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엄선민 〈blue road-숨 결 路〉
절제와 단정함으로 그려낸 춤지도
권옥희_춤비평가

대구문화예술회관 ‘중견아티스트시리즈’ 무대에 오른 엄선민(소울무용단 대표)의 전통춤 무대 〈blue road-숨 결 路〉(4월 14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를 본다. ‘중견’무대에 서기까지 주로 한국창작춤 작업을 해온 엄선민이 전통춤으로 어떤 춤지도를 그려낼지 궁금했다. 춤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기에. 말하자면 전통춤이라는 고정된 춤 형식에 (반성 없이)안이하게 자리 잡는 한 쪽과 고정된 춤형식에 의지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다른 쪽의 춤을 같은 기준에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보아온 엄선민의 춤을 말하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껏 무대에서 보아온 그의 춤은 한마디로 절제와 단정함이라 할 수 있다. 그 밑에는 춤(삶)에의 견고한 의지와 열정 같은 것이 떠받치고 있는.

팸플릿의 이력을 보니, 서울에서(경희대·세종대)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시무용단(단원)을 거치고 대구에 정착(결혼), 독립안무가로 2016년부터 〈몸을 만나다〉 〈over the moon! 얼쑤!〉 〈춤추는 너에게〉, 〈냉정ⅹ열정〉 〈연꽃잎〉 등 20여 편의 안무와 수상경력이 증명하는 그의 빼어난 춤 이력까지. 게다가 임이조 선생에게 사사하면서 시작된 전통춤은 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그 춤인연이 십 오륙년이 훌쩍 넘는 시간으로, 춤(삶)을 향해 낸 성실한 길이다.

무대는 춤을 사사한 스승(임이조 선생의 10주기)을 기리는 마음을 풀어낸 1장 ‘숨’에서 창작무 〈수신제가〉와 임현종(임이조선생의 자제)의 〈승무〉(이매방류), 그리고 2장 ‘춤결’에서 임이조류의 〈화선무〉와 〈교방살풀이춤〉, 〈신향발무〉를, 마지막 3장 ‘길’에 임이조류의 〈한량무〉와 〈입춤〉을 올렸다.



엄선민 〈수신제가〉 ⓒ엄선민/하선일



1장, 〈수신제가〉. 흰색 들꽃과 작은 둥근자리(멍석처럼 보이는)가 놓인 무대. 속이 비치는 얇은 승무고깔에 민소매의 긴 쾌자 의상의 엄선민이 무대에 흩뿌려진 꽃을 집어 들어 자리위에 놓는다.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라는 대사(음향)에 네 명(김윤서, 박채연, 박선영, 이효정)이 걸어 나와 둘러 앉은 뒤, 고요하게 움직인다. 마치 그리움이 가슴에 묻히듯 춤 속에 묻힌다고 해야 할까. 아니 묻힌다기보다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선생의)춤. 춤의 감각으로 닿을 듯 말듯 한 안타까운 자리, 그 절대적인 춤형식의 자리를 반추하는 듯한 춤이다. 벗어 놓은 고깔을 다시 집어 들고 무대 밖으로 사라지면서 춤은 정리된다. 무대에 남아있던 엄선민이 꽃을 놓았던 멍석을 말아 안고 상수 쪽을 바라보자 승무 대북이 들어온다.

무대에서 무용수의 자리 위치와 춤은 그 방향성에 따라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멍석과 흰색 들꽃, 승무고깔 등은 스승을 향한 마음, 의례를 행하는 것으로 읽히는가 하면, 그리움이 지나간 자리에 이어지는 〈승무〉의 연결은 춤의 모습으로 살다 간 당신(임이조)의 자리에 당신의 아들(임현종)이 춤을 추고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낸 좋은 연출이었다.



임현종 〈승무〉(이매방류) ⓒ엄선민/하선일



임현종의 〈승무〉(이매방류). 북놀음과 활달한 팔춤사위가 눈에 띄는 춤이었다. 담담하게 이어지던 춤이 어느 순간 무릎을 모았다가 앞으로 툭 내딛는 발 디딤에서 선생의 춤색이 확 묻어나나, 전체적인 춤인상은 선생의 춤과 다르다. 사실 임이조 류(춤)의 춤이란 고인이 추었던 춤기량과 정신이 이미 어느 곳에(추구한) 이르러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것인지도. 임이조가 아닌 임현종의 춤을 추면된다. 전통춤은 춤과 춤 사이의 관계와 그 상황에 따라 의미를 새롭게 형성하는 그 무엇으로도 작용하는 개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류’라는 전통춤은 새롭게 분화하는 상호작용으로 춤이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엄선민 〈화선무〉(임이조류) ⓒ엄선민/하선일



2장, 엄선민의 〈화선무〉(임이조류) ‘교태로운 여인의 춤의 멋을 한껏 맵시 있게 엿볼 수 있는’ 춤. 꽃을 얹은 화려한 전립을 어두운 보라색 계열의 의상이 눌러주는 색의 조화로움와 부채, 섬세한 발디딤과 가락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담백한 춤이다. 창작춤을 출 때 간혹 보이던 무거운 느낌의 감정선과 교태미를 걷어낸 깨끗한 춤선과, 부채를 펼쳐 바닥에 놓고 앉은 마무리까지. 절제된 감정선으로 해석한 아름다운 춤이었다.



권영심 〈살풀이춤〉(임이조류) ⓒ엄선민/하선일



〈신향발무〉 ⓒ엄선민/하선일



임현종 〈한량무〉(임이조류) ⓒ엄선민/하선일



권영심의 〈살풀이춤〉(임이조류). 자진모리와 굿거리의 춤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만치 무겁고 정체된 느낌의 춤이었다. 검정색 바탕의 긴 금박댕기, 청록과 노랑색 당의 의상이 이채로운 〈신향발무〉(엄선민,김윤서, 박채연, 박선영, 이효정)에 이어 임현종의 〈한량무〉(임이조류). 젊은 선비가 건성건성 걷는 듯 추다가, 팔을 감고 펼쳐 뿌리는 활기 있는 춤사위와 어깨춤에 “얼씨구”하고 객석의 추임새가 얹히며 이내 흥이 실리는가 싶더니, 몸에 힘이 들어가며 춤이 여유를 잃는다. 선생이 춤을 보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춤꾼은 제 마음에 칼날과 의지를 품고, 그 의지에 제 마음을 베임으로써만 간직된다. 그 칼날은 지켜야 할 것(그것이 누구의 춤이든)을 증명하기 위해 유지되어야 하는 단정함이며, 엄격하게 지녀야 할 춤의 질서와 형식이라고. 노파심에 하는 말이다. 개의치 말길.



〈입춤〉(임이조류) ⓒ엄선민/하선일



마지막 〈입춤〉(임이조류) 군무. ‘흥풀이 춤의 일종’으로, 장구로 장단을 치면서 “들고, 젖히고, 숙이고, 놓고...” 라는 흥이 실린 임이조선생의 육성에 맞춰 춤이 시작된다. 연한색의 살구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다섯 명의 춤, 슬쩍 뒤를 돌자 그리움을 끌어 모으듯 끝단을 잡아 올린, 부풀어있는 치마의 표정이 이채롭다. 권영심이 합류, 삭힌 그리운 감정을 안으로 단정하게 모아 추는 군무,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필자는 표현 욕구에 의해 일어나는 예술은 단순히 예술가의 성취욕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절제함에 더 가치를 두고,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통춤 무대를 통해 본 엄선민의 춤은 예의바르고, 조용한 성품에서 비롯되는 절제와 단정함이 앞으로 그가 그려갈 춤 지도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견고한 춤(삶) 의지 속에 춤 길(스승)의 전망, 다짐까지 섞여 있는 이번 무대는 무엇보다 생전에 사사한 스승의 춤이었기에, 한편으로 자신의 춤이 근거도 뿌리도 없는 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하여 자신이(선운 임이조춤보존회 대구지부장) 추는 춤이 제 몫을 인정받으며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스스로 묻고 길을 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2023. 5.
사진제공_엄선민, 하선일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