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 취재_ 미국 국립춤박물관 방문기(4)
큐레이터 이전에 아키비스트, 역사 이전에 기록부터
김채현_춤비평가

훌륭한 박물관은 탁월한 문화 역량으로부터 우수한 배움 공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상징한다. 국가나 개인이 박물관을 세우는 데는 그만한 가치를 전제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박물관은 안정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사실상 자리잡기 어렵다. 한국에서 공공박물관이 물리적 공간을 갖추기 시작한 때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참화, 빈국(貧國)의 상황을 벗어난 1970년대였다. 민간에서 박물관·미술관이 드문 드문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대개 그후의 일이다. 그런 중에서도 전형필 선생이 세운 간송미술관은 참으로 독보적이며, 전세계에 얼마든지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민간 박물관이다. 미국 국립춤박물관과 한국의 간송미술관은 서로 연계성이 없지만, 지난 2월 미국 국립춤박물관을 찾은 나의 심경은 우리의 간송미술관을 떠올리며 나름 위안을 갖곤 했다.


안목 있는 수집가는 곧 아키비스트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미’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은 전형필 선생은 1938년에 한국 최초 사설 박물관을 열었다. 보화각(葆華閣)이라는 이름의 이 박물관은 설립자 간송(澗松) 전형필의 호를 따라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1971년부터 소장품을 일반에 공개하였다. 2014년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전시장을 추가로 마련해서는 일반인들과의 접촉면을 한층 넓혔고, 이후 개구쟁이들까지 간송미술관을 알게 된 것 같다. 전국민의 박물관이다.




생전의 전형필 선생 ©간송미술관




 간송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지 등 엄청 막대한 자산을 일제강점기에 문화유산 유출에 맞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매입하는 데 거듭 쾌척했을 때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 ~ 30대였다. 그의 선구적인 안목과 의지가 결국 우리 문화를 보호하고 자존심을 지키며 더 나아가선 빛을 발하도록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겠는가.
 소장 규모가 방대하고 소장품의 가치 또한 절대적이어서 간송미술관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무리다. 간송미술관은 스스로 그림, 글씨, 도자, 전적, 석조물 등 문화재 전분야에 걸쳐 민족 문화의 복원과 계승에 필수적인, 실로 다양하고 방대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힌다.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하얀색 콘크리트 2층 집, 검결한 형상의 우람한 풍채로 자리잡은 간송미술관을 1970년대 중반에 방문했을 때는 소장품을 공개한 초기인 데에다 연구 작업이 진척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전형필이란 인물이나 미술관의 전모가 막연하게 소개되던 터였다. 이후 공개 전시와 연구가 축적되면서 미술관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는 사이에 간송미술관은 모두의 박물관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간송미술관의 옛 전경




 간송미술관은 일반에 공개를 준비하던 중에 민족미술연구소를 부설하였고 공개를 개시하던 1971년부터 연구지 〈간송미술〉을 해마다 두어 번 발간하였다. 〈간송미술〉은 매권마다 작은 연구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개인 사설 미술관도 드문 시절에 연구지를 발간하는 작업은 당시 청년 방문자였던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 미술관의 연구실장이던 최완수씨에게서 나는 한국미술사 강의를 수강한 적 있다. 그는 지금도 미술관의 민족미술연구소장으로 있는데, 청년기 이후 지금까지 50년 넘게 미술관을 지켜왔다. 간송미술관은 소장품을 단순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을 만큼 방대하였지만, 이 미술관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한 것은 그간의 연구 활동이나 주제별 전시 내용이 말해 주듯이 민족미술연구소와 같은 큐레이터 조직이다.
 박물관은 수집·보존·전시가 조화를 이루어야 존재할 수 있다. 수집·보존·전시 어느 것도 소홀히 될 수 없다지만 수집이 없다면 박물관은 아예 성립이 불가능하다. 간송의 수집 작업은 간송미술관에서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점은 일제강점기에 간송보다 훨씬 또는 더 유력한 우리 재력가·부호·거부가 수십 명 더 있었으나 간송처럼 행동한 사람은 오직 간송 한 사람뿐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간송의 안목과 의지가 이 박물관의 성립에 절대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기록이 곧 수집이었던 『조선왕조실록』의 진가

수집이 결정적이었던 또 다른 대표적 사례로 『조선왕조실록』이 들어진다. 사관(史官)들이 왕의 곁에서, 어전회의에서, 심지어는 편전에서 기록한 공식 행동들은 모두 자료 수집 활동으로 분류된다. 조선왕조 역대 왕의 치세 당시 자료로서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같은 기구의 『승정원일기』가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술 대상인 왕 자신의 열람을 금하고 왕정 전반을 세세하게 기록하며 기록자인 사관의 활동을 가급적 폭넓게 공인한 결과 『조선왕조실록』은 지금도 전세계가 공감하는 최고의 기록물(그랑 프리 중의 그랑 프리!)로 인정받는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관련 인조대 무인년간의 사초 ©국사편찬위원회




 20년 전 『조선왕조실록』번역본 CD가 출간되고 또 이를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자유롭게 활용하게 된 이후 국내의 조선시대 연구는 물론 교양서 출간이 한결 활기를 띤 것으로 관측된다. 이 모든 것은 사관(史官)들의 기록 활동, 즉 치밀한 행동과 그들이 귀양 등 신분의 위협을 무릅쓴 결기에 따른 기록 활동 덕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넘기는 누구인들 조선왕조가 감탄할 만한 공공 기록 국가였음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한국전쟁 참화를 겪고 독재정권을 견뎌야 했던 시대에 한국에서 공공 기록(과 기록 활동)은 금지·방치·왜곡·은닉·멸실·회피되기가 예사였다. 감탄할 만한 공공 기록 국가의 후예라는 말은 20세기초부터 무색해졌다. 공공 부문은 물론 민간과 개인 부문의 기록들도 무시되기 일쑤인 풍토는 우리 사회에 일종의 거대한 망각증을 조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풍조가 빚은 부작용은 공공성의 실종을 비롯하여 실로 막대하였다. 더욱이 기록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과연 역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령 존재한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일까.
 왕조 사회는 물론이고 무릇 공공의 체제를 갖추고 영위되는 사회에서는 응당 기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왕조 체제를 벗어난 현대사회에서 최고의 공공 기록 국가는, 생각건대, 미국이 손꼽힌다. 과연 그런가?


한국 현대사의 저장고, 내셔널 아카이브 II의 기록물들

주(州) 정부를 제외하고, 미국 연방 정부의 공공 기록물은 모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나라), 연방기록물센터, 전임 대통령 도서관으로 나뉘어 보존 관리된다. 이들 세 기구를 모두 합쳐 내셔널 아카이브라 통칭하며 모두 관리는 NARA에서 맡는다.
 먼저 전임 대통령 도서관은 1933년 퇴임한 후버 대통령 이후 모두 15명의 전임 대통령 재임시의 문건들을 소장하고 있다. 각 대통령들의 고향이나 연고지에 세워져 있어 그들의 기념관을 겸한다. 도서관 건립 비용은 대통령 측이 조달해야 하되, 관리는 NARA 측이 전담한다. 대통령 재임시의 문건들이 개인 사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관행을 확립한 사람은 F.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F. 루즈벨트대통령기념도서관 전경



F. 루즈벨트대통령기념도서관 열람실에 모여든 방문객들



F. 루즈벨트대통령기념도서관 자료 파일




 그리고 미국 연방기록물센터(FRC, 1950년 설립)는 연방 정부의 행정 문서를 보관하며 연방 정부 기관의 엄청난 문의 및 조회(연간 1500만 건 정도)에 대해 회신한다. 공직자 인사 파일은 물론 개인과 기업의 납세 명세, 법원에 접수한 파산신청서, 군 인사 기록, 여권 신청서, 국립공원 지도, 연방 교도소 재소자 신원 기록, 사회보장 신청서 등에 이르기까지 연방 정부의 행정 행위 관련 문건들을 보존 연한(기업 납세 명세는 75년 기한) 기준에 따라 보존한다. 미국 전역에 모두 17곳이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가 국립문서보관소, 연방기록물센터, 전임 대통령 도서관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내셔널 아카이브의 대표적 존재는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이다. 우선 FRC에서 보존연한이 끝난 보관 문서 가운데 독자적 권한을 가진 아키비스트의 선별 작업을 거쳐 1~3%(매년 1억 5천만 건 정도)만 NARA로 이관되어 25년간 공개된다. 이 기간 이후 해당 문건들은 다시 펜실베이니아주 소재 지하 보관소로 이관되어 영구 보존된다.




내셔널 아카이브 I 전경




 워싱턴의 NARA는 한국인들에게도 더러 알려져 있다. 간혹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후나 한국전쟁 시기를 증언하는 특정 문건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다고 국내에서 보도를 타는 것은 대개 NARA에서 발굴한 자료들이다. NARA는 1950년 이후의 미국 연방 정부 행정 기록물뿐만 아니라 2차대전 이후 주로 미국 국방부가 해외에서 수집한 기록 문건도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들의 활동, 당시 한반도의 정세와 주민 생활 등과 관련하여 미군들이 채집한 영상, 미군이 입수하거나 노획한 개인들의 우편물과 공문서, 그리고 정세 보고서 등등이 낱낱이 보존되어 있다. 당시의 기록이 부실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사정상 NARA에서 자료가 발굴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이들 자료를 모은 도서가 최근 국내에서 더러 출판된 바 있다. 그러는 와중에 이미 다른 이가 발굴한 줄 모르고 자기가 최초로 발굴했다 하여 간혹 오보(誤報)의 특종을 초래하는 웃픈 일도 생긴다.
 워싱턴의 NARA는 F. 루즈벨트 대통령 재임 때인 1935년에 워싱턴 D.C.에 세워졌다. 폭격에도 끄덕없는 방탄 건물이라 한다. 보관 자료가 늘어나서 1993년에 제2 건물을 워싱턴 D.C. 교외에 신축하였다. 먼저 세운 건물을 내셔널 아카이브 I, 나중 세운 건물을 내셔널 아카이브 II라 부른다. 내셔널 아카이브 I은 미국인들의 족보, 인디언 자료, 2차대전 이전 육해군 활동, 뉴딜 정책, 워싱턴, 전쟁 시기 문제, 법원 및 국회 등과 관련된 문서들을 관장하며, 미국 독립선언서, 미국 제헌헌법도 여기에 소장되어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전경



내셔널 아카이브 II 시그널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이 종종 찾아가는 곳은 워싱턴의 내셔널 아카이브 II이다. 국사편찬위에서도 이전에 여기를 집중 검색했다는 말도 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한국의 춤 자료들, 즉 희귀한 자료라기보다는 국내에 영상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쉬운 터에 그런 자료들이 여기서 발굴되면 여러 모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아카이브 II의 전모를 느끼려고 지난 2월 방문하였다. 워싱턴 D.C. 교외 칼리지 파크 지역에 위치해서 승용차 아니면 1시간 간격의 셔틀 버스를 이용해야 하므로 접근이 꽤 번거롭다. 하지만 내셔널 아카이브 II에 입장하고 나면 자료 천국이라 품을 들인 보람은 있을 것이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내부



내셔널 아카이브 II 동영상자료실



내셔널 아카이브 II 사진자료실




 관내 입장은 무료이되 열람증을 발급받아야 하며 검색이 철저하고 문서 보존 조치도 그러하다. 자료는 반드시 얇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다뤄야 한다. 필기류는 소지할 수 없고 관내 도처에 수북이 비치된 연필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노트북 컴퓨터, 플래쉬 없는 촬영(동영상 포함) 도구는 소지가 가능하다. 자료의 촬영은 물론, 스캔이나 복사 분량은 제한이 없으며 자부담이면 무한정 가능하다. 자료의 유출을 막기 위해 후드나 주머니가 달린 상의도 자료실 내에선 착용이 금지된다.
 복사나 스캔한 자료를 외부로 가져 나가려면 반드시 규격 파우치에 넣고 직원 입회 아래 잠금장치로 밀봉해서 출구로 가져간 다음 다른 직원이 파우치를 열어 자료를 꺼내서 전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관내의 자료를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신상과 사진은 관내 한 곳에 공개되어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관내에 입장한 후에 열람실에 반입이 금지된 개인 소지품을 여기서 보관해야 한다



(왼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영화 필름을 비롯 사진과 문서 등 모든 원본 자료를 조작하려면 고무장갑을 필히 끼어야 한다
(오른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관내에서 사용하도록 비치된 연필들



(왼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복사 스캔한 자료를 넣어 밀봉해서 출구로 가져가는 파우치
(오른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자료 유출 혐의로 유죄 판결 받은 사람들 공지판




 내셔널 아카이브 II에서 열람 가능한 자료는 모두 개가식으로 공개되므로 누구나 모든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 예컨대 해방 직후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좌우익 진영의 영상,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에서의 전투나 피난 영상, 학교 수업 장면, 아이들의 놀이 모습, 미군 측이 노획하거나 입수한 엄청 다양한 문건들, 미국 군사정보국이 한국인을 관찰하고 분석한 보고서, 미국 영사가 기록한 4월학생혁명의 날 현장 보고, 한국인들에게 다방이란 것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가에 대한 현장 보고 등등등 보충 자료로 활용할 것들이 눈에 띈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동영상 재생기



내셔널 아카이브 II 영화 필름 재생기



(왼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재생용으로 대출받은 필름 카트 (오른쪽) 내셔널 아카이브 II 재생용으로 대출받은 필름




 영상 자료 가운데는 필름을 DVD로 옮긴 것이 다수 있다. 그래도 영화 필름으로만 소장된 것은 복사본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며, 해당 영상 기기도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내셔널 아카이브 II에 보관된 한국 관련 자료들은 아직 그 전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을 만큼 방대해 보인다. 목록에 제목은 있으나 그 세부 내용이 정리되지 않은 기록물이 수두룩하고, 목록 제목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담은 기록물도 적지 않을 듯하다. 내셔널 아카이브 II에서 어떤 자료들은 지금도 한국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국 관련 자료들뿐 아니라 내셔널 아카이브 I, II에 소장된 90억 장의 문건 가운데 아직 2억 장은 열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있고, 전체 문건의 인터넷 검색 목록화 작업은 70% 정도 진척된 상태라 한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재생된 한반도 필름 화면




 전문 아키비스트에게 희망하는 자료를 상의하면 최대한 도움을 친절하게 받을 수 있다. 또한 내셔널 아카이브 II에는 구내 레스토랑도 잘 갖춰져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집단 조사자들이 팀을 이루어 조사 작업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는 모습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이른 아침부터 식사가 저렴하게 제공되어 불편함은 없어 보인다. 내셔널 아카이브 II에 입장하면 조사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사 연구자들에게 가급적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자료를 소중하게 다루고 최대한 가치 있게 활용할 마음을 더 부추길 것 같다.




내셔널 아카이브 II 구내 레스토랑




역사는 기록에서 시작한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대통령 직속 기구로서 독립성이 보장된다. 내셔널 아카이브에서는 누구에게든 자료를 평등하게 제공하고 능력껏 이용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완연하다. 자료는 활용되기 위해 있느니 만치 활용을 적극 권장하고 시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 결과 내셔널 아카이브는 명실상부하게 ‘살아 있는’ 아카이브로서 존속하고 있다. 이쯤이면 현대국가 미국이 기록과 자료를 어느 정도 숭상하는지 짐작될 것이고, 기록과 자료를 왜 숭상하는지 자문해볼 필요도 있다. 단적으로, 기록과 자료는 진실 규명, 연구 심화, 발전 선도 면에서 일파만파의 효력을 가지며 분야에 따라서는 그 분야를 일으키는 촉진제 구실도 할 것이다.
 세상사는 자료와 기록을 낳는다. 자료와 기록이 없다면 세상사는 머릿속 기억으로나 전승될 것이다. 그런 기억은 언젠가 사라진다. 자료와 기록이 없다면 세상사는 언젠가 사라진다. 즉, 역사는 소멸할 것이다. 자료와 기록이 역사는 아니며, 자료와 기록에서 역사는 존재할 근거(즉, 단초)를 가질 뿐이다. 자료와 기록을 다루는 역사가(歷史家) 없이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재론하건대, 박물관은 수집·보존·전시가 조화를 이루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춤 관련 수집·보존 활동이 싹트는 듯하다. 긍정적인 조짐이다. 기왕 내딛는 걸음들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미국 국립춤박물관 방문기사가 참조가 되었기를 기대한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 ​​ 

2019. 07.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