축적으로 담겨있습니다. 춤을 추지만 그 안에는 본성이 들어 있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안 되듯 첫 글자가 바로 ‘천명’입니다. 천부경(天符經)에도 천지인이 나타나는 천성·지성·인성과 천도·지도·인도가 있습니다. 성과 도가 따르고 있지요. 그런데 ‘천명’이라는 것은 하늘의 기운과 부응하고 조화하는 땅의 몸짓이라고 보면 됩니다. 천지인의 삼재(三才)개념으로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몸짓과 의식 생각의 모든 것이 ‘천명’으로서의 존재자체이며, 말하고 입고 생각하는 것이 천명의 움직임이라는 큰 틀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천명’이라는 것은 이번 공연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것이고 현재와 미래에도 ‘천명’과 함께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몸짓과 정신, 사상까지 그 모든 것이 ‘천명’으로 응축된 것입니다. 춤은 겉형상을 통해서 내면의 정신이 보이는데 공연 후에는 얼굴은 기억 못해도 정신은 기억됩니다. 춤이 앞으로 본질적으로 나가야 하고 본성을 회복해야만 하는 당위 등 첫 번째 떠오른 어휘가 천명이었고 그래서 작품 제목을 <천명>으로 붙였습니다. 


희완: 그 공연의 내용이 1부는 ‘완판승무’, ‘본살풀이’로 종목을 줄이셨고, 2부는 ‘터벌림 태평’으로 사회현장에서 춤이 지극한 사회적 기능을 발휘한 것을 축약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빠져 있지만 선생님이 추셨던 영가무도의 ‘한밝춤’이나 ‘고구려춤’ 또 ‘인사춤’과 지난 회갑 때 추신 ‘달의 노래’ 같은 춤 그리고 보유하고 계신 ‘학무’라든가 여러 종목들이 많이 있으신데 ‘승무’를 중심으로 해서 추신 사유가 있으신지요.

 
 

 

 

승무는 우주창조와 노동의 몸짓과 구체적인 삶과 철학이 담겨 있는 춤


이애주: 70년대부터 <명무전>이라고 한국일보에서 구희서 기자와 정범태 선생이 열면서 저의 스승이신 한영숙 선생님의 춤을 ‘사군자춤’ 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했습니다. 사군자는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무’로 제가 그 춤을 이어받았고, 그것을 몇 십 년 추다보니 그 춤 안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여러 춤을 다 생각해봤지요. 탈춤까지도, 지난 74년도 첫 춤판에서 했었던 불교 의식춤도 생각해 봤지만 전통춤만으로도 며칠은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가 혼자 하기엔 시간과 역량이 너무 부족할 것 같아서 60여 년 동안 항상 기본으로 많이 추어왔던 ‘승무’를 채택한 것입니다. 한영숙 선생님은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보유자로 지정되시면서 저를 발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첫 번째로 ‘승무’ 전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춤 전수를 받으려면 항상 몇 시간을 ‘본살풀이’로 몸을 풀었어야 했어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세우신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전 서울국악예술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함께 추다가 학생들이 간 뒤에야, 그 때부터 ‘완판 승무’를 전수하셨죠. 

 과거에는 저 혼자 역량으로 대극장을 빌려서 독무대로 완판 승무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연 체제가 바뀌면서 기획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됐지요. 보도 자료를 보내도 실리지도 않고, 극장대관도 힘들고, 지원서를 신청해도 잘되지 않아 어느 순간 포기해버리고 수련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10년 이상 큰 무대를 밟지 못했지요. 그리고 시대가 긴 승무를 원하지 않고 짧게 토막춤만을 원하는 추세였습니다. 10분추라는 것을 15분하겠다고 하고 시간을 늘려서 20분 정도하기도 했습니다.(웃음)
 ‘완판 승무’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염불과정은 천지인 우주 성립의 상징이 철학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 굿의 첫 사설로서 천지창조 얘기와도 맥이 통합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우주가 생기는데 해동조선 곧 고조선의 상고 역사 초창기를 말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과정은 타령과정으로 삼현타령으로 시작합니다. 굉장히 느리면서 축축 늘어집니다. 여기에는 장단도 쭉 늘려지면서 마치 네 번을 말뚝 박는것과 같이 장단을 칩니다. 춤사위 또한 사방으로 앉아서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호미를 잡고 땅을 파며 일을 하는 것이자 사방에 기둥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춤이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죠. 제가 학생들과 진안 풍물굿 전수를 가서 상쇠잡이인 김봉렬 선생님 댁에 머물렀어요. 여름 방학 때, 산등성 그늘에서 노랫굿을 배우면서 저 멀리 한참을 내려다보니 동네 아낙네가 뙤약볕에서 호미질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타령 첫 동작과 비슷해 보였던 것입니다. 깜짝 놀랬습니다. 그 이전에는 꿈에도 노동 동작이라는 것을 생각 못했었는데, 그 틀이 바로 80년대 바람맞이 ‘씨춤’에서 활용되었습니다. ‘일춤’으로 시작해 땅에 사방기둥을 뿌리내리면서 튼실한 토대를 쌓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굿거리 과정으로 넘어가죠. 여기는 인간사의 섬세한 감정과 정서가 드러나는데 바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법고 과정입니다. 북을 울리면서 치는 것이죠. 모든 춤에서 친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박수춤’, ‘소고춤’, ‘장고춤’ 같은 것도 그렇고, 소도구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출 때도 기운이 오고 가고 치면서 소통하는 것입니다. 왼팔의 기운이 오른팔을 칠 수도 있는 것이고, 안 보이는 기운이 서로 스치며 소통하는 것으로 북을 치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북울림의 마지막에는 당악이 있는데 역시 북가락을 두드리며 난타로 몰아가 신명의 경지에서 모든 것이 터트려지며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계절로 보면 열매가 맺어 비바람에 후다닥 다 땅에 떨어지는 가을이고, 그것이 땅에 묻혀 몸을 숨기는 겨울로 가는 과정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승무 전체에는 인간의 구체적인 몸짓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으로 그 과정을 생장수장(生長收藏),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승무를 추기 전 선생님께 전수받은 본살풀이는 6분 30초 정도로 짧은 춤입니다. 그 안에 모든 춤사위와 틀거리가 간략하게 들어있습니다. 입춤형태로서 아무것도 안 들고 맨몸으로 하는 것으로 ‘입춤 본살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거야 말로 한성준 선생님이 조선조 때 만드신 것을 손녀(한영숙)한테 물려주신 것이고 유일하게 제가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본살풀이’를 잘 모릅니다. ‘본살풀이’는 ‘살풀이’의 기본으로 입춤 형식이라면 ‘살풀이’는 긴 수건을 들고 춥니다. 흰 명주수건을 들었지만 때로는 칼이 될 수도 있고, 죽창이 될 수도 있지요. 형식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애절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진모리로 들어가서 수건을 확확 뿌리면서 역동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원에서 연풍대로 흩뿌리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해서 중심을 잡고 마무리 짓는 춤이 ‘살풀이’입니다. ‘살풀이’는 말 그대로 살을 푸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쌓인 원한에서부터 서로간의 불편함이나 몸의 불순물에서 응어리진 것 등 모든 것을 풀고 극복해서 제대로 중심을 잡아 다시 새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살풀이’는 하얀 옷에 쪽지고 한스런 슬픈 춤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에서 흥으로 풀어 서로 기운을 받아가는 춤입니다. 한영숙 선생님의 ‘살풀이’는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었지만 삶을 그대로 내보이는 본질적이고 상징적인 춤입니다.



태평무는 태형한 세상을 바라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이야기

 
이애주: 그 다음으로 ‘태평무(太平舞)’를 했습니다. ‘태평무’는 말 그대로 태평의 춤입니다. 요즘 시대에 무슨 ‘태평’을 말하는가 할지 모르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평화롭게 태어났고, 더 큰 평화인 태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의미이면서도 시작과 끝인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철학을 담고 있는 근원적인 춤입니다. 태평은 크게 화평하고 평화스러운 뜻입니다. 광주의 무등산이 등급이 없다는 의미이듯이, 춤에서도 등급과 계급이 없이 무한한 평등을 말합니다. 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연산(連山)’같이 오르고 내리며 넘나들면서 가는 것이 태평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제가 발표한 ‘태평무’는 한영숙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배우시고 남겨놓으신 유일한 마지막 춤입니다. 그 당시 장단 치는 명인들이 다 돌아가셔서 생음악이 없는데, 선생님의 절친이셨던 성금연 선생이 ‘푸살’이라는 즉흥 연주를 하셨어요. 성금연 선생은 문화재이셨는데 남편인 지영희 선생님과 하와이로 이민 가시면서 문화재를 반납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한국에 나오셔서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하셨어요. 성금연 선생이 푸살 15박 장단으로 가야금을 타시고 한영숙 선생님이 즉흥으로 춤을 추셨던 겁니다. 그것을 항상 잊지 못하시고 ‘태평무’처음에 15박 푸살가락을 붙이고, 그 뒤에는 진쇠, 반설음, 올림채등 여러장단과 도살풀이, 자진 도살풀이등을 붙이셔서 50년대 명인들이 연주하던 것 그대로 편집 및 재구성을 하신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추시며 남겨놓으신 그대로 관을 쓰고 당의와 남색청홍치마를 입고서 ‘태평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해 보이나 타악이 나오는 반설음 부분부터는 역동적으로 변하며 사방치기와 천둥채가 나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983년 공간사랑은 강준혁씨, 구희서씨, 김덕수씨 세 분이서 운영할 때입니다. 그분들이 매달 <전통예술의 밤>이라고 독무대를 마련했는데 저에게 요청을 해서 승무, 살풀이, 태평무를 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저한테 ‘승무’, ‘살풀이’만 추고 ‘태평무’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아시듯이 몇 십 년을 춤을 춰왔는데도 1974년 <이애주 춤판> 때에 ‘살풀이’가 부족하다고 당신께서 특별출연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아직 제가 ‘태평무’추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하셨나 봅니다. 제 생각엔 선생님도 음악이 없어서 옛날 명인들 녹음을 잘라 붙여 ‘태평무’를 추시는데 선생님 안계시면 앞으로 장단은 어떻게 할 거냐고 저는 선생님께 며칠 밤을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승낙을 얻어 마포에 있는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이 있는 사물놀이 회관으로 연습을 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태평무 장단을 가르치면서 춤을 같이 짠 거예요. 다시 생각해보면 어려서부터 춘 제자에게 대학강단에 선 제 1제자에게 살풀이, 태평무가 안된다고 하신 의도는 요즘 교육에서 볼 수 없는 엄격한 교육철학을 보여주는 진정한 교육자의 자세로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춤의 철학은 한마디로 예를 올리는 것이며 자기를 숙이는 것


이애주: 맨처음 부정거리장단을 배우면서 그 다음 진쇠장단으로 나갑니다. 진쇠는 30박인데 저도 그렇고 그분들도 못 듣던 새 장단을 접하니 어려웠지만 기뻤습니다. 진쇠는 판을 잡는 것입니다. 마치 승무의 염불에서 우주가 창조되는 것 같이 전체 중심을 잡아 장엄하게 이어갑니다. 다음은 엇모리로 살짝 바뀌면서 터벌림으로 넘어갑니다. 터벌림은 말 그대로 터를 벌리는 것이죠. 7~80년 대학가에서 후배들이 많이 했었는데 듣기만 해도 흥이 오르는 장단입니다. 그리고 태징을 치며 겹마치기로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올림채로 갔어요. 여기서 올림채란 올림이라는 의미에서 예를 올리며 자기를 숙이는 것입니다. 올림채 춤도 동서남북 사방치기를 하며 돌면서 천둥채로 마지막 힘을 터트리며 갈무리를 합니다. 승무로 치면 법고 당악과정과 같고 그 다음 본래대로 돌아가는 도살풀이 과정이 됩니다. 다시 자진모리로 올렸다가 기운에 따라 당악 한 번 더 치고 다시 도살풀이로 끝나는 것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당시 공간사랑에서 공연할 때에는 관객이 다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한영숙 선생님께서 89년에 타계하시고 90년에 사물놀이패와 의기투합되어 선생님을 추모하며 다시 ‘승무’, ‘살풀이’, ‘태평무’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한영숙류가 아니라 이애주류 태평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영숙류 태평무와는 전혀 다르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30년대 신문자료에 한성준 선생님께서 경기·충청도 도당굿에 왕거리와 임금거리가 있는데, 왕거리는 위엄을 가지고 잘못하는 것을 꾸짖기도 하며 반성하여 바르게 살게 하는 군웅의 춤입니다. 이것을 춤으로 추어 앞으로는 ‘태평춤’이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춤을 한영숙 선생님께서 오직 저에게만 전해주신 것으로 한성준 선생님이 발언하신 그 ‘태평춤‘입니다. 사실 제가 ‘바람맞이’나 밖에서 춤을 춘 현장춤도 다 ‘태평춤’에서 근거한 것입니다. 그 당시 혹자는 제가 전통춤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1987년 연우무대에서 <바람맞이>를 할 때에도 선생님 안방에서 항상 ‘승무’, ‘살풀이’를 몇 시간을 하고 난 후 무대에 서야 작품이 나왔습니다. 몸을 다 풀고 가면 걱정이 없이 날아갈 듯 자유로웠습니다. 전통춤 안에 오늘의 춤이 들어 있습니다. 2부 ‘터벌림 태평’도 1부 전통춤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있는 것에서 거의 다 나옵니다. 단지 새롭게 이 시대정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작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선생님이 큰 것을 저에게 주셨고, 아무도 그 춤을 추지 않거니와 장단 자체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선생님께서 주신 것을 잘 펼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무대에서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되어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창작춤 바람맞이의 원류는 태평춤

 
이애주: 1월 7일 이틀째 한 군무 중에 ‘예의춤’이라고 있습니다. ‘예의춤’의 정신을 한마디로 하면 예를 드리는 예(禮)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철학에서 자기를 숙이고 비우는 것이 곧 다시 채워지는 것이라고 하잖습니까. 춤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숙이고 비우는 자세가 근원적으로 가면 태아의 형상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태어날 때 쉼표의 형상으로 생겨나죠. 그게 완전히 비운 자세인데 세상에 나오면서 고개를 들고 철이 들면서 목에 힘을 주며 망가지는 것입니다. 항상 근원으로 돌아가서 회복하자는 정신철학을 가진춤이 ‘예의춤’이고 한국전통춤회에서 수련할 때 기본춤으로 추는데 정말 좋습니다. 춤을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단한 춤입니다. 


희완: 이번 공연종목마다 하나씩 그 내용을 아낌없이 속시원하게 얘기해 주셔서 더 이상은 달리 캐묻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완판 승무’를 오랜만에 하셨는데요. 완판이 50여분 정도였는데 보통은 여러 공연 조건 때문에 15분 정도로 줄여서 추는 게 일반적이었잖아요. 그렇게 줄여서 할 때도 ‘승무’가 하나의 자체 완결된 독립적인 작품으로 되어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축약해서 하시는 것이어서 그런지요.



 

창작은 전통의 수련된 몸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

 

이애주: 염불과정에서 어느 한 마루만 집중적으로 추면 조화가 잘 안맞게 됩니다. 구성을 보면 승무 처음에 엎드려서 절 들이는 것이 천지인의 ‘첫’ 동작 이예요. 그 다음 좌우 태극으로 틀어서 일어난 후 돌면서 자기가 갈 방향을 정립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지인 삼재(三宰)개념으로 나타납니다. 그 후 삼진삼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15분가량 할 때는 삼진삼퇴를 못하고 좌우 날개펴기를 하면서 하늘로 펼쳤다 오므려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 다음에 오체투지 동작으로 엎드려 자신을 낮추는 사위는 항상 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존경하고 하늘에 예를 드리는 봉솟음 동작이 두 개가 있는데 ‘봉솟금’ 이라고도 하죠. 마치 매사냥 할 때, 매가 노루를 잡기 위해서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순식간에 내려오는 느낌입니다. ‘봉산탈춤’에서 먹중들이 연풍대 하는 느낌이죠. 봉솟음 두 개중 시간이 없을 때는 두 번째 것만 합니다. 두 번째 봉솟음은 천지사방으로 온몸을 휘저으며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것이죠.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사(生死)에서 사(死)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러다가 다시 숨과 호흡이 시작되면서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즉 사즉생으로 다시 살아나서 북으로 가면서 염불이 끝나게 됩니다. 틀거리는 어떻게 보면 간단합니다. 천지인 동작 절드림이 있어야 하고 태극 좌우틀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중심을 잡아 갈 방향을 정해야 하고, 좌우로 날개펴기는 해야 하죠. 중간에는 수레바퀴 돌려가듯 염불에서 근본적인 동작을 다보입니다. 지금까지의 마루는 꼭하고 봉솟음 두 개는 시간에 따라 두번째것만 하기도 합니다. 이번 공연에서 처음 절드리는 동작은 네 장단에 했는데 축약된 승무에서는 한 장단에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짧게 할 때는 타령과정은 안하고 굿거리과정으로 압축시켜서 하게 됩니다. 선생님한테 승무를 수백 차례를 배워서 아무 판에 나가도 저절로 되는 것이죠. 바로 즉흥창조입니다. 전통춤이 체득이 되있을 때 즉흥창조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아무판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채​희완: 염불, 타령, 굿거리, 북놀음, 당악, 다시 굿거리인데 보통 시간이 부족할 때는 타령 장단은 온통 들어내 버리고도 하지요? 


이애주: 춤을 출 때 타령을 들어낼 때도 있지만 혹시 굿거리가 타령인줄 알까봐 교육적인 부분도 신경 써야 하니 타령과정을 짧게라도 합니다. 


채​희완: 가령 비슷한 예를 든다면 ‘춘향가’ 한 바탕이 대여섯 시간 걸리는데 몇 대목만 뽑아서 엮음새로 맞춰 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인가요. 


이애주: 비슷한데 판소리에서는 몇 대목을 뽑아서 그대로 하잖아요. 춤에서는 몇 대목을 뽑아서 다시 압축을 시킵니다. 그런데 몇 대목 뽑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체득이 안 된 사람은 핵심을 줄여버리고 아닌 것만 할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저한테 춤을 줄여서 해보하고 하셨어요. 그 때마다 선생님께서 줄여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지적해 주셨죠. 그래서 제가 깨달았습니다. 수백 개를 춰보니 어떤 것은 빼도 되고 어떤 것은 안 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무엇이라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면서 수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문춤대학 같은데서 승무의 과정을 여러 단계로 지도할 수 있겠죠. 그러나 요즘 교육과정에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채​희완: 어느 대목에서, 가령 염불 과정에서 음악 하는 분들과 그 분량이나 장단을 맞춰야 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사전에 맞추게 되는지요? 염불 어느 대목 몇 마루만 하자 하고, 그렇게 ‘마루’의 개념이 통용되는 거지요? 


이애주: 춤을 추면서 몇 마루 몇 장단이라는 틀 속에 춤을 집어넣지는 않아요. 보통 ‘승무’에서 마지막 마루가 끝날 때는 자진걸음으로 북 앞으로 갈 때에 다음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충은 서로 무언의 법칙으로 다 알아요. 


채​희완: 악사들과 일종의 신호가 통하고 있는 것이네요. 악사 분들이 모를 수도 있을 듯한데요. 음악선율이 단어와 단어가 어울려 하나의 숙어처럼 한 뭉태기로 독자적인 단위구성물로 소롯이 담겨있는데, 어떤 때는 축약하다 보면 잘못하다가 뭉태기가 중간에 짤려 끊어질 수도 있잖아요. 


이애주: 토대가 되는 주제선율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어떤 상황이 오든 고수들은 잘 마무리를 해요. 서양의 오케스트라는 한박자 아니 반박자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우리 춤과 악은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 여유롭게 넘나들 수 있습니다.

 

 

우리 춤은 서양의 Improvisation과 달리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한 것

 

채​희완: 이 마루 부분이 작품의 틀거리를 잡거나 구성을 할 때 중요한 개념이 되지요. 


이애주: 얼마전 불란서 문화관에 있는 분이 서양처럼 악보가 지정되어 있느냐는 질문을 했어요. 서양의 즉흥(improvisation)하고는 다르게 우리의 즉흥은 있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하다고 하였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확 다가오지 않는 눈치를 보이더군요. 


채​희완: 음악하시는 분도 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선율구조의 한 마루의 개념이 잡혀있으니 한 뭉태기씩 엮음새로 하겠네요. 춤추는 분도 마찬가지겠구요. 


이애주: 내가 음악을 알고 음악 하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작년 <명무전>때 태평무를 생음악으로 한다기에 가서 춤을 맞춰보니 제대로 춤이 나올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춤을 추는 내면의 세계 기초철학부터 설명하고 구체적 장단까지도 다 세세하게 구음으로 해줬더니 음악자체가 확연히 달라지면서 그분께서 많이 배웠다고 고마워했습니다.(웃음) 


채​희완: 이번 반주음악을 하신 분들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이애주: 민속학회 시나위 분들이신데 한영숙 선생님의 제자들이시죠. 대금하신 이철주 시나위 회장 중심으로 명인들이죠. 해금의 홍옥미 선생, 아쟁의 김무경 선생, 피리에 이종대 선생, 이용탁 선생으로 다 문화재급이시죠. 실제로 이철주, 김무경 두 분이 삼현육각 문화재가 되셨습니다. 


채​희완: 참 잘 맞으시지요. 그분들 모시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이애주: 다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신 거죠. 선생님들 연주하실 때도 제가 몸으로 돕기로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적은 예산으로 해주신 거죠. 


채​희완: 이번 레퍼토리에서 ‘춘앵전’과 ‘학무’는 솔로로도 넉넉히 넣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으셨어요. 


이애주: ‘학무’는 한영숙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문화재로 지정되셨어요. 김천흥 선생님과 의논하셔서 그 분의 제자 이흥구씨한테 주게 되었는데 그 후 궁중 학무로 바뀐 셈입니다. 


채​희완: 그렇다면 한영숙 선생님의 ‘학무’는 지금은 없는 것이네요. 


이애주: 그런 셈입니다. 이흥구선생이 궁중 학무로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당장 추라면 출 수 있습니다. 계기가 된다면 언젠가 한성준 선생님의 ‘학춤’을 재현할 계획입니다. 


채​희완: 지금까지는 1부에 해당되는 얘기였고, 2부는 ‘터벌림 태평’으로 예전에 여러 현장이나 집회에서 하셨던 것을 세 거리로 압축하신 것이지요? 


이애주: 2부는 80년 이후에 마당과 거리에서 춘 것이었는데 이것도 저의 소중한 춤역사니까 몇 부분만 정리를 해봤습니다. 


채​희완: 이런 내용으로선 무대공간에서는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이애주: 무대에 올리기는 처음입니다. 이왕 <천명>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춤과 나와 우리의 역사이지요. 1974년 <땅끝>이나 <나눔굿>은 군무가 들어간 대작으로 재현하기가 어렵지만 <바람맞이>는 혼자서 독무형식으로 한것이니 마음을 낼 수 있었습니다. <바람맞이> 중에서 첫 과정인 ‘씨춤’을 추었는데 바로 씨앗이 떨어져서 싹이 움트며 생명이 펼쳐지는 과정입니다. 네 과정 중에서도 전체를 압축한 상징적 춤이죠. 일반적으로 서무나 서곡 같은 개념입니다. ‘씨춤’의 맨 처음은 부정거리로 판을 씻김합니다. 그 다음 진쇠로 나와 바람에 휘어지고 날리는 것을 소나무 춤으로 압축을 했어요. 역사의 외압에 의해 쓰러지고 일어나 삼진삼퇴하지만 마지막에 결국은 되살아나 소나무 뿌리를 확고히 뿌리내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생명이 꺼지지 않는다는 인간생명의 본성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생춤’이라는 것은 ‘태평춤’의 토대를 갖고 펼친 것이죠. 진쇠로 터를 밟으며 다진다음 나와 네 명이 반서림으로 나와 사방진을 치고 군무가 됩니다. 한 무리가 되기도 하고 두 무리로 나눠지기도 하며 결국은 태극으로 휘감아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으로 길닦음입니다, 그 의미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의 수도처럼 수행의 차원입니다. 실제로 각 도의 문화재로 지정된 굿 후반부에는 다 베를 자르며 길닦음 과정이 있습니다. 80년대 현장춤을 출 때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베를 자르고 했는데요. 나중에 보니 길닦음의 뜻이 수행의 의미라 놀라웠습니다.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 초창기에 여사제들이 지금으로 치면 주술적 정치가이면서 예술가인 셈이었죠. 민중을 지시하기도 하고 이끌기도 하며 그 길을 터주던 구체적 행동과 철학적인 정신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예인 것 입니다. 길닦음이 새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듯 죽은자와 산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위무하며 하나로 다시 태어나 나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공연 마지막에는 베 자른 것을 다 모아 한 무더기로 쌓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전체로 보면 <땅끝>에서 나왔던 돌무더기일 수도 있고, 내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고요. 다 끌고 보듬어서 같이 가야 하는 거죠. 마당에서 할 때는 ‘강강술래’를 하면서 돌고 뛰고 신명을 냈는데 실내무대에서는 아예 반전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를 돌아보는 관조의 상태인 관(觀)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한밝춤의 흰빛, 하얀 죽음의 길 이미지

 

채​희완: 전체 공연 이미지가 하얀 죽음의 길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한밝춤’의 흰빛과 밝음으로 씻김이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곳곳에 다니시면서 줄기차게 연마하신 끝에, 그 한국춤의 전체상을 한 곳으로 집결해해 낸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그 빛이 수렴과 확충, 구심과 원심, 집중과 분산이 동시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조금은 평면적으로 다가오는 듯 했어요. 위, 아래, 두께와 높이, 깊이와 넓이, 한과 신명이 공존하는, 처절하나 빛나는 환희의 흰그늘과 같은 그런 형상으로 보일 수는 없을까 생각했어요. 


이애주: 사실 이번은 미완성이예요. 처음, 1974년 첫 발표회때 <땅끝>을 했을 때에도 미완성이었는데 명동성당에서 하려고 두 번째 준비할 때는 어느 정도 근접해 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채선생님이 부산에서 춤판을 마련해 주세요.(웃음) 광주, 대전에서도 몇 번을 하면서 옹골게 빚어가고 싶어요. 춤굿으로 하면 좋은데 시간이 없었어요. 시대가 변하면서 전체모이기도 어려웠고 공연이 끝나고 나니 아쉬움이 남지요. 


채​희완: 길닦음 같은 경우도 무대에서의 이미지와 그 내용이 길을 헤치면서 가는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이를 ‘수도’라고까지 말씀하셨어요. 그런 내용이 그야말로 <천명>이란 큰 타이틀에 결정체인 것 같은데 그러한 몸마음의 닦음이란 수렴에서 조금 더 확산을 해서 무대의 메커니즘도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면 싶습니다. 


이애주: 그렇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적인 한계도 있고 같이 공동체로 완성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순결한 빛으로 빛나게 되게 말입니다. 그래서 공연 마지막에 중심으로 돌아앉으면서 집중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미완성인 것을 인정을 합니다. 


채​희완: 2부에 해당되는 것이 1974년 <땅끝>에서 1984년 <나눔굿>으로 1985년 <도라지 굿>으로 1987년 <바람맞이>로, 그리고,‘한밝춤’으로 진전해 오셨던 것의 총 종합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러기엔 아쉬운 면도 있습니다. 


이애주: 기획과 인쇄도 늦었고 막판에는 좌절도 했었어요. 역시 창조와 창작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고비를 넘기며 축적해서 잘 갈무리되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채​희완: 어렸을 때부터 춤 배우신 것의 이력도 듣고 또 여러 ‘풍물춤’, ‘탈춤’, ‘굿춤’, ‘의식춤’, ‘무예’에 해당되는 것, 각 지역의 ‘향토춤’ 들을 익히시면서 우리 춤의 본질과 양식적 특질을 몸으로 다 받으셨고요. 그것을 조근이 풀어내 주시면 우리가 공부하고 창작하는데 더없는 자료와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지만 긴 날을 두고, 제가 한 가지씩 여쭙고 싶어요. ‘도당굿’, ‘지노귀굿’, ‘씻김굿’, ‘별신굿’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굿춤’도 그렇고 ‘우도굿’, ‘좌도굿’, ‘웃다리풍물’, ‘농악12차’ 등 ‘풍물춤’, ‘산대놀이’, ‘탈춤 오광대’, 들놀음에 ‘동래학춤’, ‘검무’, ‘교예춤’, ‘교방춤’ 들, 과연 이땅에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신데요. 몸, 피와 땀으로 배우고 몸으로 삭혀 오신 여러 각가지 종목들이죠. 그런데 참으로 아쉽고 참담하기까지 한 것은 오늘 어느 대학 무용학과에서는 그런 종목을 배우는 것을 장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학과는 말리기까지도 한다는 군요. 이것은 너무나 비교육적인 처사이죠.

 

 

춤의 예술성이라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애주: 동감입니다. 앞으로 제 자신부터도 정리하며 타개해 나가야죠. 이번 공연의 평도 정 반대예요. 앞서 사회 역사를 생각하는 분들은 너무 감동적이었고 눈물을 흘렸다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마치 <변호인>(영화) 2탄을 보는 듯 무섭다고 한다고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변호인>이 천만관객을 넘는 상황, 우리가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뮌헨 다녀온 70년대 초에 무용계를 떠났지만, 아직도 그때와 같은 현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전통수련은 숨쉬듯이 하는 것이고, 또 춤꾼으로써 시대, 역사를 몸짓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데 서로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예전과 똑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문화재이면서 전통을 추고 시대춤을 추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죠. 제가 전통춤을 추지 않으면서 2부 같은 춤만을 추면 반응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세요, 연극이나 그림, 영화 등 타 예술분야에서는 더 극단적이고 극대화한 표현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왜 춤에서만 현시대 상황을 다루면 극단적인 반대의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채​희완: 그건 아마도 80년대에 현장에서 추신걸 보고 깊이 각인된 분들에겐 단순한 추억거리를 넘어 당당한 현재감으로 감명적으로 되살아오는데, 일부 춤계에서 그 춤을 본 사람 중에는 끔직한 춤의 기억으로 다가오는 이도 있을 테지요. 그리고 그들 중에는 신식민속춤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아예 춤으로도 보지 않았죠. 그런 인상을 지닌 사람은 춤이 가져야 할 본령의 예술성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또 다른 방식으로 춤을 활용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지요. 


이애주: 춤의 순수성, 예술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채​희완: 아직도 70년대식 신(新) 신무용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애주: 비평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채​희완: 아마 반쯤은 비평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을지 모릅니다. 가령 좋게 본다면, 정치면이나 사회면에서 춤을 다루게 돼서 춤의 기능과 영역을 확대한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다는 거지요. 이런 춤은 언론의 사회면에서나 다룰 일로 생각하는 거죠. 오히려 이건 어쩌면 제대로 본 것이라 할만도 합니다. 


이애주: 사실 첫날 2부 춤을 추면서도 많이 자제를 한 것입니다. 둘째 날은 좀 더 구성 있게 정리가 되었어요. 큰 실수 안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60년 이상을 춤춘 게 잘나서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내 존재가 역사에서 한 번 매듭짓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막바지고개에 섰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제가 나중 기록물을 보면 스스로 용납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더 다리 못쓰기 전에 부끄럽지만 한 것뿐입니다.

 

 

우리 춤의 현대성, 춤의 역사에서 현대시기로 들어와 있는 것인가

 

채​희완: 오늘은 선생님의 1974년 첫 발표회 <이애주 춤판, 땅끝>에서 하신 것, 84년도에 <나눔굿> 하신 것, 85년도에 <도라지꽃>, 87년 <바람맞이>, 그리고 87년 전후 시국춤으로 진혼무, 수많은 열사춤들, 노동자춤, 반공해춤, 평화맞이춤, 국토 터벌림춤, 현장에서의 정황들을 미쳐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이번 공연 중 2부 ‘터벌림 태평’의 오래된 주제이자, 줄기찬 춤 정신입니다. “역사가 나로 춤추게 한다”는 통열한 한 말씀은 오늘 대담에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한국근현대춤 역사의 긴급한 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성준, 한영숙 선생으로 이어지는 전통춤의 법통의 법통인 적통성과 함께 수많은 전통춤의 흔적으로 언어들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익히신 비의의 애기들도 듣고 싶고, 종목도 하나씩 특징도 훑어보아야겠네요. 다음에 날을 잡아서 선생님 춤의 67년 삶을 묻고 싶군요. 선생님이 어렸을 때 김보남 선생님이나 한영숙 선생님한테 배운 실체들은 아직 잘 안 알려져 있거든요. 


이애주: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초등학교 때 김보남 선생님이 계신 국악원에 가기 전에 동네 무용소를 다니면서 유랑공연을 여러 지방에 다닌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영희, 성금연 선생님등 이 춤반주를 하며 함께 다녔습니다. 후에 그분들이 대단한 명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행복해 했습니다. 춤시작을 최고 명인의 반주와 함께 했으니까요. 그 얘기를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습니다. 마치 남사당같이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면서 숙박비 식대를 못내서 여관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울고불고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대 여섯살 정도였는데 지영희, 성금연 선생님 반주에 맞추어 ‘초립동’을 추며 각광받았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채​희완: 다시 강조하건대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한국근현대춤의 역사의 한 줄거리를 정리하셔야겠습니다. 1차는 이렇게 대담 식으로 하면 되고요. 제가 선생님과 만난 것은 70년도 대학탈춤반에서인데 갓 올라온 촌놈이 서울에서 고향누님을 만난 듯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때 얘기도 하고 싶군요. 특히 1974년도 <땅끝>을 발표하시면서 팜플렛에 토로하신 그 글이 지금 보아도 섬뜩하고 소름이 끼쳐요. 그 때가 27세이셨잖아요. “지금의 춤판 현실에서 내가 이렇게 몸이 성한 것 자체가 소름끼친다”고 하였어요. 그 얘기부터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과연 오늘의 우리춤이 현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춤의 역사에서 과연 근현대시기로 들어와 있는 것인가. 그게 갈팡질팡인데 지금도 신무용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 춤의 역사에서 근대, 현대 시기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저의 비평적 과제입니다. 그래야 비평적 관점도 바로 서고, 그래야 오늘의 춤을 원하고 오늘의 춤을 보게 해주도록 부추기는 거죠. 그런 후 역사화 해야겠지요. 사회문화사를 토대로, 미학적으로 좋고 그른 점을 가려낼 것이 비평적 임무인데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땅끝>이나 <나눔굿>을 평가내릴 수는 없지만 선생님께서 얘기하시면 제가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맡기엔 벅찬 노릇이고 또 제대로 기록하기도 어렵기도 하구요. 

 

 

창작은 전통을 체득한 즉시 나오는 자유로운 몸짓

 

이애주: 얼마전 다른 대담을 할 때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기왕 수도, 수행 얘기가 나왔으니까. 춤은 전통적인 적통으로 정중지도(正中之道)의 중심을 가진 춤을 반복연습하며 수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통의 전통춤이냐 이것을 찾는 것은 어렵겠지만 자기 몫이죠. 저는 행복하게 한성준, 김보남, 한영숙 춤으로 중심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탈춤 인간문화재들, 그 밖의 무수한 명인들의 춤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니 체득이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수련으로 가면서 체득이 되고 수련을 하다보면 수행이 되는 거죠. 종교가나 명상가들만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춤쟁이들이 반복, 연습을 몇 십 년 하며 쌓아오면 그 자체가 연습이고 수행이 되는 거예요. 저는 공연과 연습이 나눠지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전통을 제대로 반복 수련하는 것을 모르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동작의 겉모습과 순서만 배우고 전통춤을 다 공부한 줄 알아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한다는 각오를 가지면 창작이라는 것은 전통을 체득한 즉시 나오는 자유로운 몸짓이 창작과 창조입니다. 나도 완전체득이 안되어 죽을 때까지 창작이라는 말을 감히 못 쓸것 같습니다. 전통에 온몸을 싣고 체득해 나가면서 만이 창조의 길을 걸어간다고 할 수 있겠죠. 요즘은 너무 쉽게 창작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요. 

 예컨대 제가 춤의 뿌리를 찾다가보니 스승이 고구려 벽화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구려춤’의 상징체계를 연구하면서 ‘고구려춤’중 춤무덤(무용총)에 나온 ‘소매춤’이 ‘승무’의 장삼놀림과 한맥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춤’의 뿌리를 찾다가 ‘영가무도(詠歌舞蹈)’를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음악의 뿌리도 되죠. 아기가 태어날 때도 엄마 뱃속에서 숨쉬고 소리 지르고 나오고, 옹알이 하며 젖 먹고 하듯이 ‘영가무도’가 소리와 몸짓이 어우러진 것입니다. 60년 이상 이 길을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화두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번 공연도 제가 연습한 과정을 그대로 끌어내온 것이죠. 공연 2부 마지막에 앉아서 중심으로 집중한 것 자체가 수행과정이고 요즈음 표현으로는 명상이나 참선이 되는 셈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은 모르고 서양식으로 바뀐 것을 다시 우리가 거꾸로 받아들이는 세상인데, 젊은 사람들이 생각을 잘 가지고 정리해 가길 바랍니다.

채​희완: 선생님 앞으로 무슨 공연 계획이 있으신지요.


이애주: 이번 공연했던 내용을 몇 번 더 펼치며 옹글게 빚어내고 싶습니다. 또 전통춤의 반주를 연주했던 명인들 그대로 음반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명인선생님들이 모두 이런 공연을 좀 자주 가져야겠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지난 10년 앞으로 10년 불 것을 다 불었다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맨손 맨몸으로 하는 게 아니니 답답하죠. 부산, 광주, 대구 등 여러 지역에 가서 펼쳐보고 싶습니다. 밥이나 먹으로 갑시다.(웃음) 


채​희완: 못 다한 말씀은 뒷날 넘기고, 밥과 함께 나오는 반찬을 안주로 삼기로 하지요. 갑오년, 역사의 말발굽소리 우렁찬 새해를 맞았습니다. 크신 춤꾼 세상 이루시길 빕니다.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