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공일차원〉
디지털과 맞닥뜨린 몸의 한계 혹은 우월함
방희망_춤비평가

 지난해 메르스가 대한민국을 관통하던 기간에 무대에 올랐던 국립현대무용단 안애순 예술감독의 두 번째 신작 〈공일차원〉이 재공연되었다(5월 13-15일, 예술의전당CJ토월극장, 평자 15일 관람). 작년 공연을 관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달라진 내용을 리뷰에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이 작품의 시각연출을 맡은 영화감독 박찬경은 작품제목이 ‘일차원’과 0,1신호를 결합한 것이라고 밝혔다.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지만 우리 현실에서 치열한 경쟁과 노동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어 단순한 문화에 머무르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무가가 드라마투르기와 나눈 대화내용을 통해 가상세계 속 아날로그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로 ‘몸’을 설정하면서, 이번 작업이 디지털과 맞닥뜨린 몸의 한계 혹은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공일차원〉은 ‘레트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표방하였듯 전반적으로 옛날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많았다. 외계 행성을 연상시키는 배경에 고전적인 붉은 극장 커튼을 드리운 것은 〈록키 호러 픽쳐 쇼〉(1975)가 생각나고, 쇠망치를 내려치는 장면은 원숭이가 뼈다귀를 도구로 사용하다 우주로 날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떠오른다. 쇠망치 장면은 저 옛날 미국에서 증기 드릴에 대항해 인간의 힘을 보여주다 사망한 ‘강철 사나이 존 헨리’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오프닝 음악이 같은 패턴으로 두 번 더 반복되면서 크게 세 장으로 구분되었다고 짐작된 〈공일차원〉은 아날로그의 대표 격인 몸을 노동, 게임을 통한 놀이, 춤의 세 가지 상황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용수들이 로봇처럼 팔과 다리를 직각으로 세워 움직이거나, 힘없이 쓰러져 건조한 분위기를 풍긴 ‘노동’ 파트, 게임과 영화의 히어로 캐릭터를 등장시켰지만 마치 피규어를 움직이는 것처럼 아기자기하게 처리한 ‘놀이’파트는 그다지 구별되는 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앞에서 제시한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대안으로서의 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체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보다 선을 뒤트는 방향으로 과밀하게 짜인 춤은 무용수들의 몸이 원하는 자연스러움을 누르는 것처럼 보였으며 앞서 제시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만 받게 되었다.


 



 얼마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한 차례 큰 충격을 남겼던 만큼, 〈공일차원〉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시도가 될 수 있었지만 장치의 다채로움에 비해 결과적으로 그렇게 큰 울림을 남기지는 못했다. 우선 여기서 시도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개념 대비가 과연 적절히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조적인 상황이 안무가에게 크게 다가왔는지 몰라도 막상 무대 위에 구현된 모습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환경,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의 이미지가 압도적이어서 일단은 그저 디지털 시대의 위기 상황을 70분 넘게 재생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그것은 ‘경고’로 읽히기보다는 오히려 ‘동경’이나 ‘선망’으로 비춰졌다. 어떤 스타일이 시종일관 반복될 경우 비판을 위한 요소로 도입했다기보다 그것을 선호해서 사용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일차원〉에서 불러들인 6,70년대 영화와 게임 캐릭터가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옛 SF영화들은 요즘의 것에 비해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무대라는 원래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환경에 그 이미지가 놓이면 상대적으로 인공적인 느낌이 되어 비아날로그적인 노선을 취하게 된다.


 



 한편 마블 코믹스의 손맛 담긴 캐릭터들조차 디지털의 옷을 갈아입고 새로 태어나는 상황에서 그 소재들은 이미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 하는 경계선을 넘어섰다고 생각하게 된다. 시각연출의 의도대로 그것들이 이 작품을 ‘낯설고 먼 세상 이야기’처럼 보이도록 조장하기에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친숙하게 즐길 거리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관객들은 시각연출과 안무가가 과연 디지털화한 세상을 비판하려는 것인지, 아날로그라는 몸을 가지고 과연 아날로그로 의식하고 있었는지 주제의식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비교적 명확한 ‘디지털’이라는 개념에 비해 ‘아날로그’라는 단어는 문자적 의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맥락에 따라 다변하는 상황을 창작자들 스스로가 간과한 것 아닌가 싶다.
 사실 아날로그의 상징으로 위치시킨 인간의 ‘몸’조차도 A,G,T,C 네 가지 염기의 조합일 뿐이라는 지극히 공학적인 관점까지 고려한다면 애초부터 구성 원리에 불과한 ‘디지털’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고 출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주제를 수렴해내는데 있어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학구적인 시도들이, 몸이 주체가 되는 춤보다 추상적인 이론을 앞세우면서 장치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을 남긴다. 국립단체이기에 규모 있는 실험을 감행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겠지만, 한 편의 공연에서 시각적인 효과에만 노력을 쏟기보다는 연작 형태로 주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보다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16. 06.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