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트프로젝트보라 〈소무〉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몸의 대화
방희망_춤비평가

 11월 한 달간 연이어 대학로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9편의 2015 무용창작산실 우수작품 중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작품은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소무〉(11월 19-20일, 대학로예술극장대극장, 평자 19일 관람)였다.
 안무가 김보라는 그동안 〈혼잣말〉〈각시〉〈Thank You〉 등의 작품 속에서 섬세하게 포착해낸 감정의 결을 복합적인 은유로 감싸 안아 전달하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턱없이 과장되지 않게 개성과 위트를 담은 세련된 안무도 보기에 부담이 없다.
 이번 〈소무〉는 다소 톰보이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김보라가 성숙한 여성으로 발돋움하여 만들어낸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이라 할 만 했다. 공연 전 인터뷰와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여성의 몸을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다루고자 한다고 밝혔다. 여성의 성기에 대한 재해석을 언급했기에 상당히 도발적인 작품이 될 수도 있으리라 예상했다.




 얕은 튜브를 깔아 물을 채운 무대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낮고 둔중한 소리가 혼합되면서 시작된 첫 장면은 익숙한 심상들을 낯설고 새롭게 만들어 주의를 환기시킨다. 크게 열린 동굴과 같던 무대는 인공위성이나 탐사 기계처럼 생긴 오브제들이 늘어뜨려지면서 이계(異界)에 불시착한 느낌을 주었다. 이 길쭉하게 생긴 오브제들은 금속의 차가운 물성으로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을 지닌 무용수들의 실루엣과 대비된다. 이렇게 나열된 이미지들은 페미니즘 관점에서 익히 해석된 영화 〈에일리언〉을 생각나게도 한다.
 오브제에는 현악기들처럼 줄이 매어져 있었지만 활용되는 바가 전혀 없이 무대에서 사라졌고, 대신 무용수들은 등에 브릿지를 달고 고무줄을 가터벨트처럼 착용하고 움직였다. 원래 여성의 몸은 둥그렇게 흘러내리는 곡선 때문에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현악기에 비유되어 왔기도 하지만(만 레이의 〈바이올린〉), 사랑의 행위에서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졌을 때에만 날 수 있는 여성의 은밀한 소리가 훌륭한 연주자가 악기를 다룰 때와 비슷하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에로티시즘의 한 코드였다.
 악기는 그것을 연주해주는 주인 없이는 그저 사물에 불과하므로 자칫하면 이런 관점이 오히려 여성의 몸과 성을 수동적인 입장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상대(남자)가 없이는 성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김보라는 그 함정을 일부러 피해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이 공연 중 유일한 남성 무용수 기무간과 이지윤을 등장시킨 두 번째 씬에서 그녀의 솔로 작품 〈각시〉에서 선보였던 부채와 큰 절 동작의 소스를 가져와 2인무로 배분하고 확장했다. 그럼으로써 〈각시〉의 고즈넉한 애처로움은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야기로 다가온다(평자는 첫날밤 신랑에게 버림받고서 순박하게 기다린 여인의 이야기, 서정주의 〈신부〉를 떠올렸다). 위협적인 조의 전자음과 함께 등장한 남자는 덮어쓴 고깔과 겉옷을 벗지 않은 채 신체적 접촉 하나 없이 부채 끝으로 여인을 조종하며 건드리다 떠나가는데, 이후 펼쳐지는 것은 오롯이 여성들만으로도 완전한 세계이다.
 물동이를 이고 나온 것처럼 걸으며 발끝으로 물을 잘박거리는 유쾌함. 신윤복의 그림에서 여인들이 냇가에 나와 다리를 벌리고 주저앉아 대담하게 관능적인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무대는 여성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큰 절을 한 채 수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이는 동작은 자위행위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등 쪽에 달려있는 줄을 이용해 그것이 최대한 늘어나도록 허락된 범주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팔 다리의 동작들은 여성이 여성 스스로 몸을 연주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마치 현을 뜯을 때의 공명이 몸 전체를 전율시키며 퍼져나가듯 안무는 그렇게 짜였다. 도발적인 눈빛과 에너지가 꽉 찬 동작으로 시작부터 시선을 사로잡았던 양지연을 필두로 박상미, 정주령, 이주미, 이지윤 다섯 여성무용수들의 후반부 군무는 각자의 개성과 안무에 대한 이해대로 진행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었다.




 공연 중간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 다리를 붙이고 뒤돌아선 채 앞으로 숙여 만드는 실루엣은 김보라가 제시하는 여성 성기의 새로운 이미지 같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몸 전체가 성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이라는 뜻도 될 테고, 무용수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자산인 두 다리가 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성기를 대신하는 의미를 지녔다는 뜻도 될 것이다.

 김보라의 이번 작품 〈소무〉는 그녀가 갖고 있는 장기를 꾸준히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모던한 오브제를 대비시켜 따뜻한 인간성을 부각시키는 용도로 적절히 사용하는 방식은 〈Thank You〉와 이어지고, 토속적인 소스를 현대무용에 끌어들이는 아이디어와 정서는 〈각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였다. 신비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 경쾌한 완급을 불어넣었던 김재덕의 음악과 적삼과 속곳, 고쟁이와 드로어즈를 혼합해 시크하면서 사랑스럽게 만들어낸 의상도 김보라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탁월하게 기여했다.

2015. 12.
사진제공_김근우/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