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제3회 강동스프링댄스페스티벌 학술행사 - 발제문(1)
‘춤 축제’ 거듭나기 - 춤추는 人間과 춤추는 空間 (일탈, 공동체, 몸·경험)
이지현_춤비평가

 1. 컨템포러리 주체과 축제

 당신의 몸은 안녕하신가? 우리는 먼저 자고 일어나면 그것을 물어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밤새 무사하지 못한 몸들의 뉴스가 넘쳐난다. 내 몸이 내 것인 줄 알고 사는 것은 이미 순진을 넘어 무지에 가까운 착각이다. 푸코가 오래 전 말한 대로 몸은 일상적인 관습과 권력조직의 연결고리 이기에 권력은 몸을 통해 행사되며 세상의 담론이 내 몸을 통제한다. 말하자면 내 몸은 이미 이 사회의 권력이 원하는 기준에 의해 통제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외모와 건강에 대한 선택의 방향성을 지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문명을 창조하는 인간주체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인 욕망의 주체가 되는 과정은 에고를 상징적 질서에 편입시키면서 진행되는데, 현대의 에고는 상징적 질서의 부재(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짐으로 인해)와 그를 대체한 자본주의의 상품화된 이미지 속에서 진정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궁핍하고, 강박적이며, 도착증적인 주체가 되고 만다. 그런 주체는 자신의 몸을 상품의 논리에 맡기게 되도록 수동화되고 폭력에 노출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몸을 아무렇게나 자르고 붙일 수 있는 조형의 대상으로 보고 성형과 헬스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이미지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저변에는 몸을 자본의 한 형태로 보아 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도록 육체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커다란 자본주의 욕구가 관통하고 있다.
 이런 체제는 개인을 개별로 분리시키기는 했으나 몰이데올로기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개인들을 양산했다. 시각매체의 홍수를 통한 이미지 과잉, 그것도 능동성이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스펙타클’ 이미지 사회의 압도 속에서 개인은 투사된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 하게 되면서 이미지의 노예가 되어간다. 그 개인들이 부여잡는 것이 바로 ‘몸’이다. 그들은 예전과 달리 교회나 도서관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던 시간을 이제는 헬스클럽으로 옮겨 그곳에서 몸을 바꾸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성형, 다이어트와 화장품, 외모 가꾸기에 과도한 시간과 경제적 투자를 서슴지 않으며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는 자신을 말리기 어렵다고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몸을 몸답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테크놀로지 사회이다. 최첨단으로 기계화되고 컴퓨터화 된 세상에서 필요한 신체부위는 손가락을 포함한 팔 부분이고, 손가락의 클릭으로 가상 세계를 만들고 허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손가락 이외의 나머지 몸은 잉여이고, 점차 몸의 기능과 지능은 상실되어 간다. 또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몸의 부분을 기계화시켜 몸의 기능을 더 월등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편의를 위해 필요한 다리 한쪽, 눈 한알 등 얼마든지 교체하고 부담 없이 갈아 끼울 수 있는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몸은 현대사회에서 이런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내 몸은 권력과 자본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고 나의 고유성과 나의 결정권이 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욕구를 중심으로 볼 때 동시대의 문화 주체의 상태는 어떠한가?
 근대의 주체는 정신적으로 합리적이고, 육체적으로 금욕적이고 근면한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으로 제시되었고 이를 위해 계몽과 훈육은 필수적이었다. 이후 20세기 들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부상으로부터, 역사적 페미니즘의 ‘젠더’, 반인종주의의 ‘인종’ 등 새로운 주체의 부상을 통해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다양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여러 차원의 정체성이 중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보편적 인간에 대한 더 이상의 고민이나 질문은 사라지게 되었다. 인간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로 사유의 반경은 더 좁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을 스스로 찾아갈 수 밖에 없는 동시대의 문화주체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다양하고 중첩된 정체성을 토대로 공감하고 소통할 문화 생산물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움직임은 자발적이고, 욕망은 미시적이며 그 결과 그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게 된다. 이 공동체는 다양한 공동체로부터 충족 받아야 하는 주체들의 특성상 과거 어느 공동체 보다 머무는 시간이 짧으며, 유지되는 시간 역시 짧은 특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현상을 조금 떨어져서 보면 수많은 개인들이 빠른 흐름의 속도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결의 흐름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동시대 주체의 심리적 상황에서 그들이 문화와 예술을 통해 충족 받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그들은 당연히 일방적으로 충족 받길 원하는 수동적인 주체는 이미 아니라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신들의 미시적 욕망의 이합집산이 엄청난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욕망이 주인이 되어 충족을 자극하는 자신들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에 잠시 공감하다 떠나며, 그 욕구를 체감하는 예술가 역시 보편적 진리보다는 자신의 욕구에서 충실한 예술을 하면서 개인적이고 사소한 미시적 욕구에 초점을 맞춘 예술품들을 생산하여 공감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과거까지 가능했던 절대적 지지, 다수의 보편적 지지는 점차 보기 드문 일이 되고 예술계의 모습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작은 공감의 다양한 집합체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주체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 보자. 그들은 자신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을 가지면서 다양한 욕구를 충족해야 하는 운명을 직감할 것이다. 그래서 분주해지는 반면 어느 곳에서 정착하여 오래 머물 수 없음에 파고드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외로움은 보상받기 위해 ‘연대감’과 ‘공동체’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을 더 키울 것이다. 또 하나 그들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부유하고 유랑하는 주체라는 인식은 ‘친밀함’과 ‘애착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축제가 일탈을 통해 욕구와 현실의 조정을 찾아내는 문화적 장치라고 본다면 이런 상태의 주체가 자신의 갈망을 풀어 놓을 場인 ‘동시대의 축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고대의 축제는 일탈과 조응을 통해 우주의 질서에 대한 의식을 형성시키는 기능을 했다면, 중세에는 신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탈출구 역할을 했으며 근대에 들어 일상의 중심은 신에게서 인간으로 대체되어 갔다. 근대 시민사회의 축제는 노동과 휴식의 두 축을 신성하게 지켜주며 가족중심을 세우는 데 기여하도록 짜여졌으며 이를 위해 축제를 준비하는 역할이 아버지에게 주어졌다. 축제는 시민사회의 규율을 익히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사회통합적 기능을 수행했고 어느 정도의 일탈과 규범으로 다시 정상상태를 회복하는 ‘조절장치’ 같은 것을 내재화 하였다.1
 정서적 억압이 어느 때보다 강했던 중세를 중심으로 축제의 정서적 기능을 보면, 중세의 축제 카니발은 억압상태에 있는 계층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카니발의 이런 해방적 성격은 축제를 더욱 의미 있게 했다. 축제가 일탈과 해방의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고 해도 이는 물론 축제를 준비하고 목적을 정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복무할 지 그것에 저항하는 데 쓰일지는 달라지는 것이지만, 터너가 말했듯이2 의례는 기술적으로 단순한 사회이든, 복합적인 사회이든 ‘분리-일탈(liminal)-재통합’의 3단계의 구조는 공통적으로 갖게 된다. 분리의 단계에서 일상적 시공간으로 부터의 분리가 일어나고, 신성성 혹은 유희성에 근거한 어떤 소통이 의례적 단계에서 일어나며 이후 세속적 일상으로 회귀라는 재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근대적 이성과 기능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축제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가장 정리된 의견은 이렇다. 축제의 의미는 민족적, 종교적 차원에서 유희적 차원으로 축소된 점, 다른 한편으로 일상의 축제화, 일상의 비일상화가 지적된다. 일상의 축제화는 축제 때 입었던 옷과 장식들이 일상의 옷이 되었고, 축제 때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이젠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전의 축제가 정해진 의식 속에서 금지를 넘어서는 일탈을 허용하는 것이었다면 현대에는 퍼포먼스나 해프닝을 일상에서 쉽게 만나게 되면서 일상과 일탈은 혼재되어 버렸다. 축제의 주제와 형태가 다양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상의 축제화가 일어나면서 축제와 일상은 평준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축제의 주체는 집단적 차원의 시민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시민이다. 개인적 차원의 시민주체들이 자신의 공동체, 공감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는 굳이 축제처럼 특화된 시공간일 필요는 점차 줄어들고 예전에 비해 일상에서 쉽게 구입하거나 접촉할 수 있는 약화된 축제성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일상과 축제가 영역 구분이 모호해져 축제요소가 일상으로 들어오고 일상이 축제만큼 환상적인 것이 된다고 해도 축제에서 충족되던 일탈과 재생, 부활의 전격적인 존재 변형의 체험이 일상에서 충족될 수 있을까?



 2. 춤추는 인간과 그 공간

 앞의 질문을 남긴 채 동시대적인 주체의 상태와 축제의 상황을 둘러봤다면, 이제 보다 범위를 좁혀 춤의 근원적인 것을 살펴보자. 이는 미래 춤축제의 의미와 기능을 예감하는 데 필요할 것이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관점에서 모든 춤이 놀이의 특질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춤은 항상 모든 시기 모든 사람들에게 순수한 놀이였다. 인류초기의 원무(circle dance), 그리스 의례의 집단무 코랄(choral), 그리고 궁정발레에서 집단적으로 상징적 문양을 만들면서 췄던 피겨 댄스(figure dance) 등은 특히 이런 놀이의 요소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집단무이다. 어원적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놀이를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크리다티(kridati)로부터 왔는데 이는 동물, 어린아이, 어른들의 놀이를 가리키는 동시에 바람이나 파도의 움직임을 지칭하기도 하고 깡총 뛰어 오르기, 건너뛰기 등 반드시 놀이와 결부되는 것은 아닌 일반적인 춤추기까지 포함하는 단어이다.3
 춤이 놀이와 밀접하다면 당연히 춤은 축제와 의례의 중심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춤이 모든 예술의 어머니라는 언술은 현재 모든 예술적 행위의 모태인 의례(ritual)가 문명과 거리가 멀수록 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몸으로 지각하고, 경험한 사건과 사물에 대해 인간은 그것을 다시 몸으로 기억해내고 재현하는 것을 통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집단의 지혜로 압축시킨다. 이 과정과 결과가 춤으로 하는 놀이이고, 의례이다.
 그 외에 또 하나 춤의 중요한 특성으로 인해 의례와 축제가 강력해지는 부분은 춤을 통해 황홀경(ecstasy)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일탈을 보장해주는 부분으로 환희와 즐거움을 넘어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춤의 세계에 들어 감으로써 자신은 해체되고 더 큰 우주의 질서에 속하는 경험이다. 춤을 통한 ‘일탈의 황홀경’은 몸과 마음 모두에서 일어남으로써 다른 일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 된다. 시간과 공간, 중력, 몸과 마음 모든 분면에서 일상의 자신은 완전히 잊혀지게 되고 며칠을 이어지던 황홀경(일탈)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자신과 일상 모두가 변해있는 마법(재통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적 일탈과 광기의 춤 그리스 마에나드의 춤을 보자. 그리스 여성들은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정령들의 소리에 이끌려 자기의 집을 떠나 황야의 눈덮인 산을 멈추지 않고 올라간다. 그리고 도취된 상태에서 여러 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함을 지른다. 그들이 바로 마에나드(maenad, 그리스 신화의 박카스를 섬기는 여자), 즉 미친 여자들이다. 이들의 춤은 수 백 개의 도자기와 부조에 새겨져 있는데 미친 듯이 뛰고 빙빙 돌고 발을 굴러대는 요란한 모습들로 묘사된다. 구경꾼들 역시 짐승이 된 사람들의 광기를 통해 춤의 엑스타시를 체험한다. 그들은 갈기갈기 찢어버린 새끼 염소를 원반처럼 공중에 던지고 군무를 추면서 탈속한 성자의 환희경에 까지 이르러 현세를 잊게 된다.
 마에나드들이 주신(酒神) 박카스 준비를 위해 춘 춤은 반인반수의 호색한 사티로소처럼 긴 수염과 꼬리 그리고 음경 등으로 분장한 채 술에 취해 오보에와 자극적인 딸랑이 반주에 맞춰 춤의 엑스타시 상태로 신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게 되는 과정이었고, 이 박카스 축제가 나중에 근대의 카니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에나드 춤의 리더는 광기와 성적 일탈을 통해 주신(酒神)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재창조 해낸다.
 특히 마에나드에서 주목할 것은 춤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나중에 이 축제가 카니발로 된 배경에는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카루스 나발리스 (carus navalis)라는 바퀴 달린 배에서 온 것으로, 그리스에서는 주신(酒神) 찬가를 부르던 합창대와 춤의 지도자를 태우는 데 사용된 이동수단이자 이동무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모든 행위가 카루스 나발리스 위에서 벌어졌다.4
 호모 루덴스에서 다뤄 졌듯이,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일상생활로부터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환경으로부터 격리는 놀이의 중요한 전제가 되는데 이를 위해 물질적, 정신적 폐쇄공간이 마련된다. 이 공간 안에서 놀이가 진행되고 그 안에서는 일정한 규칙이 지배한다. 성스러운 공간, 일탈의 공간 역시도 마찬가지다. 주술이든, 의례든 이런 공간 확보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격리와 단절을 보장해준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마에나드의 황야의 눈덮힌 산이나 카루스 나발리스 그리고 원무의 공간이었던 마을의 중심지, 코랄의 그리스 극장무대, 피겨댄스의 궁정 거리 등의 공간은 일탈의 춤을 통해 창출된 새로운 공간으로 의례와 축제의 공간으로 재탄생 된 것들이다.



 3. 미래의 춤 축제 - 결핍의 역동

 이제 그간의 몇 가지 질문들을 정리하고 미래의 춤축제를 위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일상의 축제화’에서 남겨진 질문, 일상이 축제만큼 환상적인 것이 된다고 해도 축제에서 충족되던 일탈과 재생, 부활의 전격적인 존재 변형의 체험이 일상에서 충족될 수 있을까의 문제는 미래 춤축제가 가장 고민해야 할 주제이다. 춤이 가진 가장 특징적인 힘과 관련된 이 주제는 축제의 일반적인 성격의 논의와 춤축제가 분리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동시대 축제가 공연, 해프닝, 미적인 것의 풍요 속에서 많은 것들이 충족되기에 일탈과 재생의 구조를 벗어날 수 있다 해도, 춤 축제의 결핍된 특성이 동시대 축제에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에 미래에는 더욱 주목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게다가 현대 주체들이 일탈과 재생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완벽하게 충족되고 있느냐를 가늠해 볼 때, 몸이 처한 여러 환경 속에서 오히려 그것은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광신도들처럼 현대적 폭력 앞에 아우성 치고 있는 듯 보인다.
 다음으로는 춤축제에서 충족될만한 주제는 공동체(community) 주제이다. 동시대 주체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패턴에 근거해, 주체의 창조와 공감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공동체 주제이다. 이른바 커뮤니티 댄스가 출현하고 그 향방이 묘연한 이 때에 다양한 주체들의 의식과 정서를 담아내는 다양한 공동체가 춤으로 문화적 욕구를 풀어내고 춤으로 담아내고 그것을 축제와 연결시켜 일탈과 재생의 구조를 실현해 낸다면, 이는 축제의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될 ‘참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적극적인 창조와 공감의 주체들의 공동체는 미래의 춤축제에서 탄생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새롭게 고려되어야 할 주제는 몸∙경험이다. 이 주제는 춤과 직접 관련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미래 관점에서 보자면 춤 영역에서 빨리 주제로 편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몸은 춤의 근간이다. 동시대 몸이 처한 환경과 상태에서 봤을 때 몸을 실용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권력 유지의 규범들이 기생하는 장소로 제공할 수 밖에 없는 속에서 이데올로기화된 이미지에 현대 주체들은 몸을 변형시켜야 하는 압박 속에 피흘리고 있고 그것은 몸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필요로 한다. 마치 단일한 ‘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는 현대의 담론은 몸이 외적인 형태에 있다고 말하지만 몸은 실은 객관적으로 구축된 실체이기 보다는 현상적으로 경험된 감각의 총합에 가깝다. 몸의 생생한 경험, 즉 경험, 경험의 기술과 공유를 통해 몸자체의 지각력을 한층 성장시키는 것이 공격적인 동시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시각으로 구축된 객관적인 몸은 이데올로기에 취약할 수 밖에 없기에 그 전에 몸의 토대가 몸의 경험에 있음을 상기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기획이 필요하다. 물론 춤은 몸의 경험에 깊이 의존하는 형식이고, 다시 몸에게 강력한 체험을 주는 형식이다. 춤을 분화된 장르에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몸의 경험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어떤 것으로 다시 고려한다면 춤은 더 다양하고 새로워 질 것이고 관념에서 벗어나고 소통하기 더 쉬워 질 것이다.
 거칠게 다뤄진 위의 3가지 주제는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관객에게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지금의 춤축제가 거듭나기 위해 다각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3가지의 주제가 춤축제를 통해 고려된다면 새로운 춤과 새로운 공간, 그라고 새로운 춤축제의 현장이 창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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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동열. 축제와 일상. 축제와 문화적 본질.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2. 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이기우, 김익두 역. (서울: 현대미학사, 1996)
3. 요한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이종인 역. (연암서가, 2010)
4. 쿠르트 작스. 세계무용사. 김매자 역. (도서출판 풀빛, 1982)  

이지현
서울예고,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
이화여대 석사 (미국 현대무용사 전공)
이화여대 박사 (춤심리학, 동작분석 전공)

2014.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