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무용단 〈리진〉
무엇이 문제일까?
이지현_춤비평가
 ‘리진’ 이라는 구한말의 무용수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아니다.
 조선 초대 프랑스 공사의 ‘앙 코레’ (1905)에 담긴 실제 이야기에 도화와 원우라는 인물을 추가하여 애정과 질투라는 극적인 재미를 더 하려한 의도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구한말 애꿎게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무희가 넘어야 했을 시대와 통념의 장벽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질투에 시달려 결국 의도치 않게 살해되는 서사의 줄기가 개인과 역사적 상황의 충돌이 빚는 ‘숙명’을 드러내려는 애초의 의도를 삼켜버린 게 문제의 지점이다.
 국립무용단 김상덕 예술감독의 첫 신작 〈리진〉 (6월 28일-7월 1일. 국립극장 해오름)이 갖고 있는 혼돈은 대략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문제를 낳았다. 역사와 갈등하게 되는 개인의 운명을 다루고자 했다고는 하지만 개인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역사를 건드리지 못함으로써 서사는 4각관계의 아침드라마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국립무용단 역사성의 뿌리인 ‘무용극’을 3세대 예술감독으로서 “현대판 무용극”으로 실험해보겠다는 의지가 적절하게 두께 있는 창작 방법론과 만나지 못해 이전 무용극의 문제를 넘어가지 못한 지점이다.
 하지만 우선 자신의 환경이기도 했을 무용극에 도전장을 내는 일을 자임 한 예술감독의 솔직하고 진지한 자세에 대해서는 높이 사야 한다. 앞 세대의 무용극이 이미 낡은 틀이 되어 버린 지 오래고 그것을 다시 꺼내 볼 필요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한국창작춤 안무가들이 눈을 돌렸다. 그간 한국창작춤은 무용극보다는 극장용 스펙터클의 완성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지의 방향으로 흘러왔고 무용극은 버려져 있었다.
 나는 이전의 비평 글에서 다뤘듯이, 춤은 가장 중요한 재연(representation)의 도구로서 유사 이래로 춤으로 삶에서 만나는 사건과 이야기를 담는 것은 시대에 따라 강약을 탔을지언정, 사라진 적은 없기 때문에 춤으로 서사를 담아내는 것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긴 어렵다고 말해왔다. 게다가 동아시아 춤의 공통점은 거대한 신화를 전달하는 임무를 잘 수행해온 탓에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춤동작과 장치를 매우 다양하고 섬세하게 갖고 있기에 우리춤이 무용극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자기 역사성에 대한 망각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만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스타일의 문제에서 우리 무용극이 도달한 지점은 어디이고, 거기서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할 지점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무용극 현대화의 맥락임을 강조했다.

 



 답습이나 흉내내기는 창의적 승부가 될 수 있는가?
 
 기존 무용극에서 가장 거추장스러웠던 무대장치를 〈리진〉은 최신 LED 트러스를 설치하고 면이 아닌 선으로 조명과 무대장치의 효과를 간략하고 세련되게 처리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LED를 통한 시각 자극은 단청, 꽃, 달, 난 등의 구체적 사물에서 주인공의 심경과 사건에 대한 시각표현으로 드라마를 끌고 가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러나 의상과 음악은 과거로부터 멀리 가지 못했다. 의상에서의 과도한 시도는 전체의 조화를 수시로 깨뜨렸는데, 동작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우리 무용수 몸의 단점을 보완해주지 못하면서 몸에서 겉돌아 의상의 역할이 전도된 모습이었다. 장치가 없는 그 깨끗하고 간결해진 무대를 무용수들의 몸과 연기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의상으로 과도하게 메우려 한 불안감이었을까.
 음악은 어쩌면 춤에서의 드라마성을 가장 강하게 지지해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무용극의 음악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비슷한 감정적 전개, 사건과 감정의 교체 방식-상황을 알려주는 부분과 주인공의 정서표현 부분을 교대로 왔다 갔다 하는 방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느 감각보다 시각이 가장 먼저 인지되는 것이라면 청각은 가장 지속적으로 정보를 쌓아나가는 감각으로, 새로운 시각 장치에서 입수된 신선한 느낌들이 청각에 의해 ‘감정의 축조’와 만나지 못한다면 내러티브는 성공적으로 인지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 과거 무용극이 감정 중심이긴 하나 통속적이고 표면적이고 단순한 감정표현에서 발전하지 못했던 근원이라고 볼 때, 〈리진〉이 음악에 대해 새로운 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건 “현대판 무용극”을 위한 자기 계획이 단순한 말뿐인 레토릭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앞 세대 국립무용단 류의 무용극은 신무용을 언어로 가진 무용극이다. 신무용은 드라마를 담는 포괄적 양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감정의 톤(tone)을 담는 단순한 용도의 그릇으로 무용극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변형이 가해져야 함에도, 과거의 무용극은 신무용 감정표현의 방식과 종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식상한 ‘신무용 쪼’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에서 그쳐 무용극을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만들었다. 슬프다, 행복하다, 질투가 난다, 화가 나서 상대를 파괴하고 싶다 정도의 몇 개의 감정을 드러낼 뿐 그 슬픔의 종류와 깊이, 강도와 이유를 섬세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신무용 언어를 왜 계속 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릇이 간장 종지인데 거기에 어떻게 새로운 만찬을 담을 수 있겠는가? 과거 무용극의 음악과 감정 표현의 방식이라는 작은 ‘종지’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렇다고 모델을 존 크랑코 운운하며 내러티브 발레나 스토리 발레로 삼는 것 또한 위험하다.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기 시작한 70년대 이후의 내러티브 발레는 매우 중요한 진보였지만 그것을 한국춤 상황에 직대입 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70년대로 되돌리는 일이다. 초점은 심리 전개를 안무로 담으려는 창의적 고민이 새로운 동작도 만들고, 장면도 만들고, 드라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관객에게 새로운 발레로 어필했던 것이지 2인무를 더 애절하게 만들고, 군무를 더 코러스답게 만드는 것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용극, 스토리 발레의 어떤 틀이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연출에 있어서 〈리진〉은 한 장면이 쉽게 길어져 전체 연출의 방향성이 종종 사라지고, 중요한 사건 전개의 미숙함으로 무용극의 핵심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한 한계를 가졌다. 이는 순전히 연출력의 미숙함이고 무용극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증표다. 이야기의 소재가 문제가 아닌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이야기라도 진정성 있게, 조리있게 잘하면 생각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 여성에 대한 관점
 
 창작자들이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리진〉이 국립무용단의 작품으로 적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는 ‘여성에 대한 상품화’이다. 안무가가 리진이라는 인물을 택한 것이 무희이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안무가의 무희에 대한 관점은 철저히 리진을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즉 무희는 인형이고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수많은 국립의 무희들도 인형이거나 인형이 되지 못한 아낙네, 둘로 나뉜다. 구태의연한 이분법이다.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택해가는 자신의 주인인 여성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스토리 전개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무용수의 몸과 동작 어디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진과 도화(도화는 복숭아꽃을 연상시키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오랜 비유), 심지어 왕비를 그려 내는 관점은 철저하게 시대착오적이며, 여성에 대한 미적 취향은 차별과 도구화가 걸러지지 않은 채 녹아 있어 매우 불건강하다.
 이런 사실에 대한 증표는 많이 있으나 간단하게는 남자 무용수들은 많은 경우 슈즈를 의상에 맞춰 신은 반면 여성 무용수들은 많은 장면에서 맨발이다. 심지어 왕비도 맨발인 경우가 있었다. 이유를 묻고 싶을 정도로 의상과 몸의 전시에서 이상한 선택이 보인다.

 

 
 유흥과 오락으로 춤을 대해왔던 오랜 흔적인가? 극장식 식당에서 안무하는 일과 국립극장에서 예술감독하는 일을 그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받고 하는 일로 비교한다면 그것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 하지만 춤을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영역을 넘어 왔다면 본인은 많은 시간 새로운 일을 위해 변화를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고, 그 새로운 직업을 갖도록 협조하고 도와준 사람들은 예측되는 결과에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김상덕 예술감독은 본인의 임무에 대해서는 자각하고 있는 듯 보이나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쉽게, 조급하게 대처했다. 시각적인 몇 가지 변화로 변화를 가져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으나 무용극의 과거를 쉽게 답습했고, 작품의 깊이에 대해서는 숙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무용가가 하기 힘든 공공적인 창의적 대안이나 실험이 부재하다.
 여성 무용수들은 비련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남성무용수들은 보기 불편하게 과거형이다. 동작은 잔걸음을 걷다가 완전히 현대무용 동작을 하는 등 맥락 없이 두 축을 왕래한다. 인물의 심리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 시간을 음악의 볼륨과 군무의 양으로 물량공세 한다. 창작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약한 것을 공적인 돈을 써서 물량으로 메운다.
 국립무용단의 예술감독은 국가적 차원의 담론에 대해 자신만의 예술적 해법을 내놓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비현실적인 여성이미지로 국민의 반인 여성에게 불건강한 관점을 주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당사자 뿐 아니라 그것을 돕거나 방조한 사람들 역시 국민의 세금이 건강하지 못한 일에 쓰인 책임이 물어져야 할 것이다. 관객을 동원하고 박수부대를 객석에 앉히고, 평가를 빗겨가고, 언론 플레이를 해서 메워질 수 있을까 싶다.
 한국에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전 세계가 주목한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국립무용(National Dance of Korea)의 봄은 아직 먼 것인가... 국민은 세금을 내고, 티켓 값을 치루고 불량식품을 먹게 되었다. 통탄할 일이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07.
사진제공_국립극장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