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앰비규어스무용단 〈얼토당토〉
보도 듣도 못한, 작심한 호응
김채현_춤비평가

 국내 춤 공연에서 웃음을 접한 경험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창작에서건 관람에서건 웃음 삼가기는 춤 공연의 묵시적 에티켓이 된 듯하다. 이런 에티켓은 춤 작품의 분위기를 비롯해서 그 나름의 공연 관행을 이끌어왔고 춤계 나름의 공고한 역사가 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내 춤 공연에서 금기가 되다시피 한 ‘객석의 웃음’을 공연 단체 스스로 자아내는 일이 공연 단체 시각에선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해선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경우는 매우 희소하였다. 앰비규어스무용단의 〈얼토당토〉(구리아트홀, 1월 19일)에서는 춤 공연의 관행이 여러 면 파기되었고, 이를 원동력으로 〈얼토당토〉에서 관객의 웃음은 작품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앰비규어스무용단이 평소 발작(發作)하는 움직임에 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런 움직임이 웃음을 유발할 개연성은 높다. 그러나 이 무용단의 그간의 공연들이 언제나 웃음을 자아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얼토당토〉는 다소 예외라 여겨진다.
 〈얼토당토〉는 지난 9월 안산예술의전당 초연에 이어 1월 중순 경기공연예술페스타(경기문예회관연합 주최) 베스트 컬렉션의 일환으로 재공연되었다. 초연에 비해 많은 부분이 손질되었다. 현대무용과 한국 전통 소재의 결합에 초점을 맞춘 이 공연은 ‘모닝굿’의 장으로 시작하여 ‘죄와 벌’ ‘장쉬쉬’ ‘여한(女恨) 없이’ ‘삼식이’ ‘나이트 피버’의 여섯 장으로 전개되고 각 장들이 독립된 스토리를 갖는 옴니버스 양식으로 진행된다.
 사리에 안 맞는 것은 물론 얼토당토아니한 것이다. 이를 표제로 사용한 〈얼토당토〉에서 얼토당토는 ‘보도 듣도 못한 공연’을 은유하는 용도로 쓰인다. 시종일관 객석의 웃음을 자아내도록 한 것뿐 아니라 현대무용을 한국 전통 소재나 창, 대중가요 그리고 발작하는 동작 등과 결합시키면서 〈얼토당토〉는 가파르게 보도 듣도 못한 공연이 되어갔다.


 



 본 공연으로 가기 전에 준비 무대 같은 ‘모닝굿’이 먼저 극장 로비에서 있었다. 무속의 굿(巫)에다 굿모닝의 굿(good)을 더하는 재치는 여기서 나름 의도적이다. 〈얼토당토〉가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발원(發願)의 의도가 내세워진다. 로비 중앙 붉은 카펫 위에 놓인 하얀 인테리어 스툴 의자는 작고 날렵하지만 시선을 끈다. 꽃장식이 매우 화려한 트레머리에다 털 재킷과 옅은 선글라스, 색동 복주머니를 걸치는 등 요란스레 치장한 웬 여자가 앉고 이를 중심으로 12간지(干支)의 돼지, 말, 양, 호랑이, 원숭이와 사슴, 사자 가면을 쓴 7명의 출연자가 어슬렁댄다. 그들은 모두 흰색 두루마기와 알록달록 버선을 걸쳤다. 여기서 여성은 무당, 굿판의 주역, 공연예술인, 여성 등 복합성을 띤 인물로 수용된다.
 극장 로비에 둘러선 관중들에게 동물들은 어슬렁대며 이러저리 다가가는 모습으로 친화성을 표현한다. 의인화된 동물이 굿판에서 흔한 무가(巫歌)를 배경으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그것이 굿판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훨씬 이상으로 〈얼토당토〉가 전통적 관념을 소재로 한다는 분위기를 환기한다. 동물들이 막춤 스타일의 춤으로 여자와 함께 흥겹게 기원하는 모습들은 애니메이션에서나 접해봄직한 가상의 세계(동물과 인간이 한 가족처럼 어울리는 세계)를 관객들 코앞에 끌어들였고, 곧 이어질 공연에 대해 관객들이 나이를 막론하고 친숙해지도록 예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로비 공연은 〈얼토당토〉의 무대 본공연에 관객이 동참할 분위기를 미리 띄운 점에서 그 역할이 중시된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본공연은 남녀 별리(別離), 여성의 주체 감각, 여한(女恨), 아이들의 골목 놀이, 한밤의 감정 발산을 소재로 하였다. 이들 소재는 정교하며 절도 있는 장구 가락에서 시작하여 제각각 해금 산조, 판소리 춘향가의 〈옥중가〉, 남도흥타령의 황진이 추모가, 백지영의 〈총맞은 것처럼〉, 장사익의 〈삼식아〉 그리고 사물 반주로 진행된다. 이 반주 가락들에서 읽히는 대로 〈얼토당토〉는 전통적 정서와 대중적 취향에 기반을 두었으며, 마지막 ‘나이트 피버’ 부분의 질펀한 사물놀이 가락은 탈춤의 길놀이에 등장함직한 군상들의 요란한 집단무를 북돋웠다.


 



 ‘죄와 벌’과 ‘여한(女恨) 없이’ 장에서 무용수들은 버선발과 치맛자락, 고쟁이 같은 흰색 복색들을 걸쳤다. 이들 복색과 반주 가락을 기본으로 삼아 〈얼토당토〉는 전통 사회의 남녀 현상을 해학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런 복색을 상스럽게 또는 발랄하게 걸친 그들에게서 전통은 재현 대상이 아니라 오늘 다시 조명되는 어떤 대상으로 변경된다. 춘향가 〈옥중가〉 대목의 남녀 별리를 도마에 올려 오늘의 시선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쿨하게 묘사하는 ‘죄와 벌’에서는 별리를 자탄(自嘆)하는 여성의 자의식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인체 움직임은 전혀 전통적이지 않으며 현대무용에 속하는 테크닉들이 동원된다. 본공연의 여타 부분들에서도 인체 움직임들은 유사한 기조로 진행된다.
 이 두 장에서 전통적 여성이라는 말은 진부해 보이지만, 전통적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 여성이 속을 태우는 모습은 일정 부분 소재로 묘사되면서 다시 그것은 인내를 미덕으로 여겨 속내를 마냥 감춰야 하는 여성 관념을 해체하는 지렛대로 활용된다. 인내하는 여자와 무리를 이루는 네 여자는 별리와 한에 직면한 여성의 심사(心事)를 서로 공감하고 어루만지며 딛고서는 모습을 익살스레 연출한다.


 



 ‘죄와 벌’과 ‘여한(女恨) 없이’ 사이에 설정된 ‘장쉬쉬’에서는 잠시 분위기가 돌변한다. 여기서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처용무〉의 호방한 팔, 다리 춤사위를 여성의 자신감을 환기하는 데 응용한 발상은 독특하다. 검정 티와 스키니,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색색깔의 단발 가발로 분장한 다섯 여자들은 바닥에 비친 바둑판 조명 패턴의 각 지점들에서 일사불란한 움직임들을 타악에 따라 펼쳐 보인다. 거만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거동은 ‘죄와 벌’과 ‘여한(女恨) 없이’의 여성에 비해 자의식이 충만하다.
 ‘삼식이’ 장에서 분위기는 한번 더 돌변한다. 하얀 민소매 메리야스와 팬티를 걸친 춤꾼들은 동네 아이들처럼 “삼식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는겨 / 쟤 손좀 봐요 새까만 게 까마귀가 보면 할아버지 하겠어 / 빨리 가 손 씻고 밥 먹고 공부 좀 혀, 제발...” 가사의 〈삼식아〉를 쫓아가며 고무줄놀이와 숨바꼭질, 말타기놀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댄다. 이 부분은 〈얼토당토〉가 세대를 초월한 춤 공연을 지향하는 의도를 뚜렷이 드러낸다. 이어지는 ‘나이트 피버’에서 춤꾼들은 금요일 주말 같은 밤을 불태우는 장면을 제공한다. 갓, 관모(冠帽), 건(巾) 같은 전통적 머리쓰개나 지금의 방한모, 덥수룩한 가발을 제 나름 뒤집어쓴 춤꾼들이 검정 선글라스에다 색색깔의 스키니나 레깅스, 스커트를 걸치고선 막춤을 집단으로 해대는 순간에 대해서도 객석의 호응은 얼토당토아니하게 높았다.


 



 〈얼토당토〉는 여섯 장으로 분할되어 옴니버스 양식으로 진행되었다. 객석의 적극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분할된 장들 간에 유기적 관계가 엷은 탓에 전체 완결성이 약하였고 장들 사이에 움직임의 특성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오히려 공연의 전체 흐름을 호흡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전통에 착안한 〈얼토당토〉는 앰비규어스무용단의 내러티브가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내러티브가 확장되는 데 있어 우선 춤 테크닉이 기여하는 바는 커 보인다. 이전에 이 무용단이 몸속으로부터의 발작을 춤에 도입한 것을 얼토당토아니하게 여겼을지 모르겠으나 지난 몇 해 꾸준히 지속된 무대 공연의 결과는 생리적 발동과 발작이 춤의 도구로서 상당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재촉한다. 현대춤의 테크닉을 바닥에 누워 양발을 벌려 몸을 뒤집는 곡예 자세뿐 아니라 막춤 스타일의 생리적 발작과 융합시키고 반복해대는 춤 양식은 잠재력이 상당하다.
 춤에 관한 고답적 선입견을 맹신하지 않는 자세, 즉 발상의 전환이 촉진하는 새 안무 방식에 힘입어 앰비규어스무용단은 〈얼토당토〉에서도 관객의 적극적인 응답을 끌어내었다. 공연 도중 수시로 터지는 객석의 웃음은 관객 스스로 미리 작심(作心)한 그런 수준의 웃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듣도 보도 못한, 그래서 색다른 춤을 일반 관객들은 이미 ‘우리들의 춤’으로 자연스럽게 환대하고 있었다.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접근이 돋보이는 대목이고, 근래에 보기 드문 춤 현상으로 꼽아 무방하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춤에 대해 거리감이나 절벽을 느끼기는커녕 춤꾼들의 익살 섞인 활약에 친근하게 다가서는 적극성을 보였고, 이는 이번 작품 주제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2017. 02.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