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학술 논단
우리 시대의 문화전문지들
김태원_춤비평가

 1970년대와 지적 변혁기: 문학계간지들과 『연극평론』·『한국연극』·『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 1908~1985)의 「신문화 형성에 영향 미친 잡지들」이란 긴 길이의 논고는 1908년에 발간된 최남선의 『소년』지와 1914년에 발간된 『청춘』지란 한국잡지의 현대적 시발이 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1950년대 중반 이후 『명랑』과 『아리랑』지와 같은 상업적 대중지가 나오게 되는 긴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서 물론 『창조』(1919)·『폐허』(1920)·『시인부락』(1936) 그리고 『문장』(1939)·『인문평론』(1941)과 같은 문학지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개벽』(1920)이나 『신동아』(1932)와 같은 종합지적 성격을 갖는 잡지도 적지 않다. 또 프로작가동맹(카프)이 발행한 『문예운동』(1926)이나 김석민이란 이가 발행했다고 하는 『영화연극』(1955)과 같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잡지들도 상당수 그 구체적 잡지명을 들어 글 속에서 나열되고 있다. 필자가 어느 특정한 잡지를 들어 그 특성이나 문화적 중요성을 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아―가령 1953년에 장준하가 발행하여 50년대와 60년대 한국 지식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종합 정치·사회·문화지인 『사상계』와 같은 경우―아쉽긴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특별한 지적 편견을 가지지 않고 조사해놓은 것만으로도 매우 인상적인 작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글의 발표(1959) 이후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비교적 친근하게 접해보고 있었던 잡지들이 나타나게 된다.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화교양지 내지 비평전문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그 잡지들은 대표적으로 1966년 들어 발간되기 시작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건축전문지인 월간 『공간』, 그보다 좀 앞서 작고한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발행한 『영화예술』(1965)과 같은 잡지들이 있는데, 특히 『창작과 비평』은 1960년대 한국·일본 간의 역사적 앙금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 측의 대일청구권 문제라든지 60년대 중반 한국군의 월남 파병 이후 미묘해지고 또 어려워진 한·미 간의 문제 등 현대 대학민국의 주권(主權) 문제와 연관, 이른바 ‘전환 시대의 논리’란 명제로 맹렬한 논필(論筆)을 휘두르던 이영희와 비판적 사학자 강만길 등을 내세워 당시의 글이 젊은 세대층에 강하게 어필했다. 그러면서 정치한 문장력을 가진 백낙천·염무웅·구중서와 같은 문학평론가들과 신동엽·김지하·신경림·민영과 같은 시인들, 그리고 방영웅·황석영·이문구와 같은 소설가들, 이른바 ‘민족·민중파(民族·民衆派)의 문인들’이 한 문화적 세력을 이루면서 비판적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의성(時宜性)을 지닌 아카데믹한 논문을 중시하며, 특히 현대적 리얼리즘 문학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일반에도 폭넓게 관심을 쏟고 있는 이 잡지의 편집 방향이나 지적 맥(脈)으로서는 그 전 시대의 『사상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측면 지적 사유의 폭이나 감성의 폭은 완고하고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특별한 쟁점(이슈)들―민족·민중문학론이나 리얼리즘론―을 중심으로 지적 논리성을 동원하면서 문화적 힘을 모으는 응집력의 측면에서는 과거보다 더 전문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60년대 후반 그런 문제들에 민감하던 나름대로 지적으로 꽤 성숙했던 한 친우(親友)가 그 잡지를 들고 다니던 것을 보았을 뿐, 가까이 접해볼 기회를 놓쳤다. 대신 오히려 80년대 후반, 이른바 민주화의 열기가 한껏 고조되었던 시기 이후와 90년대에 들어서 두툼한 부피의 그 잡지를 모(母) 출판사인 창비사 발행의 전문서적과 함께 종종 구입해 읽고 있다. 그러한 60년대에 창간된 『공간』지와 작고한 영화평론가 이영일 선생이 이끌던 『영화예술』은 나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어서 조금 있다 언급하겠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60년대의 그 기운을 이어가며 내 개인에게 적지 않은 지적 자극을 준 두 전문비평지와 만나게 된다. 모두 1970년도에 발행된 비평계간지인 『문학과 지성』과 『연극평론』이 그것이다.
 이 중 『문학과 지성』은 아쉽게 40대 후반에 타계한 김현을 비롯, 김병익·김치수·김주연·오생근·김종철(초기) 등 비교적 열린 감성을 가진 문학평론가들이 주도하여서 『창작과 비평』과는 좀 달리 문학적 문제점들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다. 김현·김윤식 공동집필에 의한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김수영을 비롯 고은·정현종·황동규·오규원·강은교·이성복·김명인·장영수 등의 시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시적 감수성에 대한 문제 등이 넓게 거론되면서, 잡지의 분위기는 어떤 ‘지적 도그마’를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김현의 현대불문학과 연관된 지적 탐구는 당시에 매우 조숙했고, 또 그 깊이에 있어서 놀랄 만했는데, 그것을 담은 그의 문체 또한 매우 매력적이어서 은연중 우리 산문체에 있어서 ‘김현 스타일’이라 할 만한 것을 유행시켰다.
 그런 김현을 포함, 여러 동인들은 김윤식을 비롯 정명환과 같은 문학연구자들과 이기백·차하순·김학준과 같은 여러 인문학자들을 잡지에 끌어들이면서 4·19 이후 첫 한글세대로서 문학을 한다는 문화적 자긍심과 함께 편집에 있어서 4년 앞서 발행된 『창작과 비평』과 ‘묘한 대립각’을 내세웠다. 그 시기에 이 잡지는 핸디하고 화사한 장정을 단 당시 민음사 발간의 좀 확대된 문고판형 시집 발간(그 속에는 A. 랭보, G. 아뽈리네르, E. 파운드 등 ‘세계명시선’ 포함)과 맞물리면서, 또 김수영·황동규·정현종·이성복·김광규·강은교와 같은 시인들이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면서 비평가들이 주도하는, 순수 문학비평지(물론 그 안에는 『창작과 비평』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믹한 논문과 소설 등이 실렸다)로서 위세(威勢)를 높였다.(이 시기에 그와 다른 흐름에서 시문학의 대중화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서정시인 박목월이 1972년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심상(心象)』지다. 박목월·박남수·박재삼·이건청 등 전통적인 서정시인들이 관계했던 이 시지는 당시로서는 퍽 세련되고 고급스런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창작과 비평』은 민중·민족주의적 색채를 더 짙게 가미시켰고, 『문학과 지성』은 자유로운 인문주의적 색채를 더 강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두 잡지 모두 1980년 군사정권하 언론통폐합 조치에 의해 폐간되게 된다.(이후 『창작과 비평』은 1988년 같은 제호로 복간했고, 『문학과 지성』은 『문학과 사회』로 제호를 바꿔 역시 같은 해부터 발행되었다.)
 한편 극평가 여석기(呂石基, 1922~2014)가 주도한 『연극평론』도 그 같은 문학계간지의 바람을 등에 업고 싶었으나 실상은 그렇질 못했다.
 이 전문지는 1970년대 10년 정도 지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계간지로서 40호의 발행이 아닌 실상 20호의 발행으로 그쳤다. 문학과 달리 연극은 폭넓은 지적 독자층을 못 갖고 있었고, 당시 대학 전공과목으로 연극을 택하고 있는 대학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시발은 매우 알찼고, 당시 지적으로 곤궁하던 연극계에 큰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현재는 원로 연극사가(史家)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유민영의 근대 극작가 탐구, 국문학자이기도 한 조동일의 탈춤이 갖는 연극성에 대한 분석, 극평가들인 여석기·한상철에 의한 해외극의 최신 동향들에 대한 소개와 관련 논문들의 번역(아르토의 잔혹극, 서구 연극학자자들의 동양 연극 연구, 기타 아방가르드적 실험극과 관련된), 이상일·송동준·양혜숙과 같은 독문학자들에 의한 브레히트적 서사극 이론 소개 그리고 합평(合評)방식에 의한 시즌별 연극계의 활동에 대한 점검 등이 그랬다. 그러면서 한상철은 자신에게 늘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 극평론가 에릭 벤틀리의 『연극의 생명(The Life of Drama)』(1964)을 10회 정도 번역·연재하는 한편(아쉽게도 그 절반에 그쳤다), 연극연출가요 영문학자이기도 한 정진수 등과 함께 해외 단막극들을 번역해 실었다.
 당시 군사정권 아래서 국제적인 문화정보는 일간지 지면과 당시 대중들에게 급격히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스포츠지의 지면 속 토막기사들(대부분 『뉴스위크』지나 『타임』지를 인용했다)뿐이었고, 전문연극 서적 또한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더불어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 서구 명작 희곡들도 대부분 장막물로서 60년대부터 발간되기 시작했던 을유·정음·신구 문화사 등이 발간한 교양문학전집에 끼어, 실려 있는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연극평론』은 연극 관련한 전문지식의 제공의 측면에서, 또 ‘어떤 새로운 바깥 것’(해외물)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채워주었다.
 그런데 발행자였던 여석기, 편집주간자였던 한상철 선생(모두 고인이 되었다) 모두 영문학자요, 대학교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관계로 잡지의 편집과 발행에 전력(全力)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필자들도 아카데미즘 안에서, 영문학자나 국문학자와 같은 어문학자들(이근삼·이태주·서연호 같은) 중심으로 찾으려 한 탓에 그 편집이나 주제의 폭이 좁아졌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겨울(20호)가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잡지가 있음으로써 70년대 한국연극의 모습은 지적으로도 당시 한국연극이 부딪히고 있었던 문제점들―우리 전통에 대한 해석과 그것이 서구극이 만나, 형성되는 제3세계적 한국 현대극의 쟁점과 그 주제성의 측면, 아방가르드적 실험극의 측면, 또 소극장 연극운동 등의 측면―을 드러내면서, 또 향후 지적으로 채워가야 할 여러 주제들을 함유해가면서 어느 일면 치열했다 할 수 있다.
 이 이후 이 잡지는 1990년대 들어 연극평론가 김윤철에 의해 복간, 첫 발행자 여석기의 호를 따 ‘기촌(耆村)연극상’을 제정하면서 현재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회지(계간)로 이어지게 된다.
 그 같은 70년대에 특히 연극과 무용과 연관되어 두 개의 월간지가 거의 동시에 발행된다. 하나는 예총산하 한국연극협회가 발행하게 되는 『한국연극』지요, 다른 하나는 무용평론가요 방송언론인인 조동화가 개인적으로 발행한 『춤』지이다. 모두 1976년에 발행된 이 잡지는 현재까지 거의 결호(缺號) 없이 지속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보기 드문 월간 전문지로 『한국연극』은 원로 연극연출가요 당시 협회장이었던 이진순(연출가)과 차범석·김정옥·김의경·김재형과 같은 연극실천가들과 기획·제작자들이 힘을 모았고, 『춤』지는 당시의 여러 공연문화 지성들인 이두현·김경옥·박용구·강이문·정병호와 같은 이들이 힘을 보태었다. 두 잡지의 창간 시기에 좀 앞서 1973년에 발족된 문예진흥원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중했던 두 잡지를 두 예술장르의 공식 대변지로 간주, 꾸준한 제도적·물적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연극』지는 오늘날 협회의 회지로, 모든 회원들에게 열려 있는 일견 민주적 매체로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도드라지는 기획력과 아이디어(특히 잡지의 창간에 일조한 극작가 김의경이 협회장 재임 시)에 의해 연극계의 여러 이슈들―80년대 후반의 경우, ‘연극 표현의 자유’ 등―을 쏟아놓고 정책적 제안을 모색하는 잡지로 활발히 기능했다. 그와 함께 연극평론가들에게 골고루 지면을 배당, 다수 평론가들의 활동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기관지가 그렇듯, 잡지는 확실한 주인(발행자 혹은 편집자)이 없을 경우, 잡지와 기고자와 관계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끝나게 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연극』 매호 안에는 비평적으로나 교육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참고할 만한 적지 않은 기사들이나 논고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 관계자들이 지적 종사자들은 그것을 잘 거론하지 않고 있고 제때 정리해놓고 있질 않은 것 같다. 기사들 중 여러 연극원로들과 대담, 몇 번에 걸친 소극장 특집,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중극장이나 장소-특성적 연극에 대한 것, 또 동구권 명(名)연출가들에 대한 분석적 소개와 현대 일본극에 대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곤 하나, 그것들은 그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공터 속 놀이기구들과 같이 놔두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무엇인가 이념과 가치를 지향해나가야 할 것과 회원들을 위한 민주적·수평적 요구 사이에서 이 잡지는 모호하게 놓여 있는 듯싶다. 그간 차범석·김정옥·임영웅·김의경을 포함한 현장의 여러 연극인들과 이태주·한상철·이상일·김문환·김방옥·심정순·이미원·김미도·김윤철·김진아·김숙현·김기란·전정옥·백로라 등 거의 모든 연극 평론가들이 이 지면을 채웠다.
 그에 비해 『춤』지는 6·25동란 중 한무리의 무용예술인들을 이끌기도 했던, 서울대 약대 출신의 경험 많은 한 사람의 발행인이자 편집자인 조동화(趙東華, 1922~2014)에 의해 1976년 3월에 발행되기 시작해서 그의 사망 시기(올해 4월)까지 한 사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되면서 유지되어 왔다. 일반적인 무용이 아니라 ‘무대화되는 극장춤’에 대한 비평적 평가와 그것을 둘러싼 춤사회에 대한 지적 계몽을 목표로 한 이 잡지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많은 춤전문 평자를 발굴해내었고 춤예술을 둘러싼 문화계와 꽤 긴밀히 교류해왔다. 그렇게 그 지면을 통해 전문적인 춤리뷰를 했던 이들은 박용구·강이문·이순열·김영태·채희완·김태원·이종호·김채현·김경애·장광열·성기숙과 같은 이들이고, 여성 번역자 이덕희를 비롯, 이두현·김경옥·정병호·이원경·차범석·김정옥·송정숙·한상우·이보형·정진수·고승길·이건용과 같은 이들은 지면을 변화 있게 채웠다. 그 태생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되었지만, 현금의 문화적 세(勢)에 있어서는 열세에 처해 있는 춤을 하나의 현대적 문화형태로 부각시키기 위해 ‘비평’이란 지적 무기를 쓴 발행자 조동화의 선택은 매우 과감하였고, 그런 만큼 그 선택은 1980~90년대에 춤이 연극과 더불어 가장 대표성 있는 현대적 공연예술로 자리 잡게끔 했다. 그 같은 지성적 후원에 힘입어 송범·임성남·육완순·홍정희·홍신자·김매자·이정희·김복희·최청자·국수호 등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극장예술가로 떠올랐다.
 이 잡지의 편집에 있어서 처음 읽게 되는 권두좌담은 자유로운 가운데 대담자들 사이에 다양한 입론(立論)이 시도되었고, 그런 중에 관료적 춤제도에 대해, 그리고 일부 무용가들에 대해 가혹한 비평을 가하기도 했다. 리뷰는 1980년대 중반까지 작품에 대한 인상적 스케치와 함께 일종의 국외자적 관점(잡지 간행의 초반기에 춤리뷰를 많이 썼던 박용구·이순열·김영태와 같은 이들은 음악평론가들이거나 문학자였다)에 의한 계몽적 훈시성을 띠었으나, 그 이후는 점차 분석적이 되어갔다. 그런 중에 시인이기도 했던 김영태의 춤리뷰는 문학평과 다른 춤이란 한시성의 예술에 대한 특별한, 개인적 스타일로 쓰여진 많은 양의 기록문들을 남겼고, 민중연희운동가이며 미학자이기도 한 채희완은 1980년대 초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라는 대담 프로그램을 통해 관련 전문인이나 석학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춤을 중심으로 한 한국문화 고유의 미학을 깊이 있게 규명하려 했으며, 8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포스트모던 미학을 공연예술적 측면에서 소개하고 분석한 김태원은 ‘춤문화’라는 폭넓은 관점에서 춤의 사회적 위치 놓임과 춤예술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문화적 기운을 지적인 측면에서 크게 고무시키기도 했다.
 이 같은 『춤』지에는 발행인이 보수적인 편집체제(신국판의 판형을 가진 이 잡지는 상당 기간 납(鉛) 활자체를 쓰면서, 편집에 있어서 세로쓰기를 고집했다) 속에 춤을 비롯, 짧지만 매우 다양한 문화적 발언과 시평들이 실려 있어 70년대 중반 이후 급변하던 한국 지성사 내지 문화사 연구에 활용의 가치가 높다 하겠다. 그런 중에 순수전문지로서 가질 수 있는 한계점과 함께 그 편집과 운영에 있어서 1인 발행인이자 편집인이 가질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극명히 노출시켰다 하겠다.




 종합문화예술지 『공간』

 

 이 시기와 겹쳐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에 의해 1966년에 창간된 『공간』지는 처음 건축·미술을 다루는 전문지로 발행되었으나, 곧 김수근 개인의 한국문화에 대한 포용력 있는 미적 안목이 결합되면서 이 잡지는 우리의 전통예술과 연극·무용을 함께 다루는 종합예술지가 되었다. 그와 함께 1974년, 원서동 사옥의 지하 공간에 소극장 ‘공간사랑’을 마련, 우리의 전통문화 속 사랑방 개념을 표방하면서 그 속에서 각 지역의 굿, 춤 등을 기획해서 올렸고 1977년부터는 극장 안에 가변성의 의자들을 배치, 연극과 무용공연들을 수용했다.
 잡지는 김수근의 건축물이 보여주듯 ‘모더니즘적 취향’과 ‘지역주의 미학’을 혼합, 우리의 문화가 그 구조에 있어서 결코 서구처럼 단일화되지 못하고, 중층화(重層化)·복합화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곧 그 속에는 모더니즘, 각종 아방가르드 미학, 포스트모던 미학이 함께 이론적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의 예술현장에 실천적으로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줌과 더불어 우리의 여러 전통문화의 유산도 쉽게 소멸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여러 건축이론가들과 미술에서 이경성·이일·오광수·정병관·홍가이와 같은 이들이 모던적 가치관 아래서 그 지면에서 평필을 휘둘렀는가 하면, 한걸음 물러나 박용숙과 같이 한국문화의 원형을 파악하려는 이, 또 현대적 예술행위에 대해 열려 있는 감각을 가졌던 황병기(국악연주자)와 김영태(시인) 같은 이, 그리고 각종 민속연희 이론가들(정병호·심우성·이보형·서연호)도 폭넓게 필자로 참여했다. 그런 가운데 원로 평론가 박용구와 같이 서울올림픽 후 1990년대로 접어든 시기 ‘문화입국(文化立國)’을 내세우며 보다 큰 시각에서 한국문화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려는 이도 있었다.
 나는 1978년 1월, 76극단의 연출자로서 공간사랑에서 자유극단의 『상자 속의 사랑이야기』(김정옥 연출), 『춘풍의 처』(오태석 작·연출)에 이어 한 단막극을 2주 가까이 올린 후, 1985년~90년대 초까지 『공간』지의 필자로, 또 전문위원으로 이 잡지와 관계를 맺었다. 이 지면을 통해 1985년 3월, 미국 뉴욕에서 1984년에 있었던 독일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역사적인 뉴욕 데뷔 공연을 분석해 실었고(「피나 바우쉬, 혹은 열린 사랑의 동력(動力)」), 또 뉴욕 중심의 일련의 포스트모던춤운동(특히 1987년 1월호에 실린 「후기현대 실험춤의 주역들: 피나 바우쉬, 캐롤 아미타지, 에이코와 코마」) 등을 소개시켰다. 그러면서 급격히 거대화되고 있었던 서울의 건축물과 올림픽 문화환경에 대한 건축비평도 두 편 시도했다. 더불어 창고극장·에저또극장·실험극장·민중극장·민예·공간사랑·76극단·연우무대에 대한 ‘한국 소극장운동, 70년대 이후의 맥(脈)’을 대담형식으로 각 주제당 원고지 150~200장 분량 안에서 8회 연재했으며(1987년 3월~1988년 7월), 80년대 한국연극의 상황을 비평적으로 검토하는 두 차례의 특집기획(1989년 3월호 ‘80년대 연극, 70년대보다 후퇴했는가’와 6월호의 ‘80년대 연극, 무엇이 달라졌는가’)을 당시 여성 편집장이었던 김해양 씨와 함께 진행시켰다. 이 시기 현대 공연예술 관련한 특집과 비평란에는 포스트모던 공연예술의 경향에 밝았던 연극연출과 김우옥과 현대무용 안무가 박일규, 그리고 관련한 해외 소식에 밝았던 극평가 한상철과 미학 전공의 춤평론가 김채현 등과 같은 이들이 참여했고, 김영태·박조열·이종호·이강렬·김승옥과 같은 이들이 공연 관련한 지면을 채웠다.
 1986년 김수근의 사후 5~6년간 『공간』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수준 높은 종합예술지로 큰 역할을 했는데, 이 중 재미 철학자 홍가이가 미술평론의 영역에서 C. 그린버그 등 모더니즘의 이론을 재검토하는 작업을 펼쳤고, 김태원이 공연예술에서 포스트모던 미학의 소개와 그 한국적 수용을 비평적으로 검토했었다. 홍가이는 극작에도 관심을 보여 『노스토이』와 같은 자작(自作)의 희곡을 가지고 헝가리의 저명한 영화연출자 미클로시 얀초와 의욕적인 야외공연을 올림픽 기간 동안 시도했다.(그를 도왔던 국내 안무자는 국수호였다.) 이후 90년대에 얼마쯤 접어든 시기 2대(代) 공간사주이기도 했던 김수근의 수제자 장세양이 과로(過勞)로 급서하면서 잡지는 종합예술지에서 건축전문지로 변했고, 여타 한국의 문화예술계와도 멀어졌다. 스승 김수근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체구와 남성다움을 가졌던 장세양(부산 경남고 출신)은 스승이 남긴 유·무형의 채무들을 제대로 갚지 못한 채 그 또한 일찍 세상을 떴던 것이다. 신년이면 그가 직접 먹으로 그린 한지 드로잉 연하장을 여러 필자들이나 공간과 관계된 이들에게 부쳐주곤 했던 퍽 다감(多感)한 품성을 가졌던 이였는데….



 1980년대 후반의 황금기: 『객석』·『예술과 비평』·『음악동아』·『문화예술』

 

 한국잡지사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그 같은 1985년~1990년대 초 즉 김영삼의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가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끼어 있는 시기여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문화화의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이 ‘문화화의 욕구’는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졌던 군사정권의 폐쇄적 분위기가 와해되기를 원하는 이른바 민주화의 욕구와 맞닿아 있으면서, 보다 내적으로는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또 일반 시민은 시민대로 보다 높은 수준의 교양과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욕구와 또한 맞물려 있기도 했다. 이 때 때맞춰 건축붐을 탔던 한 재벌회사(신동아그룹)는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객석』지를 1984년에 창간했고, 서울신문사는 언론사로서 타산이 전혀 맞지 않을 『예술과 비평』과 같은 비평전문 계간지를 1988년에 재간행(창간은 1994)했다. 동아일보사 또한 『음악동아』라는 수준 높은 음악교양지를 만들었다. 문예진흥원 또한 1974년부터 간행되던 『문화예술』이란 잡지를 격월간지 혹은 월간지로 변화시키면서 활발히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객석』은 음악 중심의 대중 교양지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국악·양악·무용·연극에 대한 시평(詩評)란을 마련, 월별로 국내 공연현장을 비평적으로 점검하면서 여러 가지 특집을 통해 비평문화를 활성화시켰다. 그 속에서 우리 70~80년대 문화가 그렇듯, 우리의 공연예술에서도 어떻게 ‘한국화’란 바람직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늘 그 중심 주제였으며, 음악을 포함하여 여러 공연예술들의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보다 어떻게 발전된 공연문화의 형태(식)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자주 다루어졌다. 그 관련하여 음악에서 이강숙·한명희·한상우·강석희·이건용·이만방과 같은 이들이 활발히 논의를 펼쳤다. 그러던 중에 80년대 후반에는 동구권에 대한 문화 개방과 더불어 월북예술인들에 대한 점증되는 관심 속에 한국의 공연문화사(史)에 있어서 이데올로기 편향성이 가져온, 지적 무관심을 얼마쯤 비판할 필요가 있어졌다. 1930년대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 연극운동사를 ‘잃어버린 공연예술사를 찾아서’란 기획명으로 조감하려 한 극작가 이강렬의 연재물이 이때 높은 관심을 끌며 읽혀졌다.(그 후 이 연재물은 『한국사회주의 연극운동사』란 제명으로 도서출판 동문선에서 1992년에 발간되었다.)
 그런 한편, 『객석』은 또 공연비평활동을 진작키 위해 ‘객석평론상’을 신설, 다수의 현장평론가들을 발굴해내기도 했다. 연극에서 김미도·장성희, 무용에서 허영일·이병옥·성기숙, 음악에서 박선희, 전통예술에서 진옥섭 등이 그들이며, 현재 춤평론가와 기획자로 활동 중인 장광열은 이 매체의 기자로, 또 편집자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이 매체를 통해 국내 ‘춤전문기자 1호’가 되었다. 나는 그 같은 『객석』지에 춤비평 관련한 여러 시론과 월평을 이 지면에 썼고,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일본 공연,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이나 진로 문제, 그리고 뉴욕 중심의 국제공연축제 등에 대해서 적지 않은 글들을 기고했다. 그런 『객석』으로 인해서 한국의 공연문화는 대중(大衆)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한편 전문 평자의 입장에서 비평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늘 두 가지다. 어떻게 하면 지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그에 상응한 물질적 보답이나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업지나 신문의 경우는 늘 지면 제한이 따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신문지면에서 원고지 10매 분량 이상, 그리고 잡지의 지면에서 원고지 20매 이상을 쓸 수 있다면 그(녀)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와 같은 공연평론가에게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들어서 큰 도움을 주었던 잡지는 앞서 언급한 『객석』 외에, 『예술과 비평』·『음악동아』·『문화예술』과 같은 잡지들이 있었다. 『객석』을 제외한 세 잡지 모두 공공성을 띤 기관이 운영하기 때문에, 원고료를 개인이나 어려움을 겪는 잡지사가 주는 것보다 훨씬 후했고, 또 지면의 사용에 있어서도 여유가 있었다.
 90년대 들어 얼마쯤 지나 폐간되었지만 서울신문사가 운영한 계간지 『예술과 비평』은 예술이론 내지 비평을 심도 있게 수용하는 논단과 시평(時評)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논단은 원고지 100매 내외의 분량을 갖는 논고를 여러 편 실었고, 시즌별로 예술 현황을 점검하는 시평도 원고지 분량 40매 정도까지 허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자로서 받는 원고료도 꽤 됐다. 나는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 관련한 특집에서 (편집부가 붙인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현대춤과 포스트모더니즘」(89년 가을호), 그리고 90년대 들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특집에서 「우리 것에의 믿음과 예술대중화」(90년 봄호)란 논고를 발표했고, 무용과 관련 몇 번의 시평을 썼다.(나와 함께 춤과 관련한 지면을 채웠던 이는 김채현이다.) 필자들은 대부분 각 예술의 영역에서 ‘이론’을 겸비하고 있던 이들(김문환·김종원·양혜숙·서성록 등)이어서 내용은 아카데믹했다. 신문사(당시 발행인·서기원)로서는 어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익의 차원에서 일을 할당하다 보니 이 잡지의 편집은 거의 1~2인이 맡아했다. 그 중 편집 실무의 책임을 맡았던 김문 기자는 성격이 털털하고 시원스러워서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졌고, 그가 종종 공연예술 관련한 ‘필자 찾기’가 힘들었을 때 몇 사람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예술과 비평』은 또한 서울신문사 제정한 ‘서울 예술평론상’을 시행하고 있어서 나는 1987년 이태주(연극평론), 이용관(영화평론)과 함께 4회째 수상자로 추천되어 상(賞)을 수상했다. 서울신문사는 이 잡지를 시중의 가판대에도 깔아 보았지만, 그 수요가 기대보다 너무 적어 결국 출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다. 잡지 속 글들 또한 그러기에는 너무 학구적이거나 무거웠다. 공신력 있는 신문사가 운영하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복간되었으면 싶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지성적 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듯싶다.
 『객석』과 다른 시각을 가졌던 월간 『음악동아』는 나와 우연히 인연을 맺었다. 그 계기는 볼쇼이발레단 내한 공연에 대한 리뷰를 의뢰받고서부터였다. 서울올림픽 이후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문화교류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그곳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 볼쇼이발레단의 내한 공연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때 관심사였다. 나 또한 그때 그에 대한 충분한 자료나 정보는 없었다. 그러나 내 직감(直感)으로는 첫 번째나 두 번째로 앞서 오는 볼쇼이라는 이름의 발레단은 어쩐지 미덥지 않아보였다. 말하자면 숨겨놓은 진짜의 전초병(前哨兵) 같았다. 나름대로 유명한, 그러나 다소 철 지난 발레리나 한두 명 정도를 앞세워놓고, 그 주변의 군무진(흔히 ‘꼴드바’라고 부른다)들을 적절히 배치해놓은, 그런 점에서 첫 내한이라고 선전했던 단체는 적당히 단원들을 추출해서 제대로 앙상블이 다져지지 않은 채 내한하는 볼쇼이의 2진(陣)이라 할만했다. 그런 점 때문에 나는 그 발레감독으로 왔던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유리 그리고로비치와 그 단체의 스타인 니나 스미조르바가 포함된 이른바 첫 볼쇼이발레단의 공연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은’ 평을 『음악동아』(1990년 5월호)에 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발레단을 초청한 곳의 기획책임자란 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삼성문화재단 임원으로 호암아트홀을 관장하고 있는, 공연예술계에서는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전화에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야심적인 기획물에 상처를 냈다는 식으로, 거의 협박조의 발언을 했다. 나 또한 터무니 없이 비싼 티켓비(당시의 달러화로 계산해보니 150~200불)를 받으며, 급조한 발레단을 데려왔다고 맞받아쳤다. 그 일 이후 곰곰 생각해보니 결국 그것은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싸움이었고, 나는 알게 모르게 『동아일보』의 편을 든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의 평이 옳았다는 것은 그 이후 니나 스미조르바를 포함한 명실공히 대규모의 볼쇼이발레단이 서울을 정식으로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물론 평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 탓에 『음악동아』와 나는 공동운명체인양 얽혀 1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갔다.
 사실 그런 ‘덫’을 놓은 이는 당시 『음악동아』의 편집부 일원이기도 했던 작고한 제주 출신의 시인 김광협이었다. 그는 내 볼쇼이 리뷰 원고가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나에게 매달 원고지 50매 정도로, 6회 정도로 한국춤계의 전반적인 예술적 흐름을 짚어주고 그 문제점을 거론해주길 바랐다. 일단 원고지 50매의 분량은 일반 잡지사가 그때 나와 같은 젊은 무용평론가에게 제공할 수 있는 지면의 최고 한도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편집부의 최고 책임자는 선배 무용평론가이기도 한 이순열 선생이었다. 나는 그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몰랐으나, 일단 해볼 만한 글쓰기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여 수락했다. 글은 내가 한두 번 발표한 논고 속, 또 내 이름의 컬럼 속에 지적해왔던 것들을 재요약·정리하면서 포스트모던으로 전환된 한국 현대무용의 스타일상의 문제, 예술적 수준에 있어서 분명히 자리매김해지지 않고 있는 한국창작춤의 문제, 또 클래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할 한국창작발레의 문제들을 비판적 분석을 곁들여 대안을 제시하며 다루었다. 나로서 그 같은 주제는 언젠가 다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어느 일면 심적 압박을 느끼면서도 솔직히 춤평론가로서 어느 정도 보람을 느꼈던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시인 김광협은 내가 매달 원고를 전해주려 할 때면 원고료 수령상의 절차적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는지, 이미 내 원고료를 챙겨들고 근처 술집에서 반쯤 취해 앉아 있곤 했다. 제주 출신인지라 돌하루방같이 그의 얼굴이 넓고, 유난히 낯빛이 검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획물이 끝난 후 그가 간암으로 병사(病死)했다는 소식을 그 후에 들었다. 언젠가 거나하게 취한 그를 따라 그의 집을 밤늦게 찾아가기도 했는데, 그때 그는 시립대학에서 쓴 석사논문(시에 관한 주제는 아니었고, 도시환경이나 행정에 관한 주제였다) 한 편을 전해주며, 미꾸라지탕을 후루룩거리며 마시면서 내게 권하곤 했는데, 그때 실상 간암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마치 소설가 ‘이상(李箱)의 시대’로 돌아간 듯한, 얼마쯤 어둡고 데카당한 기분이 내게 한동안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잡지사나 신문사 여기저기에 문인(文人)이나 예술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늘날 문화예술위원회라 불리우고 있는 (구)문예진흥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도 생각나는 문인이 몇 떠오르는데 대부분 시인들이었다. 박제천·조정권·김용범·하재봉과 같은 이들이 그들로서 모두 예술교양강좌 진행이나 공연예술 관련한 문화정책의 수행과 관련이 있었고, 따라서 나는 자문위원으로, 예술강사로, 그리고 『문화예술』지나 『문예연감』의 필자로 그들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부장급이었던 박제천과 조정권은 노장(老莊) 등 동양사상을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시작(詩作)을 문예지에 펼치고 있었고, 김용범은 70년대 『심상』지에 데뷔해서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산문적 시를 썼으며, 하재봉은 초현실주의적 감성의 시를 쓰면서 포스트모던적 행위성(퍼포먼스)을 곁들여 자주 자신이 기획한 시낭독 행사를 벌이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정한모·여석기·서기원·차범석과 같이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로 이어지면서 진흥원의 원장을 역임했던 이들은 모두 문인이나 비평가들(정한모·여석기)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평자들에 대한 원고료 지불의 측면에서는 『문화예술』이나 일 년에 한 번 발행되던 『문예연감』은 인색치 않았고, 따라서 젊은 평자들에게는 무시하지 못할 수입원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두 출판물이 대부분의 경우 원고지 30~50매 분량의 적지 않은 글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고료는 일단 쓰여진 글에 대해서는 월말경에, 지나치게 늦지 않게 정확히 계좌로 이체되었다.
 『문화예술』지는 주로 문화정책과 연관된 주제를 다루고 『문예연감』은 한 해 예술활동을 총정리·총평하는 지면인데, 나는 늘 이 두 작업이 실제 무대에 오르는 공연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근자에는 그 두 가지 출판물을 잘 볼 수가 없다. 2000년대 초반까지 월간으로 발행되던 『문화예술』은 문예진흥원이 ‘문화예술위원회’로 개칭(2005)하면서 비싼 내지(內紙)에, 화사한 장정으로 디자인되어 몇 번 계간지로 나온 바 있었고 (그 제작비는 일반 출판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문예연감』은 얼마까지만 하더라도 책의 후반부에 예술자료 부분을 디스켓에 담아 붙여 책과 함께 몇 번 배포하더니, 이제는 그 모두를 디스켓에 담아 올해부터 전산화해서 배포한다고 한다. 컴퓨터를 통해 찾아서 볼 사람만 보라는 투다. 그런데 현재 우리 문화예술계의 예술 인력과 지적 인력이 적지 않게 고령화되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출판물의 형태로 배포해야 할 것은 배포해야 한다. 경제적인 규모로 말이다. 말하자면 온(on), 오프(off) 그 모두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최근의 한 조사는 50~60대 이후 절반가량은 실제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다.)
 인쇄 출판물이 갖는 장점이나 미덕도 많다. 전산처리처럼 자칫 잘못해서 자료가 소실될 우려도 없고, 글을 쓰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어떤 역사적 감각을 키우는 이점도 있다. 또 평론가·편집자·교정자를 포함한 여러 유형의 문화적 인력이 그 같은 작업을 통해 모여들어 소통하고, 훈련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여러 문인들의 관심과 보이지 않는 후원 아래 90년대 『예술평론』지와 『문예연감』의 편집을 도맡아 하면서 그것을 매호 매호 편집·제작해내었던, 다소 마른 체구와 용모를 가졌던 진흥원의 여성 편집실무자 이혜경 씨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다른 평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오전 10시가 넘자마자 다소 다급한 듯 원고 청탁을 하며 걸려오던 전화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1990년대와 대중문화 시대: 『영화예술』·『공연과 리뷰』·『씨네 21』·『극작에서 공연까지』

 

 그런 한편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로 이행한 가운데 순수예술보다 대중문화가 서서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여파 탓에 1970~80년대까지 순수예술의 영역을 고수하던 예술장르들도 나름대로 ‘대중성 획득’을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대중문화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영화가 많은 문화인들과 지성의 관심이 되었다. 더불어 텔레비전도 그 환경구성이나 색조가 점점 세련화되면서 그 속의 드라마는 늘 일상 속의 화제를 점하게 됐다. 이런 시기에 영화평론가 이영일(李英一, 1932~2001)은 1965년 창간했다 1972년 휴간(休刊)했던 『영화예술』을 월간으로 복간(1990)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물론 텔레비전드라마를 포함한 영상문화를 문화교양의 차원 다룬다고 밝혔다.
 사실 나는 내가 연극활동에 뛰어들기 전 1973~1975년 사이에 선생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고(故) 하길종의 영화를 위해 대본작업(『바보들의 행진』 전. 그러나 작업은 사전 검열에 걸려 폐기되었다)을 도와주면서, 그리고 지금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그 시대에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던 박남수 감독의 연출부에서 짧게나마 일하면서 영화계 주변을 출입했다. 그때 남산 드라마센터 아래 녹음실이었던 한양스튜디오 건물 안 커피숍에는 유현목·이영일·하길종·김호선과 같은 영화인들이 늘 있었다. 이 중 이영일 선생은 영화감독 등 영화인들과 다른 지적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 또한 1964년에 간행된 선생의 『영화개론』을 늘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선생은 유현목·신상옥·김기영 세 영화감독을 작가주의적(作家主義的) 시각에서 엄격히 평가하면서, 현대 한국영화의 ‘세 지렛대’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선생을 1980년대 후반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몇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품 시사회가 있었을 때 다시 만났다.(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밝은 바바리코트 걸친 건장한 체구였던 선생과 나는 마침 선생이 뉴욕에서 만나보기를 원했던 미국의 작가주의적 영화평론가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 1928~2012)의 병문안을 함께 갔었다. 마침 A. 새리스 교수는 컬럼비아대학과 예술대학원(영화학과) 속 나의 은사 중 한 분이었고, 나의 석사논문을 지도하던 존 벨톤(John Belton) 교수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영구직을 얻지 못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 논문지도교수를 이어 맡았다. 병상에서 새리스 교수는 자기 병명은 정확히 알 수 없고, 병원비는 컬럼비아대와 자기가 60년대부터 인연 맺었던 예술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The Vellage Voice)』지, 그리고 헐리우드로부터 자기도 모르는 한 독자가 돈을 보내온다 했다.(이른바 얼굴 모르는 ‘천사’다!)
 컬럼비아 학부와 대학원에서 나는 새리스 교수의 강의를 두세 학기간 들었는데, 거기서 나는 할리우드 영화 장르의 미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주로 존 포드, 오손 웰스, 프랑크 카프라, 존 스터지스, 하워드 혹스, 히치콕 등의 영화에 대해서다. 그때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영화학이 이른바 각종 ‘이론들(theories)’에 많이 감염되어 있었을 때, 그는 수업 시간에 자신의 영화비평관에 영향을 준 두세 가지 점밖에 말하지 않았다. 하나는 앙드레 바쟁에서 프랑수아 트뤼포로 이어지는 프랑스 영화예술의 미학과 흐름, 다른 하나는 독일에서 이주, 독일 표현주의영화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망한 영화이론서 『칼리가리 박사에서 히틀러까지』로 유명하던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에 대해서였다. 그리스계 이민자로 컬럼비아 컬리지(학사과정)만을 졸업했을 뿐인 그는, 이념상 뉴욕 중산층의 자유로운 삶의 가치관을 지지해서 가끔 뉴욕다운타운 주변으로 포진한, 『사진론(On Photography)』(1977)과 같은 저술로 유명한 수잔 손택과 같은 뉴욕 좌파(左派)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종종 경멸조의 표현을 썼으며, 할리우드를 가보지 않고서도 그곳의 분위기를 정확히 예측해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원의 영화전공 공동 학장이기도 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먼의 영화 『아마데우스』가 1985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을 때, 그 상의 향방을 정확히 그의 영화 수업 중에 예측하기도 했다. 그 판단의 근거로 그는 편집(editing)을 들며, 『아마데우스』의 편집작업이 예상 외로 복잡하며 치밀해 보인다고 했다.
 여하튼 그 같은 뉴욕 방문 후 이영일 선생은 『영화예술』의 복간을 결심했고, 그 후 내게 몇 번이나 영화평론가로 데뷔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영화는 없었다. 198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임권택의 영화는 그의 유명세와 달리 너무 무미건조하면서 심심했고, 한참 토속적 소재를 동양적 에로티시즘과 함께 뒤섞고 있던 이두용의 영화는 기술적이었으나 그 주제 표출이 너무나 거칠고 단순했다. 또 젊은 감독 박광수(『철수와 만수』)의 영화는 현실비판적 의식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그 구성력은 단단하질 못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영화들에 대해 어떻게 ‘비평’을 할 수 있을까―이 같은 문제를 내가 갖고 좀더 내밀히 고민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춤평론가로서 너무 많은 시간을 무용예술에 쏟고 있었다. 따라서 이영일 선생과 『영화예술』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선생이 90년대 말 신장염으로 고생하고 계실 때 한 출판기념회에서 선생의 너무 변해버린 모습을 보았다.(그러나 언젠가 내가 관심 있는 영화미학과 한국영화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복간 6년째 광복 50년을 맞아 특집을 꾸민 『영화예술』 58호(1995년 8월)에는 그 안에 매우 알찬 내용이 담겨 있다. 영화사 특집으로 이영일·변인식·김수남·이승구 네 사람의 영화평론가와 학자가 참여하여 해방 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사를 정리해놓고 있으며, 히치콕의 영화미학에 대한 기획연재에 이어 이민용의 『개 같은 날의 오후』(김수남), 도리스 되리의 『파니 핑크』(김시무),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이상면)에 대한 영화평과 함께 중견 평론가 변인식의 영화배우 조미령에 대한 탐구와 박철수 감독에 대한 인터뷰들도 실렸다. 더불어 조문진 감독의 창작시나리오 『쑈리 킴』도 게재되어 있다.
 그래서 얼마쯤 그 같은 미안함과 겹쳐 내가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20대에 극단을 만들고, 또 대학원에서 영화비평을 전공한 까닭에 1994년 12월에 아내(현대미학사 대표인 김성자)와 함께 창간한 계간 『공연과 리뷰』는 나의 주 관심사가 된 무용 외에 연극과 영화를 함께 다루게 되었다.
 어떤 측면 나는 그 세 장르가 문학과 미술과 다른, ‘느슨한 공동운명체’라 본다. 더불어 한 장르에 관심 있는 이는 자연히 옆의 장르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으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후반까지 나의 뉴욕생활도 늘 그 세 장르를 늘 함께 접하면서 보내왔다. (현대미술 또한 거기에 얼마간 포함되지만). 또 늘 그 관련한 평문을 『뉴욕타임스』 주말판이나 『빌리지 보이스』, 그리고 그것들을 다룬 전문지를 읽으면서 지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들어 나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알리게 된 홍신자의 실험춤이나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의 탄츠테아터에 대해서 내 나름의 관점에서 비평적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런 시각에서 보면 연극·무용·영화는 외형상 그 예술적 특성이 분명 다르지만, 그러나 또 다르게는 비슷한 결핍감(缺乏感)―‘보완’되어야 할―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적 측면, 비평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다.
 우선 연극의 경우는 연극사·연극미학과 비평·희곡·연출·연기의 측면에서 많은 것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있지만, 이것을 제대로 맥(脈) 잡기가 쉽지 않다. 우리 연극과 같은 경우는 서구극과 동양극의 전통을 모두 알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어려움도 있다. 그러므로 그 배움에 있어서 한 연극인이 그것들을 제대로 알고 몸으로 익히고 있는 이들(탁월한 예술가 혹은 교육자)을 적기(適期)에 만나, 그런 부분들을 두루 익힐 수 있다면 퍽 다행이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달리 말해 바람직한 연극교육은 연극 이론·교육·예술적 실천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배우들이 가진 몸의 훈련만으로는 이뤄지긴 힘들다. 전체적인 연극문화도 그렇다. 바꿔 말해 ‘지적 훈련과 습득’이 거기에 필수적으로 더해져야만 한다. 그런 한편, 무용은 예술적 감수성의 습득과 발산의 측면에서는 매우 유리하나, 대부분의 공연은 단발성(單發性)으로 끝나고 만다. 그 결과, 공연 후 남는 것은 몇 컷의 공연사진과 불완전한 인상기라 할 수 있는 공연리뷰(평론가로부터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와 그것을 본 사람의 기억(記憶)뿐이다. 따라서 이것 또한 충실한 ‘비평적 기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하나의 역사가 되기 힘들다. 영화 역시 환영과 시간예술로서 어떤 허망함을 갖는다. 즉 스크린 위의 상(像)은 연극이나 무용의 무대처럼 실체가 아닌 흔들거리는 그림자일 뿐이고, 어떤 측면 영원히 나와 관계없는 어떤 상황이고 풍경이며, 실제거나 허구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그저 연상, 혹은 상상놀이일 수 있다. 대신 그것을 보는 관객의 감정적 동화(同化)와 몰입(沒入)이 그것과 다른 그들만의 상과 심리를 어둠 속에서 따로 만든다. 그러므로 그것도 비평이란 매개가 없으면, 객관적 현상이나 물(物)이 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무용·영화 모두 지성과 비평을 매우 비슷한 정도로 크게 필요로 한다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필요성의 측면을 넘어 ‘문화적 존재성’의 획득이란 입장에서는 거의 필수적이라 할 수 있고, 그
 연장에서 지성적 이해가 가미된 비평이 있음으로써 그것들이 하나의 현대적 문화태(文化態)로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각 장르의 교육에 있어서 그 셋은 상호 공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우리의 문화와 교육의 풍토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연극이 무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성과 시성(詩性)은 결코 낮게 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무용 역시 굳이 위대한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극적 감성과 짜임새를 연극을 통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또한 영상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배우의 존재성에 대해, 또 무용이 영화와 유사하게 보여주는 장면적 흐름과 그 시적 이미지에 대해 어떤 높은 공감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여하튼 나는 그와 같은 문화적 이상(理想)―세 영역에 고루 적응될 수 있는 비평의 긍정적/생산적 기능과 그들 예술 간의 상호 인지와 영향 주고받기―을 실현하기 위해 『공연과 리뷰』를 창간했고, 특히 비평적 글쓰기에 있어서, 또 각 평자가 갖고 있을 미적 견해의 개진에 있어서 동시대의 문학이나 미술과 견주어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어떤 ‘깊이’와 ‘독창적인 미적 안목’을 갖길 원했다. 그러면서 시급히 동시대의 예술이 갖는 각각의 역사성과 그 특수한 미학에 근접하기를 희망했다. 그런 생각에서 특별히 그 실천에 있어서 단평(短評)을 지양한 리뷰와 논단은 잡지의 첫 부분과 중심에 위치시켰고, 해외논단은 그간 유수한 해외의 비평가가 쓴 비평적 에세이나 논고를 매번 번역해 실었다. 그리고 연극·무용에서 되짚어 보아야 할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비평적 논고들을 재게재하면서 독자와 함께 읽고, 음미하기를 원했다. 창간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같은 나의 기대가 얼마만큼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절반은 성공이고, 또 절반은 실패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간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을 거의 다 쏟아부었고, 동시대의 공연예술 관계 지성인이나 예술가들과 그것들을 나누고자 했다. 그러면서 내 스스로도 나에게 주어진 지면(예술가들과의 인터뷰나 비평노트 등)을 통해 무엇인가 비평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 같은 『공연과 리뷰』에 이어 흥미롭게도 1995년에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 21』이 한겨레신문사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PIFF)도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영화 붐’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때맞춰 한국영화에 있어서도 임권택을 선두로 새로운 작가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일련의 영화연출가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곧 이창동·이명세·김기덕·박찬욱·홍상수·김지운과 같은 이들이 그들로서 모두 전 시대와 다르게 단순한 내러티브에만 의존하지 않고 각각 나름대로 주제와 연관되는 상징성과 알레고리, 그에 맞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공연과 리뷰』 창간 시기에 거친 대로 활발히 의견을 개진했던 영화평론가 장석용은 이 같은 현상을 ‘코리안 뉴웨이브’라 발 빠르게 지칭했고, 이어 김시무·황혜진·전찬일·곽영진·문학산·정하제·강소원과 같은 이들이 나름대로 정밀한 작품 분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공연과 리뷰』의 편집자로서 나 역시 이때 본격적인 영화평을 내 잡지를 통해 읽는 기쁨을 가졌고, 이론을 겸한 김시무, 작품 단위로 정감적이고 세밀한 분석을 가한 황혜진, 젊지만 지적 균형성을 가진 정하제, 긴 호흡을 가졌던 문학산 등의 글을 좋아했다. 이 시기 『씨네 21』은 주간지로 ‘상업적 관점’에서 매호 핫 이슈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했기에 정성일과 같은 컴퓨터 시대 젊은 세대층의 의식과 지적 기호(嗜好)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필진을 내세워 상업적 관점에서 매주 그 현상을 선점(先占)하며 이끌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그 유사한 영화전문지 『필름 2.0』이나 『프리미어』와 같은 영화잡지들이 문학지들과 나란히 서적방 안 잡지코너를 점했다. 하지만 믿기지 않게 그들은 2010년 가까이 와서는 하나, 둘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려, 현재는 『씨네 21』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에 따라 나름대로 기세등등하던 일군의 영화평론가들 또한 신문이나 여타 문화지의 지면에서 썰물같이 사라졌다. 지금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년(年) 기관지 『영화평론』에서만 그 이름과 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대중문화와 영상문화, 그리고 최근 ‘한류’라 일컬어지는 문화형성의 중심에는 영화가 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왜 비평이 주도할 수 있는 지적 분위기가 그 같이 돌연히 소멸되고 만 것일까?
 이와 관련, 결국 나는 그 큰 원인을 영화가 여타의 인문학이나 예술과 근접해 활동하지 않고 이른바 산업이니 상업이니 하는 논리에 빠져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아니 그것에 너무 일찍 영화인들이 흥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보면 제도상 한국영화를 총괄적으로 관장하던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독립된 단체로 만들면서, 영화를 여타의 예술이나 문화행위와 별개의 기구로 구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현상은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런데 영화는 실상 영상(이미지 혹은 테크놀러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문학 혹은 극), 연기(연극), 기타 미술·음악 등 모든 예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격적인 극영화(feature film)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러므로 그 같은 ‘종합성의 측면’(A. 바쟁은 이것을 영화가 가진 ‘비순수성’ 혹은 ‘혼합성’으로 보면서 영화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보았다)을 찬찬히 눈여겨 볼 수 있는 이에게는 영화의 제도적 독립성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해(害)’가 된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거듭 그 같은 점을 깊게 인지하는 이는 오늘의 영화현장이나 비평계에서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작고한 영화평론가 이영일 선생이 한국적 리얼리즘의 표상으로 점찍은 신상옥·유현목·김기영과 같은 이들의 경우도 각각 나름대로의 영상미 추구 이외에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학성이나 기타 여러 예술적 측면들을 자신들의 영화 세계 안에 짙게 내재시켜 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영화비평의 현장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이들(『공연과 리뷰』의 필자들인 김시무나 전찬일 등)과 함께 만나 대화할 때면 연극·무용과 같은 종합적인 공연예술이 행해지고 있는 대학로를 좀더 가까이 느끼고, 접해 보길 자주 권하곤 한다. 영화비평은 영화에 대해 쓰는 행위이지만, 그 결과물(비평문)은 어느덧 문학적 행위가 되고, 동시에 시간예술이란 속성을 갖고 있는 연극·무용과 같은 공연 비평적 행위와 유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 후 1세대 영화평론가들이었던 이영일·최일수·안병섭·김종원·변인식·하길종 등 대표적 영화지성인들이 거의 모두 전문, 혹은 준(準)전문 문학인이었던 사실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쉽게도 현재 그러한 영화평은 『씨네 21』 외에 『공연과 리뷰』의 일부 지면과, 여성 시인 손정순이 발간하고 영화평론가 전찬일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종합문화지 『쿨투라』(2006) 속에서 좀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쿨투라』는 사회과학의 개념을 빌어 한국 현대문화의 흐름과 현상을 이론화·운동화하려는 『문화과학』(1994년 영문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강내희에 의해 발행)과 달리 유연한 인문적, 그리고 문학적 시각에서 오늘의 문화현상을 읽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화평단의 원로로서 평소 『공연과 리뷰』의 영화 필진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동시대의 극평가 한상철·이태주와 함께 『공연과 리뷰』의 좌담에 자주 참가했던 김종원 선생이 2007년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 Ⅰ』·『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 Ⅱ』 2권의 영화평론집을 『공연과 리뷰』의 발간처인 현대미학사에서 펴내며, 이 잡지와 강한 연대감을 보인 것은 현 한국영화평의 맥과 지형(地形)에서 퍽 의미로운 일이라 보겠다.
 한편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중문화의 중핵은 ‘연극’이다. 그런데 전문지와 연관되어 얘기하려면 이것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전문지의 불모지대이거나 무덤이다.
 한국연극협회 기관지로 발행되는 『한국연극』과 앞서 언급한 여석기의 『연극평론』 외에 현재 연극계에서 전문지다운 전문지는 ‘거의 없다’. 90년대 들어 연극평론가로 늦게 데뷔한 김윤철이 『연극평론』을 복간(2000년 겨울),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계간 회지로 살려낸 것 이외에 원로 극작가 김영무가 『극작에서 공연까지』(2004년 가을)를 2010년까지 26회 발간한 것이 거의 다라면 모두 다라 할 수 있다. 한 연극연구자들의 모임이 『공연과 이론』이란 잡지를 계간 형태로 펴내고 있으나, 이것은 일종의 학습·연구 동인지와 흡사, 잡지의 전문성의 측면에서는 매우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 중 『극작에서 공연까지』는 사실상 매우 흥미로운 잡지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오늘의 연극문화가 희곡, 즉 원전(原典)이라 할 만한 것에 대해 많은 변형이 이뤄지면서 그것이 ‘텍스트’란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에, 이 잡지는 이때까지 연극문화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희곡의 전통과 그것의 공연화(公演化)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우리의 연극문화를 보다 단단한 지적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한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작가가 편집 주간을 하다 보니 동료 극작가들, 그리고 여타 연극지성들(특히 평론가들)의 참여가 예상 밖으로 너무 적다. 제호가 추구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극작가들의 발언과 이에 맞서는 연출가들의 연극적 실천이 그 중심 내용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잡지에서 그런 부분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연극평단 또한 『한국연극』이나 『연극평론』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어서 그 협력을 크게 꺼렸다.(그런 점에서 이들은 적지 않게 폐쇄적이다.) 잡지의 편집 또한 무엇보다 원

2015.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