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고(故) 정재만의 춤창작 작업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춤 예술적 성취
김태원_춤비평가

 

 지난 7월 12일 지방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중진 남성무용가 정재만(1948년 경기도 화성 출생)은 많은 이들에게 주로 전통무용가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애주와 함께 은사 한영숙의 춤유산을 이어받아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그 스승의 호를 따와 벽사춤아카데미를 창설, 열정적으로 스승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춤맥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려 애써 왔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숙명여대에 기존의 무용학과 이외에 전통문화예술대학원을 따로 개설, 전통춤 교육을 아카데믹하게 확산시키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내었던 것도 거기 해당한다.
 그는 이미 30대 초부터 늘 입버릇처럼 <승무> 중심의 우리춤의 운동원리와 그것을 보다 실천적으로, 전문적인 춤교육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춤>지 등 여러 지면에서 말해왔다. 최근에는 자신의 춤에 즉흥성을 많이 가미, 우리 춤미학의 근저가 되는 정중동의 원리에서 그 ‘동(動)의 측면’을 보다 강조하려는 그 나름의 춤의 시도―특히 그의 <허튼 살풀이>(첫 시도 1993)―를 여러 무대에서 보여준 일이 있었다.(그의 전통춤 관련의 활동에 대해서는 지난 <춤웹진> 8월호에 우리춤연구가 김영희의 자세한 서술이 있다.)
 그러나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정재만은 지난 1980년대 한국창작춤이 발흥되어 발전적으로 전개되어가던 시기에 그 흐름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동참, 우리춤의 새로운 창작화 운동에 적지 않게 기여하였던 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도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창작춤 <춤소리>로 자신이 안무상을 받은 것 이외에 1981년도에 김매자를 주축으로 발족된 한국춤연구회의 임원(감사)을 맡아 참여하면서, 그는 김매자가 이끌던 창무회의 중요 레퍼토리로 남아있는 <춤, 그 신명>을 만드는 데 일조(一助)했다.

 



 <춤, 그 신명>은 초기 창작춤의 집단성(혹은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그 창작의 과정에 있어서나 그것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떤 벽을 두지 않으려는 미학을 명쾌히 함유하고 있는 춤인데, 그간 그 발표시기라든지 창작의 과정이 잘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 2012년 11월 국립예술자료원에서 있었던 창무이즘(CHANGMUISM) 관련의 끝머리 네 번째 세미나에서 사회를 맡아 함께 참여했던 나에게 “1982년인가, 채희완 교수가 대본을 쓰고 나와 김매자 선생이 춤을 지도하고 함께 안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비조(悲調)의 춤움직임(?)’을 창무회원 등 거기에 참여한 이들에게 주로 가르쳤다”라고 덧붙였다. 스쳐지나가듯 내게 말해주어서 그 구체적인 정황을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의 보이지 않은 참여에 의해 공동체성과 신명남이 집단적으로, 또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표출된 한 표본적인 춤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김매자와 함께 부산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고한 황무봉의 애제자인 김현자의 남성 상대역으로 1981년 부산에서 있었던 황무봉의 창작무용발표회에 출연(소품 듀엣 <유(有)>)한 것을 비롯, 1984년 김현자와 공동안무로 제6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홰>를 올려 ‘공동 대상’을 받았다. 남성 무용가로서 그의 탄력적인 움직임과 여성 무용가로서 김현자의 미태(美態)가 결합되어 본격 극장춤으로서 춤의 스타성 부각과 함께 작품으로서도 농밀한 상징성을 지녔던 그 춤은, 신무용적 미태와 새로운 창작의지가 결합되어 작품의 의미성과 그 객관적 표출에 있어서 두루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품은 닭의 암·수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음양(陰陽)의 결합을 통한 생명 탄생의 신화를, 또 거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더해져 이질적(異質的)인 힘들 간―이념상 그리고 체제상―의 상생적 조화를 이뤄내는, 본격 극장춤으로서의 모습과 그에 수반되는 의미 있는 주제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도 봐졌다.
 여하튼 80년대 중반 당시 주로 여성 무용지도자들이 리드하고 있었던 새로운 극장춤운동(대표적으로 김매자 · 문일지 · 배정혜 · 김현자)에 남성 무용가 정재만의 이른 가세(加勢)는 그 춤의 예술적 전문성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1985년, 김현자가 서울에서 한국의 대표적 기업의 후원으로 만든 럭키창작무용단의 창설과 그 지도에도 힘을 보태나 그 춤예술적 공조(共助)는 오래가지 못했고, 대신 그와 유사하게 기업의 후원을 얻어내는 직업무용단인 삼성무용단 예술감독을 이후에 맡게 된다.

 



 1987년 6월 1일에 그는 정재만남무단을 따로 창설, 국립극장에서 그 창단공연을 올리면서 창작춤 <사내아이들>과 <야유 야류 야루> 외에 1930년대에 전설적인 명고수이자 춤지도자이기도 했던 한성준에 의해 추어졌다는 <훈령무>를 군무로 재구성해 보여주었다. 나는 그 공연을 보면서 두 창작춤이 너무 곡예적 장기자랑식의 춤으로 흘렀던 반면, 재구성무인 <훈령무>는 그가 <홰>에서 보여준 정재만 다운 구성과 춤동작의 명쾌함이 살아나고 있었던 매우 흥미로운 춤으로 보았다.
 이미 자신의 안무작 기록에 있어서는 그 춤의 안무가 1981년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춤은 오늘의 시각에서는 과거의 신무용과 좀 다른, 이즈음 내 자신이 비평적 용어로 쓰고 있는 신전통무 내지 전통재구성무의 한 시발(始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 공연을 본 후 비슷한 시기에 올려졌던 국립무용단 중견 발표회와 한데 묶어 당시 <춤>지에 나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그의 남무단 창단공연에서 1930년대 한성준의 솔로를 군무로 재구성했다는 <훈령무>를 제외하고는, 정재만은 두 작품 <사내아이들>과 <야유 야류 야루>에서 군무 위주의 스릴을 느끼게 하는 자극적인 춤동작인 점프나 자반뒤집기 등 일견 한국춤 동작의 형식적인 ‘발레화’나 ‘묘기자랑’을 보여주었을 뿐, 그 신명남에다 춤움직임의 시적(詩的) 전환이나 감정의 음영을 주지는 않았다. 그런 뜻에서, 정재만과 국립무용단 중견단원들은 얼마나 그들의 재능과 춤솜씨를 낭비하고 있으며, 패러독시컬하게도 정재만이 재구성한 <훈령무>에서 엿볼 수 있는, 한성준의 춤에 대한 사고와 구성은 얼마나 절도 있고 새로운가.
 <훈령무>는 정방형과 사선적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하여, 조선왕조 말기 신식 군인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춤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대열짓기·호흡가누기·뛰기·행진하기 등 춤동작이 활달하고 남성적이었다. 그러면서 호흡가누기나 멈추기 등의 정지 동작을 통해 움직임을 절도 있게 맺고, 또 전환시켰다. 한성준의 그의 <학춤>에서 보여주듯이 한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춤동작을 애매모호하게 상징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의 자태다, 군인의 훈련 모습이다 등 춤의 묘사 대상이나 주제를 명확히 잡아 아주 구체적이고 명쾌한 춤동작으로 그것을 ‘묘사’함으로써 그의 춤움직임과 구성을 전개·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성준 이후 신무용류의 춤에서 거의 상투적으로 볼 수 있는 감정표현과 전달의 애매모호성 또는 관객을 전혀 생각지 않는 자기도취증과는 전혀 다른 춤태도라 보겠다. 다시 말해, 춤동작의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부드러움이 아닌 동작과 감정표현의 정확성 내지 정교성을 그의 춤은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점은, 좀더 깊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지만, 한국춤에 만연되어 있는 동작과 감정표현의 부정확성과 기방적(妓房的) 정치에 대한 뜻 깊은 경종이고, 한·흥·신명 등이 크게 강조되어 온 한국춤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본다.”(<춤> 1987년 7월. 일부 표현 수정.)


 사실 나는 이 <훈령무>에 대해 그 시기에 강선영 선생이 보유하고 있다는 <훈령무>, 그리고 그 이후 한·두 번 무대에서 보기도 했던 송준영이 재구성한 <훈령무>와의 차이점을 논할 수 있는 입장은 못되었다.(솔직히 그 부분도 내 관심 밖이었다) 단지, 그 처음 본 흥미로움을 비평적 시각에서 기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짧은 평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춤을 ‘이전의 신무용과 다르며, 이전 창작춤과도 또 다른, 그 보완(補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한국창작춤이 한참 새로운 춤의 장르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던 1989년 제5회 한국무용제전에서 그의 안무의 <해와 달의 결혼>,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으로 만든 <광대의 꿈>(1992)을 보았지만, 전자의 경우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농경문화적 삶을 그리는 언밸런스와 전통춤에 보이는 낯익은 무태(舞態)를 보여주는 창작적 안이함 때문에, 그리고 후자는 극작가 김상렬의 희곡을 대본으로 하면서도 무용극으로 보다 탄탄한 구조를 못 보여주는 그 안무력의 한계성 때문에 그 창작작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창작무용가로서 정재만은 그가 그 운동의 역사적 시기에 적기(適期)에 참여하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지만, 가령 그의 첫 은사였던 송범 문하의 동년배의 벗 국수호만큼 의욕적이거나 창의적이진 않았다. 이것은 그가 너무 빨리 ‘자신의 춤작업이 전통춤에 있다’―특별히 <승무>의 원리의 전파와 <훈령무>의 나름대로의 완성―고 단정지어, 그 방면의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집단무 <춤, 그 신명>의 공동안무자로, 김현자와 함께 <홰>라는 완성도 있는 창작춤을 만든 이로, 그리고 남성적 운동성을 띤 절제된 구성과 스피디한 전개를 갖는 신전통무 <훈령무>를 재구성(혹은 재안무)한 이로 가치 있게 평가되고 기록되어야 할 것 같다.
 평상시 그는 늘 자신에게 지워진 춤의 의무에 분주해하면서 내가 아는바 30분을 사적(私的) 감정을 갖고 무용인들과 함께 앉아 있질 않았다. 지난해인가, 우연히 중구 대한극장 뒤 ‘한국의 집’에서 동시대의 60대 지기(知己)이기도 한 국수호·김현자·최청자·김숙자·박명숙 등과 함께 앉아 여름나기로 삼계탕을 먹었던 일이 기억난다. 늘 바람처럼 자유스러웠던 그는, 그날도 다른 이들보다 먼저 밥을 먹고 좀 일찍 자리를 떴던 것 같다. 나로서 우리 춤계의 이러저러한 행사 속에서 적지 않게 그와 가까이 있었지만 좀 여유로움을 갖고 대화를 자주 하면서 그와 깊은 인간적 속내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2014. 09.
사진제공_연낙재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