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현태 〈노인과 바다〉, 이태상 〈게르니카〉
고양된 정신, 춤의 실천
권옥희_춤비평가

 이미 유명한 예술작품의 제목을 끌어다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삼을 때, 그것이 자신을 성찰하는 춤이건(〈노인과 바다〉) 전쟁의 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건(〈게르니카〉) 안무가들은 제목에서 자신의 춤 의도가 잘 드러나는데 그 목적을 뒀을 것이다. 안무가에게 이보다 더 큰 야심은 없다. 대구와 부산을 무대로 활동 중인 중견작가 김현태와 이태상의 신작을 본다.




 김현태의 〈노인과 바다〉 (9월 4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자신을 소진하는 창작의 시간과 홀로 바다에서 고투하는 ‘노인’의 시간, 닮았다. 하여 김현태가 자신을 ‘노인’의 입장에 놓아보는 경험을 통해 공감과 연대의 춤,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춤이 깊어진 이유이기도.


 



 해체된 배, 뼈만 남은 물고기의 잔해로 보이는 무대장치가 공중에 걸려있는 무대, 두 남자(김현태, 서상재) 앉아있다. 오케스트라 박스를 타고 올라오는 김정미. 바다의 일렁임을 무대크기만한 크기의 천으로 그려낸다. 바다에 발목 잡힌 세 명, 바다를(천을) 호리존으로 말아 붙인다.
 이어 파도처럼 달려 나오는 군무진의 춤. 공중에 걸려있던 배의 골조가 조각조각 분해되고 그 가운데 섞이는 춤. 파도가 이는 바다 풍경을 힘 있는 춤과 감각적인 무대장치로 잘 그려낸 장.
 비워진 무대, 그물로 보이는 길고 무거워 보이는 천을 목에 두른 뒤, 한 자락을 오른팔에 걸고 나오는 안무자(김현태, 정길무용단대표). 살풀이 천인 양, 휘감아 던지고 뿌리며 춤을 추니 객석에 이는 정적. 접어 든 천자락을 어깨에 척 얹으니, 툭하고 떨어지는 상체의 호흡. 삶의 무게. 객석 쪽을 향해 던진 천, 오케스트라박스 아래로 떨어진다. 자락을 잡은 채 천천히 올라오는 서상재. 김현태와 마주선다. 노인의 낚시에 걸린 큰 청새치거나, 상어. 혹은 김현태의 자아이기도. 내면과의 대면.


 



 끝자락을 잡고 서로 힘을 겨루듯, 춤을 춘다. 부피감이 있는 천의 두께가 두 남자의 움직임에 고스란히 입혀지는 춤. 가까이 달려들었다가 다시 멀리 멀어지고 돌아 휘몰아치는 서상재의 춤, 높은 파도(상어) 같다. 이에 묵묵히 맞서는 깊은 바다 속 같이 에너지를 모은 김현태의 춤. 노인이 상어와 고투한 시간처럼, 길어지는 춤. 춤이 느슨해지는가 싶은 순간 서상재가 김현태를 잡아챈다. 말아 쥐고 있던 천을 쓰러진 김현태의 몸 위에다 던진다. 그리고 추는 서상재의 솔로, 좋은 춤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윽고 김현태(노인)의 등을 딛고 올라서는 서상재(상어). 마치 승리했다는 듯. 좋은 장이었다.
 앙상한 뼈만 남은 황폐함의 구체성과 형이상학을 동시에 떠맡은 죽음, 혹은 거울처럼 마주보는 고양된 정신이라는 두 세계가 있으며, 그리고 포만한 정신에게 틈새를 내어줄 듯 늘어지는 춤을 다 잡아채는 리듬이 있었다. 이 정신과 리듬이 또한 서로를(자아) 비추는 거울이다. 빈틈없이 구체적인데서 춤이 빛났다.
 이어진 김현태의 솔로. 부질없는 듯 팔을 툭툭 집어던지며 추는, 호흡을 느슨하게 풀어놓는가 하면 어느 순간 잡아채는 춤으로, 내적 에너지가 충만했다. 오롯이 홀로, 내면으로 침잠하는 춤. 성찰의 춤을 추겠다는 의도가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춤의 출구를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고양감을 가지고 있는 이 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춤의 언어가 필요할 것 같았다.


 



 바다 속 물고기떼의 춤인 듯 겅중겅중, 다리를 찢어올리며 추는 수직적인 춤의 군무. 단순했다. 의상이 낭패. 검정색 의상 하나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를 담으려한 것, 애초에 무리였다. 마지막, 정적이고도 단아한 김정미의 솔로, 좋은 춤이었으나 앞장과의 의미연결이 약했다. 이어 서상재와 김현태 춤, 그리고 다시 김현태의 솔로로 마무리된 〈노인과 바다〉. 이전보다 춤이 깊어졌다.
 안무자들의 춤의 세계는 그들의 삶의 연장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어려움을 춤 창작의 어려움과 겹쳐놓으려는 이 힘겨운 시도에서 어떤 사소한 춤의 실천도 세상살이의 실제적 성장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태상의 〈게르니카〉 (9월 10일, 부산금정문화회관)

 〈게르니카〉, 작품 제목에 마음이 붙들렸다. 역사의 오류를 들여다보겠다는 작업. 어떤 형태든, 역사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나라의 작가에게 이보다 더 큰 미덕(야심)은 없다. 이태상(신라대 교수)의 역사인식이 궁금했다.


 



 캄캄한 무대, 파열음과 함께 호리존에서 객석쪽으로 섬광 같은 빛이 날카롭게 꽂힌다. 이 세계의 편협함으로 깨진 저 세계의 빛이다. 동시에 무대 중앙, 뒤돌아 서 있던 군무진이 객석 쪽으로 일제히 돌아보는 씬, 강렬하다. 독일군의 외투 같은 코트를 입은 군무진, 벌거벗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거꾸로 서 있는 남자. 거꾸로 서 있는 남자에게 바지를 입힌 뒤, 그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외세를 불러들여(입혀진 옷), 자기 땅에 피의 역사를 쓰는 일, 거꾸로 세상을 보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로 읽는다. 머리는 하늘에 두는 것이지 땅에 처박는 것이 아니다. 한 무리가 이 사태를 관망, 곧 총알이 날아다니고 쓰러지는 또 다른 무리. 고개를 힘있게 젖히고 걷기를 거듭한다.
 무대 위, 여자들은 두려운 듯, 외투로 얼굴을 가린 채 쓰러져있는 이들을 밟고, 헤집으며 누군가를 찾아다닌다. (무대에)부재하는 누군가의 자리만큼 이 세상은 부족하다. 우리는 이 결여와 오류로 산다. 설득력 있는, 감각적인 장이었다.
 오른쪽으로 높이 올린 난간에 서 있는 여자(문수경, 사운드뮤지션). “전쟁”, “참상”, “침략자”, “고통”, “희생” 등의 단어를 뱉는다. 철조망을 의미하는 그림. 남녀 무용수의 춤이 앞장의 움직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제국주의” “냉전시대” 등의 단어. 계속될수록 ‘게르니카’ 학살(지옥이었다는)과는 의미가 멀어지며 퇴색한 단어가 무대 공간을 떠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게르니카’, ‘교회 종소리’, ‘공습’, ‘하인켈 51’, ‘융커 52 폭격기’, ‘지옥’ 등의 단어였다면. 아니다. 어떤 단어로도 2시간 30분 동안의 폭격으로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그 참상을 그려내지 못할 것. 춤만이 가능하다.
 난간위에서 떨어지는 단어, 같은 춤. 차이가 없는 춤의 움직임, 무대가 느슨해진다. 종이를 말아서 (확성기)메가폰처럼 입에 대고, 앞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외친다. 위에서 뱉었던 단어를 아래에서 반복한다.


 



 남자 머리를 바닥에 대고 다시 거꾸로 선다, 가만히. 세상은 이미 지옥이다. 낯설다. 바로 서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거꾸로 설 수밖에. 죽은 이들의 환영. 주검을 메고 다니고, 남자들은 하나로 묶여있다. 남자를 밟고 올라서고, 그들을 의자 삼아 몸 위에 앉기도. 입을 막고 걷어차고 뒤집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한다. “죄악” 등. 이 오류의 세계는 저 세계의 거울이다.
 죽은 망령들의 움직임. 입을 막고, 시체 썩는(주위에서 남직한) 음향. 남자무용수들이 옷가지를 들고 오케스트라 박스로 던져 넣는다. 병정들이 입었던 외투, (시체)알맹이가 사라졌다. 살고자하는 몸부림. 12명이 추는 군무, 춤의 의미 연결이 분명하지 않다. 외투(껍데기) 벗는다.
 거꾸로 서 있었던 남자, 외투를 입었다. 다리와 팔을 턴다. 손바닥으로 마치 불이 붙어 타고 있는 몸의 불을 끄듯, 마구 두드리며 털어낸다. ‘그래, 내가 했다 왜?’라고 하는 듯. 외투를 벗긴다. 좀 전의 상황과는 반대다. 상의를 벗기고, 하의, 모두 벗긴다. 알몸으로 뒤돌아 서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꼭두각시.
 무용수들이 껍데기(군복)를 남자의 몸 위에다 쌓는다. 네가(프랑코?) 이 죽음들의 무게를 견뎌야 된다는 의미로 읽어본다.


 



 융단폭격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게르니카’의 학살. 조지 오웰, 헤밍웨이 등이 참여한 전쟁. 〈카탈로니아 찬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의 문학작품으로 기록된 전쟁. 내전의 참혹함을 투우에서의 빛과 어둠의 극대함을 빌어 상징화한 스페인남자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이태상(신라대 교수)의 〈게르니카〉. 이태상은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로 전쟁을 답사,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걷고, 점령, 무대에서 전쟁을 치렀다. (춤)저격수가 없었다. 단 한 발로 적(관객)의 심장을 뚫는. (앞 공연 〈컨템포러리 굿〉)차이 없는 춤, 난간에서 쏟아지던 단어의 나열, 덜 아팠다. 감각적이라 기대했던 음악(장영규), 투박하고 뭉툭했다.
 〈게르니카〉를 보고 독일 공군장교가 “이 그림, 당신이 그린 것이요?”라고 묻자 “아니요, 당신들이 그린 것이지 않소!”라고 답했다는 피카소. 용감한 스페인남자.
 군부 쿠데타, 내전과 독재자, 독재 정권. 우리한테 익숙한 단어다. 무용인들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2016. 10.
사진제공_정길무용단, 이태상댄스프로젝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