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성황리에 돌아보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지젤〉 현장
김혜라_춤비평가

춤 공연 극장(대전예술의전당) 로비가 문전성시를 이룬 것이 얼마만인가 싶다. 30여년 만에 파리오페라 발레단 방한(1993년 세종문화회관,〈지젤〉)에 화답하듯 객석은 빈 곳이 거의 없었다. 공연작인 〈지젤〉은 1841년 초연 후 변화무쌍한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대표적인 장수 레퍼토리이다. 물론 안무가에 따라 각색되긴 했으나, 좌절된 사랑에 절망하며 죽어가는 지젤의 연기(mad scene)와 우리나라로 치면 한 많은 처녀 귀신격인 윌리들이 복수를 단행하는 신(Ballet blanc)이 〈지젤〉에서 놓칠 수 없는 발레 블랑의 품격을 관객들은 기대할 것이다. 발레 애호가들은 350년 전통을 이어어고 있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명작을 보기 위해 30만원에 육박한 티켓비를 호탕하게 지불한 듯하다. 클래식 음악의 최고 권위인 쇼팽과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석권한 조성진, 임윤찬의 공연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요즈음 1위와 오리지널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성과도 연관이 있고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인기가 이와 맥을 같이하지 싶다. 단원들이 대거 참가하는 투어를 지양하는 세계 정상인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단독 방한은 3월에 화제가 될 만한 이벤트이다. 공교롭게도 3월에 정명훈이 이끄는 독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조성진의 협연도 그러하고 해서 한국이 클래식 문화 향유의 최전선에 진입하고 있는 인상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LG아트센터



이번 내한 공연은 1991년 파트리스 바르와 외젠 폴리야코프가 재안무한 것으로 국립발레단의 〈지젤〉과는 동일 버전이다. 오는 5월에 선보일 국립발레단의 〈지젤〉과 4월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올레그 비노그라도프와 유병현이 연출)까지 올봄은 지젤의 비극적인 사랑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1막의 주요 내용은 사랑과 배신으로 인한 지젤의 죽음으로, 2막은 지젤이 알브레히트를 지켜내는 숭고한 희생을 그린 이야기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반영된 1장은 지젤과 알브레히트, 지젤을 짝사랑하는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의 계층 간 극복할 수 없는 현실적인 관계와 당시의 세계관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극적 결말을 예견할 수 있는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꽃 점 장면과 힐라리온이 귀족의 상징인 알브레히트의 칼을 추적하는 장면 그리고 지젤의 병약한 몸 상태가 이 작품이 비극으로 가는 실마리임을 알 수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Agathe Poupeney OnP/대전예술의전당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LG아트센터



가을의 정취가 그윽한 무대 배경에 대전예술의전당 첫날(3.3.)은 미리암 울드 브라암이 지젤로 제르맹 루베가 알브레히트 역을 맡았다. 발랄함과 수줍음을 머금은 지젤과 귀족적 이미지의 수려한 외모를 갖춘 알브레히트의 등장에서부터 이미 발레 애호가들은 매료될 만하다. 제르맹 루베는 작년 ‘파리오페라 발레 2022 에투알 갈라’ 공연 〈녹턴 15번 f단조〉에서 격조 있는 자태로 녹턴을 추었고, 〈달빛〉에서는 의연하게 죽어가는 고혹적인 춤으로 남성 버전 ‘빈사의 백조’를 선보인 바 있다. 1막의 하이라이트인 지젤이 알브레히트의 배신에 미쳐가는 연기는 생각보다 절제되어 있고, 오히려 정신적 충격에 지병이 돋아 죽게 되는 인과성의 흐름이다. 테크닉이나 장치 활용보다는 아당의 음악에 각 캐릭터의 심리는 도드라지고 섬세한 포르드브라(port de bras)와 포인트 워크로 유려하게 전체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클라이막스인 지젤이 죽어가며 추는 광기어린 춤과 드라마틱한 연기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아쉽게 느껴졌을 법하다. 공감되는 장면으로 알브레히트와 바틸트의 약혼 관계를 알게 된 지젤이 혼란에 빠진 상황을 강조하려 무대의 모든 활동이 멈춘 순간이다. 지젤의 감정에만 오롯이 집중하게 되며 세상이 멈춰 버린 듯 고통스런 그녀의 시간에 동감하게 된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LG아트센터



순백의 튀튀를 입은 댄서들의 향연인 낭만적, 초월적 상상력을 집약시킨 2막이 지젤의 백미이다. 영적 세계의 권위를 상징하듯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라베스크 팡셰(arabesque penchée)로 질서정연하게 등장하는 윌리들의 형상은 발레블랑다운 환상성을 극대화한 모습으로 언제 봐도 매력적이다. 여기에 시적 감수성을 머금은 달빛 안개 속에서 지젤은 알브레히트의 운명을 뒤집으려는 사투로 절절하다. 윌리들의 리더인 미르타(록산느 스토야노프)의 위엄 있는 지휘 하에 지젤은 1막과는 달리 솜털처럼 가볍고 가련하지만 단단한 의지의 춤으로 영적 세계의 규율까지 극복하는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놓칠 수 없는 테크닉이 푸에떼라면 ‘지젤’ 2막에서는 알브레히트의 앙트르샤이다. 제르맹 루베의 20여 번의 점진적인 탄력감과 속도를 유지하는 기량이 어둠의 장막을 뚫을 기세로 시원하다. 이는 죽은 자들 사이 오직 살아 있는 인간만이 펼치는 생동감이 넘치는 벅찬 동작으로 희망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전체적으로 공연은 에투알부터 코르드발레까지 ‘지젤’에 동화된 모든 댄서들의 열연으로 발레블랑이 펼쳐내는 오묘하면서도 정제된 파리오페라발레단만의 무드를 선보였다.



ⓒAgathe Poupeney OnP/대전예술의전당



현재는 소실된 원작 〈지젤〉은 시인이자 비평가인 테오빌 고티에가 독일의 하인리치 하이네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베르누아 드 조르주의 대본, 아돌프 아당의 작곡, 장 코랄리의 안무 그리고 지젤역인 카를로타 그리시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신인인 카를로타 그리시는 스타덤에 올랐고 이내 유럽을 휩쓸며 대대적인 성공을 이뤘다. 초연 당시 〈지젤〉은 1830년에 파리오페라 단체가 국가 소유의 기업에서 민간 기업으로 바뀌면서 귀족들의 자리를 꿰찬 당시 부르주와 시민들의 니즈가 담긴 작품이다. 귀족과 평민의 결혼이 불가함을 내포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보이는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만을 말하지 않는다. 상업적 극장 시스템에 적절하게 무용수를 대상화시키며 왕족이나 귀족과 다르지 않은 그들(부르주와, 후원자, 기획자)만의 욕망과 이상향이 투영된 것이다. 이후 마리우스 프티파에 의해 러시아에서 파리오페라와는 다른 강렬하고 화려한 기술과 장치를 갖춘 작품으로 연출되었고, 디아길레프가 이끈 발레뤼스의 미하일 포킨 버전으로 전세계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작품은 자리잡게 되었다. 대표적인 낭만발레의 정수로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지젤〉은 동시대까지 젠더의 관점으로 때론 사회 정치적인 시선으로 해석되는 풍요로운 텍스트가 된 것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LG아트센터



역사적으로 최고의 낭만발레라 칭송 받으나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여성에게는 참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지켜지길 바란 초연 당시 남성 관객들의 이상화된 여성상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에 지젤은 죽어서까지 알브레히트를 용서하다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끝까지 보호한다. 따라서 작품은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불평등한 신분 관계에 순응하며(이를 극복하는 방향 보다는) 낭만적인 문학성이 반영된 숭고한 플라토닉한 사랑에 초점을 두었다. 하여 동시대 안무가들은 진부한 이야기를 비틀어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지젤’을 기발하게 재해석한다. 마츠 에크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파격적인 ‘지젤’(쿨베리발레단, 1982)을 탄생시켰고, 프레데릭 프랭클린은 흑인농장에서 흑인들이 추는 ‘지젤’(할렘발레단,1984)로, 아크람 칸은 노동 현장인 공장에서 펼쳐지는 현대판 ‘지젤’(잉글리시 내셔널발레,2016)로 탈바꿈시켰다.


파리오페라 발레단에 대한 환대는 그간 역사 깊은 발레단 방한이 드문 때문이고, 종주국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몇 년 전 필자가 경험했던 유럽의 발레 극장은 중장년층 관객의 전유물로 보였고, 클래식 발레의 인기가 한국에 비해 식어 있었다. 파리와 한국에서 공연하는 같은 작품이지만 관객의 반응에서 차이가 큰 것이 현장에서 느낀 궁금증이었다(단체의 비즈니스 측면에서 흥행성이 보장되는 한국 방문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손쉽게 접하기 어려운 원작의 소유권을 가진 단체와 작품에 신뢰와 환호를 보낼 수 있으나, (비단 파리오페라 발레단만이 아니라 해외 유명한 단체들의 방문) 명성에 현혹되어 온전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작품성을 평가하지 못하는 요인이 될지 노파심도 들었다. 물론 파리오페라발레단만의 자부심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휘한 공연이었으나,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도 기량 면에서는 상당부분 수준이 있음을 비교하며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지젤〉 ⓒLG아트센터



또 하나 기억할 만한 이벤트로서 11일 서울 공연 후에는 당일 알브레히트 역인 기욤 디옵(솔리스트)이 에투알(수석무용수)로 지명되는 일이었다. 2021년 박세은이 에투알로 승급한 이후 첫 흑인 지명으로 전통적인 백인 중심 발레단에서의 미세한 변화를 예견하며, 유리천장 같은 단체에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수석무용수로의 진입은 의미 있는 일이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

2023. 4.
사진제공_대전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