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자연에 스며드는 사람들
박호빈_ 안무가, 제로포인트모션 대표

지난 해, 제주 한달살기를 하며 제주 올레길 풀코스를 완주할 요량으로 트레킹을 하던 중 제주국제즉흥춤축제 총감독이신 장광열쌤으로부터 긴급 sos로 참여하게 된 이 축제에 올해는 한불국제즉흥협업과 김원 디렉션에 의한 제주돌문화공원 하늘연못에서의 재독안무가 김윤정과 〈볼레로〉 즉흥 듀엣춤판을 위해 다시 한번 제주에 잠입했다.


날씨가 다소 우중충했지만 프랑스팀을 이끌고 있는 몽펠리에의 남영호선생과 팀원들의 호쾌하고 순박한,  넘치는 해맑음으로 기분이 상승되는 듯했다. 공간선정을 위한 현장 리서치 중에도 그들은 심심치 않은 순간 즉흥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 갔다. 

우리가 걱정한 것은 기상이었다. 5월18일의 기상이 비가 예상되어 있지만 그것이 오락가락하는 실비정도 있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워서 다음날 아침 기상이 좌우할 것 같았다. 결론은 꽤 많은 비의 예보였다. 주최측은 아침 일찍 야외 프로그램의 일정연기를 통보했고 갤러리 내에서의 프로그램만 진행하기로 했다.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릴레이 즉흥 공연이  진행된 오백장군 갤러리 소극장은 밀폐된 바깥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서울문화재단이 인수하여 ‘대학로극장 쿼드’란 이름으로 바뀐 자리에 대학로 대극장으로써 꽤 인지도 있는 ‘동숭아트센터’ 1층에도 이와 비슷한 구조의 공간이 있었다. 처음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 공연 가능한 극장처럼 활용 되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릴레이 퍼포먼스의 백미는 각 순서별로 아티스트들이 교묘하게 연결되어지는 퍼포먼스의 연속성에 있다. 각자 개별적인 특성이 있지만 앞뒤를 잇는 브릿지를 순간 즉흥으로 연결하는 것에 따라 관객의 집중도는 상승되고 감탄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 공간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얼마만큼 잘 살리느냐가 관건인데 이번 릴레이에서는 모든 것이 충족되는 즉흥성에 탄성이 터졌다. 

우선, 스타트를 끊은 김원이 무대가 아닌 객석 가까이서 시작하면서 공간의 범위를 미리 확장 시켜놓았다. 그의 움직임은 섬세하고 소프트한 매력으로 차 있음으로 정평이 나있다. 연이은 프랑스에서 온 엠마뉴엘(Emmauel Grivet)은 유리벽을 커튼으로 가려 공간을 무대 위로 축소시키고 제한된 공간에서의 즉흥은 마치 카바레에서의 원맨쇼처럼 마이크 같은 소품을 이용하며 가벼운 터치로 이끌어 갔다. 관절구조를 적절히 이용하여 움직이는 그의 몸에서 자신만의 메소드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특히, 남영호의 객석에서의 등장과 우연히 펼쳐지는 관객의 컨택은 마치 계획된 것 같은 착각을 가졌고 그 관객은 곧 전국노래자랑에서 발탁된 신예 가수처럼 다른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 받았다. 또한 연이은 나디아(nadia larina)와 칼(Karl Paquemar)의 한국어로 구사한 하나, 둘, 셋, 넷의 카운트의 음율은 관객과의 소통매개체로 발전되었고 그의 공간 활용의 도발성은 그 자유로운 마인드로 관객을 해방시켜 나아갔다. 여기에 데이빗(David Lavaysse)의 음악이 맞물려 마지막 피날레는 관객 참여의 한 판이었다. 

생각치 않은  적극적인 참여는 우리에게 춤은 무엇이고 살아있는 즉흥적인 움직임과 관계의 유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하는가를 극명하게 전달하였다. 적어도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공유라고 만끽하였다.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어김없이 5·18에 내린 장대비와 광풍의 비바람은 다음 날 확실한 소강을 보였고 이른 아침부터 우리들을 약속의 땅으로 서서히 인도하는 것 같았다. 숙소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썰물로 밀려나 있던 바닷물이 어느덧 서서히 밀물과 함께 파도치며 조용히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정적을 깨고 중년 여성의 목소리들이 파도의 본성을 깨우고 있을 때, 잠결에 일어난 것 같다. 

그렇다. 서울서 집단 이주한 ‘춤의 학교’ 커뮤니티 즉흥팀들이 이미 함덕 앞바다를 점령한 체 해녀 불턱(해녀들이 잠수복을 갈아입을 때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둥그렇게 쌓아올린 돌담)을 ‘해신제단’ 삼아 설문대 할망을 불러들이는 춤을 추는 듯했다. 

아, 자유로운 영혼의 중년들이여~! 한 때는 꿈 많은 소녀였을, 한 때는 가장 아름다웠던 연인이었을 을, 그대들이여~! 어느 순간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엄마로 자신을 희생하며 가두어 버렸던 지난 날을 해방시키 듯 오직 자기로서 빛을 밝히 듯, 바람에 날린 주름이라도 아름답고 강렬한 태양에 바래 하얀 머리카락을 숨길 수 없어도 아름다운 그대들이여, 지금 날개 짓 같은 팔 가지를 하늘로 쳐들며 마음껏 행복하시라~!

어쩌면 춤은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유희 그 자체의 상태이다. 희희덕 거리던 진중하든 그 속에 빠져있는 순간은 다 유희이다. 작업에 임하는 내가 바라는 태도이다. 산책도 그러하다. 머리 속 잡다한 망상들이 나뭇잎을 밟는 발자국소리에, 바람소리와 함께, 지저귀는 새소리에, 파도와 함께 쓸려 사라지게 하니, 그것도 유희이다.

적어도 나에겐. 작년에 답사하던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한적한 동광 양물 할망과 동자석이 있는 제2코스 구역이었다. 나뭇가지로 터널로 길게 이어진 좁다란 길과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에 까마귀 울음까지 긴장감을 생기게 하는 묘한 곳이었다. 즉흥춤 추는 장소에서는 열외이었지만 짬을 내서 다시 산책하고 싶었다.

푸른 이끼에 여튼 미소만 남은 물할망을 다시 보고팠고 저승사자 같은 동자석과 담판을 짓고 싶었다. 지금 당장 날 데려가든지 아니면 내가 다시 스스로 찾아 올 때까지 이렇게 기다리라고…! 어쩌면 삶의 마지막 유희는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오후가 되니 날씨는 급속도로 좋아지는 것 같다. 개맑음. 구름이 춤추고 태양이 열광하는 그 자체. 그 포문을 연 것은 제주  볍씨학교(대안학교)의 학생(중3,고1생정도의)들이 펼쳐지는 너무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단단하게 채워진 몸의 유영으로 관객을 들었다 놨다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들의 몸은 나무처럼 당당하고 몸을 받치고 있는 다리는 방향을 잃지 않고 그들의 팔은 나뭇가지처럼 유연하며 섬세하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그들의 눈빛이 한낮에도 반짝거리는 별을 보는 듯하는 것이었다. 꼿꼿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난 밤하늘의 별을 보았고 눈물샘에서 한없이 흐르는 영혼의 샘물을 만났다. 그들의 야린 몸통은 움트는 꽃봉우리처럼, 돋아나고 뻗어지는 푸른잎과 나뭇가지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뭉개구름처럼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물장구치는 물방개처럼 자유롭다.

“아, 어릴 쩍 동네를 휘젓고 뛰어놀던 나의 친구들아~”, 가슴 속으로 옛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저들의 날개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았다.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프랑스와의 협업은 3개의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공간은 ‘어머니의 방’과 그 주변 오백장군들의 석상이 있는 곳. 난 그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이 빠져 나갈 때까지 어머니의 방 맨 위에 있는 도넛츠같은 돌 옆에 원래 있었던 돌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이른 아침에 보았던 최보결의 ‘춤의 학교’ 팀이 맞은편에서 즉흥을 시작하고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다가오는 관객의 무리를 보며 상황에 따라 반응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의 맘은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었다. 돌과 하나 되어 원래 그 곳에 있었던 돌이 되었다. 아마도 즉흥춤이라는 것이 생긴 이래로 나처럼 꼿꼿이 서 있었던 즉흥은 없었으리라!  다른 멤버들이 제2의 공간으로 이동할 즈음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대부분의 멤버와 관객들이 사라진 후, 끝까지 나를 보며 남아있던 관객은 “ 이젠 내려와~!”하며 웃으며 외쳤다. 맘 같아선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안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는데, 두 번째 공간에서의 즉흥에 영향이 생길까봐 나름 즉흥의 연장으로 큰 돌이 굴러 떨어지듯이 쿵쿵 튕기며 내려갔다. 

두 번째 공간이 ‘설문대할망제단’에 도착할 무렵, 이미 즉흥은 시작되었고 난 등지고 있는 관객들 사이를 뚫고 유유히 걸어가 그들과 함께 합류하기 시작했다. 나름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마지막 엠마뉴엘과의 제단 가장자리에서의 아슬아슬한 리프트는 그가 얼마나 균형에 대한 센스 깊은지 알았다. 그는 내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만의 손가락 힘으로 날 받쳐주고 있었다. 내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경우의 변수를 맘속에 그리며 그 짧고도 긴 시간을 즐기며 그와의 호흡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퍼포머들은 상호간의 신뢰가 생명이다. 믿고 자신을 던지고 상대를 책임지고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제3의 갈대숲 공간에서는 음폐와 돌발이란 변수와 기다랗게 휘어진 통로를 오가며 원근의 묘비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거기서 유기적으로 발생하는 삼삼오오의 생겼다 사라지는 컨택과 관계구성은 즉흥의 묘미를 충분히 전달한다. 

마지막 나란히 누워서 끝낸 이미지는 카텔란 전시때 봤던 시체들의 나열에 하얀 천만 걷어 낸 것이랄까. 혹은 채석장에서 들여 온  조각하지 않은 원석 그 자체!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이날의 마지막 장식은 김윤정과 함께한 〈볼레로〉 듀엣과 연이은 엠마뉴엘의 솔로. 하늘을 담아내고 있는 이름 그 자체인 하늘연못에서의 천상 듀오. 물속에 잠겼다가 머리부터 서서히 몸을 드러내며 나선형으로 작은 원형무대로 빨려들어 가듯이 만난 남녀의 부드러웠던 손터치는 끝내 잔잔했던 연못을 볼레로의 클라이막스처럼 요동치며 적잖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김윤정이라는 무용가가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열정적이었다. 절제에도 능한. 하지만 우리들은 끝내 볼레로의 절정에 농락당하듯 온 몸으로 바닥에 고인 물을 강렬히 튀기며 마지막 에너지를 불 태웠다.





2023 제주국제즉흥춤축제 ⓒ박호빈



공연은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관객이 함께 뒷풀이로 더 고조시킨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이다. 한 두명씩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린 채, 아니면 치마가 젖든 아랑곳 하지 않고  연못을 가르며 중앙무대를 향하여 한 발 한 발 걸어 나온다. 집에 돌아갈 기세가 아니다. 그들이 점점 무서워진다.

노을은 멀었지만 산마루 너머로 태양이 숨기 시작하며 발로 세례를 받듯 모든 사람은 축복의 기쁨으로 정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잔잔한 연못은 다시 넓게 펼쳐진 하늘을 담아내고 있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의 즉흥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인간에게 잘 어울려 지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 잘 스며드는 사람의 모습일 뿐이다.

박호빈

안무가. 댄스컴퍼니 조박, 댄스씨어터 까두로 거듭 나면서 나름 체계적인 제작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운영난으로 2여년 휴식기 끝에 결국 폐업, 전문무용수와 안무가의 권익보호와 복지개선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새로운 공연예술미학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로포인트모션(Zero Point Motion)-영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23. 6.
사진제공_박호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