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광주시립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감각적인 재해석, 레퍼토리화가 과제
방희망_ 춤비평가

 젊은이들의 활력과 에너지 넘치는 사랑에 포커스가 맞춰진, 패셔너블한 공연이었다. 광주시립발레단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함께 기획하여 올린 허용순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4월 7-8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 평자 8일 관람)은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짧은 길이의 작품들을 통해 조금씩 짐작할 수 있던 허용순의 명성이 과연 이유가 있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이 작품은 2007년 독일 슈베린 컴퍼니에서 초연되고 2014년 아우크스부르크발레단 초청으로 재안무 공연되었는데, 이번엔 아우크스부르크 버전으로 무대세트와 의상 등을 그대로 옮겨왔다. 규모가 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무대를, 양 옆과 윗부분을 상당부분 가려 규격을 맞추었는데 그것이 이번 공연에서는 인형극을 상연하는 검은 박스와 같은 느낌을 주어 오히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요소가 되었다. 말하자면, 상당히 현대적으로 처리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이 고전 속 주인공들임을 잊지 않게 하는 아기자기함도 동반되었다는 뜻이다.


 



 당구장을 배경으로 설정한 1막의 첫 장면은 이것이 원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였다는 본질을 일깨워줄 만큼 감각적이다. 그냥 파티장은 평범하고, 남녀가 고루 모일 수 있으면서 성적 매력도 적당히 발산할 수 있는 곳으로 당구장을 선택한 것은 탁월하다. 몸에 붙는 옷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자세라던가, 공으로 공을 맞출 때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의 스릴이 곧 남녀 간의 즉물적인 만남과 일맥상통하는 곳. 사실 이런 상징성이 시각적으로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비극성을 배가시켰을 텐데, 캐주얼한 만남의 장소로만 쓰이고 만 것 같아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남녀의 군무는 때론 뮤지컬의 그것을 연상시킬 만큼 빠르고 화려하며, 다툼이 일어나 둘씩 짝을 지어 몸싸움을 할 때도 각자의 몫으로 풍부한 동작들이 배정되어 있어 전혀 지루함 없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편 검은색을 기저로 몬터규 가문은 파란색, 캐풀렛 가문은 붉은색으로 나누어 어둡게 입힌 의상은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마냥 밝은 분위기로 붕 뜨지 않게 누르는 역할을 했다.


 



 익히 알려진 고전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보통 인물관계를 재설정하는데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인데 비해, 허용순은 장면전환을 빠르게 가져가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우선,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을 경량화 시킨 것이 귀에 들어온다. 오케스트라 실연이 아닌 녹음 연주라서 그렇게 튜닝되어 들릴 수도 있겠지만(사실 우리나라에서 발레음악 반주는 실연 때에도 경량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후한 저음 현악군을 대폭 줄이고 빠른 패시지를 수행하는 고음부 위주로 음악이 재편된 것이다. 이것은 원수지간 가문에 태어난 두 연인이 예정된 불행으로 향하는 운명의 무거운 발걸음보다,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정신없이 빠져든 불장난 같은 사랑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허용순은 다른 곁가지로 눈을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티볼트와 캐풀렛 부인의 불륜은 가면무도회와 티볼트의 죽음 장면에서 눈치 챌 수 있고, 파리스와의 결혼을 강권하는 장면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줄리엣 아버지의 딱딱한 모습에서 캐풀렛 부부의 비정상적이고 병든 관계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줄리엣이 부모보다 유모를 더 의지하고 로미오에게 확 빠져드는 심리적 배경으로 저만치 떨어져서 기능할 뿐,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킬 정도는 아니다. 변형된 줄거리로 관객이 고민하지 않게끔 원작대로 충실히 따라가다 보니, 관객에게 스토리 라인을 확인시켜주는 정도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잠깐씩 등장한 로렌스 신부나 영주, 캐풀렛 등이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대신 시선을 붙드는 것은 내숭 떨지 않는 줄리엣, 솔직하고 구김 없는 사랑 표현이다. 우리의 여성 안무가는 줄리엣이 청순하고 기품 있는 귀족 집안의 딸로 도도하게 그려지길 원치 않는다. 줄리엣 방에서의 첫 등장은 여주인공을 최대한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치장하여 등장시키는 기존 발레작품의 공식처럼 ‘밀땅’을 벌이지 않는다. 중요한 발코니 신에서도, 열병 같은 사랑에 들뜬 줄리엣은 로미오의 등장 이전에 이미 계단을 내려와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와 만나게끔 설정되어 있다. 때문에 발코니 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유모가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서로의 얼굴을 붙잡고 구르며 키스하는 장면(두 사람의 첫날밤의 마지막도 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것으로 끝난다)은 다른 어떤 버전보다 그들을 연인으로 완성시키면서 애절하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것은 젊은이들이 당구장의 큐를 들고 추었던 첫 장면과 머큐쇼와 티볼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싸움장면의 강렬한 대비 효과이다. 아직은 신사적인 거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의 큐, 찰나에 죽음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단검. 극단적으로 길고 짧은 도구의 대비가 춤의 구성에 파고를 만들어 풍성한 시각적 쾌를 선사하기도 했지만 특히 단검을 든 장면은 기존 무용극의 칼싸움에서 볼 수 없던 아찔한 긴장감과 속도감을 전달했다. 단검이라 무용수들간 거리를 줄일 수 없어 더욱 위험한데도 오히려 가까워진 거리만큼 몸싸움을 맞붙여 놓았기에 삽시간에 벌어지는 비극이 무대 위에서 생생했다. 훈련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노고가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고향 광주의 초청으로 시립발레단의 주요작품들에서 한 식구처럼 활약하고 있는 윤전일은 아주 성실하게 제 몫을 한 것 같다. 치기어린 청년이었다가 사랑으로 인해 너무나 큰 사고를 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피로해져 가는 로미오를 열연했다. 김주원의 부상으로 단독으로 줄리엣을 맡은 광주시립의 차석단원 구윤지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허용순표 줄리엣을 적합하게 소화했으며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과 함께 유쾌한 구심점이 된 머큐쇼 역 송관석, 화려한 마스크와 존재감으로 로잘린 역이 당연해보였던 신송현 등도 눈에 띄었다.
 광주시립발레단의 단원들이 보통의 발레작품을 소화하기엔 서울무대의 무용수들보다 체격조건이 아쉬울 수 있으나, 허용순의 작품 자체가 아름다운 선을 보여주기 위한 정적인 작품이 아니라 감정을 직구로 표현하는 돌파력이 특징이기 때문에 오히려 연기와 춤의 실력만 보장된다면 이들의 단단한 움직임이 같은 작품을 유럽무대에서 선보이는 것보다 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품을 수 있었다.
 평자는 작년 제6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허용순의 〈콘트라스트〉와 〈The Edge of the Circle〉을 보고 쓴 리뷰에서 그녀의 전막 프로덕션을 국내에서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었다. 그것이 채 1년도 되지 않아 광주시립발레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공동기획으로 실현된 것은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예술감독이 교체되는 상황, 그것도 합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모처럼 습득한 귀한 레퍼토리를 사장시키게 된다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광주시립발레단의 전진과 발전을 위해 관계자들의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04.
사진제공_광주시립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