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무용단 자유 안선희 · 조현배
춤추는 몸의 연구와 춤의 깊이
권옥희_춤비평가
 현대무용단 ‘자유’(대표 안선희)의 정기공연(10월 19일, 해운대문화회관). 안선희의 〈기울어짐에 대하여〉와 조현배의 〈안녕히 다녀오세요〉를 본다. 작품을 통해 본 젊은 두 안무자, 성장했다. 그들의 춤과 무대는 정직하고 성실하고 단정했다.



 조현배 〈안녕히 다녀오세요〉

 무대에 점점이 서 있는 무용수들. 검정색 배경 막에 나 있는 문. 무대에 서 있던 무용수들이 그 문을 통해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춤. 뒷걸음으로 문을 나서는 무용수들. 빈 무대, 남자(조현배) 이들이 나간 문으로 들어온다. 문을 나선 이들이 ‘안녕히 다녀’올 것을 염려하는 춤, 어떻게 출 것인가. 조현배는 무용수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문을 닫을까 말까 망설인다. 이윽고 조용히 문을 닫자 음악이 흐르는 것으로 무대를 디자인했다. 조용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 자신의 몸짓이 어떤 방식으로건 의미를 담아내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무용수들이 팔짱을 끼고 서 있거나 쓰러지거나 나란히 서 있다. 무대 양쪽 막을 가운데로 닫아 만들어낸 정사각형의 스크린. 무대 막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몇 명의 무용수가 거기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고 있다.
 바퀴달린 카메라를 밀고 들어와 무대 한 쪽에 세우는 안무자(조현배). 무대 위 무용수들이 카메라 앵글 위치에 따라 스크린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객석에서 보이지 않던 무용수들이 보인다. 대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상징적 의미의 관찰이다. 안무자가 카메라 앞으로 나선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며 춤을 춘다. 멀리서 춤이 다가오는 것을 스크린으로 보여준다. 춤을 조각한다. 안무자 자신이 봄의 대상이자 보는 이다.
 지극한 투박함에서 최상의 세련미까지 만들어내는 카메라. 무대 위 춤 현실을 그려내기도, 노출되거나 노출시키는 대상을 보여준다. 관능적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선택과 편집에 따른다는 것에 따라 조작된 이미지이기도 하다.


 

 

 두 그룹의 춤, 주먹으로 서로 밀고 밀어낸다. 춤이 다르다. 한 무대에서 확연히 다른 춤. 형식이 있는 춤과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자유로운 남녀의 춤은 보는 시각에 따라 무대 위의 춤과 스크린에 나타나는 춤의 다른 속성에 대한 알레고리.
 러시아 민요 〈백만송이 장미〉 음악에 둘, 셋, 네 명씩 무리지어 추는 춤. 번지는 서정. 춤은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 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이어진다.
 카메라는 사회이자 안무자와 무용수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다. 카메라(세상)의 담론이 춤을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하고 재분배한다. 조현배는 춤의 유형이 카메라의 앵글 속에 들어오는 그 사소한 움직임의 과정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것이 권력으로서 춤의 담론이자 권력에 대한 전복적 사유임을 말하고 싶었던 듯.
 한 사람씩 그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곤 그들이 들어왔던 문을 통해 나가는 무용수들. 무슨 비밀을 알려줬을까. 그들을 따라 간 뒤 조용히 문을 닫는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녀, 혹은 그가 안녕했으면 좋겠노라는, 독특하고 단단한 춤이었다.


 


 안선희 〈기울어짐에 대하여〉

 감각적인 무대 미술과 조명, 아름다운 춤을 버렸다. 오로지 춤추는 몸의 움직임만을 파고 든 안무자. 깊은 숲속 같은 느낌의 어두운 무대, 천장에서 내려와 있는 마이크 하나. 어두운 무대에 숨듯 스며든 무용수들이 발을 끌며 만들어내는 스산한 소리. 겅중겅중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온 안무자. 맨발로 무대바닥을 천천히 문지른다. 느리게 시작된 발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면서 거친 호흡과 무대바닥과 발의 마찰에서 일어나는 소리. 움직임에서 비롯된 에너지가 소리가 되고, 소리가 음악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순하고 어두운 조명. 안선희가 상의를 뒤집어 쓴 채 무대에서 사라지자 한껏 웅크린 무용수들이 기괴한 움직임으로 무대를 걷는다. 이어지는 군무진의 춤, 격렬하다. 격렬한 움직임에서 비롯된 몸의 기울어짐. 숲속의 나무로, 떠도는 안개로 무대 바닥과 벽에, 무용수들 서로의 몸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움과 키치 사이에서 이따금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상한 땅과도 같은 몸. 춤은 가장 높은 곳을 나는 기쁨이든 가장 낮고 어둔 곳으로의 하강이든 춤(몸)은 이런 정조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다시 말해 이런 춤(몸)의 정조들 안에 산다는 것은 이 정조들의 복잡한 진리들에 마음을 연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춤(몸)의 진리는 궁극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어떤 것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춤(몸)의 그 불완전성 때문에 순수하고 진실 되고 참된 것이다.
 막대기를 밀고 들어오는 6명의 무용수들. 손바닥에 막대 봉을 얹고 중심을 잡기위해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가만히 세울 수 없는 중심을 몸에 들였다. 짧은 막대 위에 올라서는 일, 아슬한 현실이자 척추(중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애씀이기도 하다. 안선희가 봉을 받아들고 손바닥에 얹은 채 바로 세워보기를 시도한다.
 무대 위 천장에서 내려오는 별빛 같은 조명아래 춤을 추는 두 명의 무용수. 당김과 밈. 이어지는 5명의 무용수들의 춤. 무대장치도, 현란한 조명도 없이 정직하게 춤으로만 그려내 보겠다는 의지의 무대.


 

 

 춤으로 바른 척추를 가졌던 몸은 다시 그 춤으로 척추를 흔들어 놓는다. 기어이 기우뚱, 기움을 낳는다.
 춤(몸)의 절제, 바로 세움에 대한 조율. 춤으로 한 공간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몰입의 세계. 음악은 마치 녹슨 뼈가 내는 소리처럼 잡음으로 가득하다.
 (조명)별이 가득 떠 있는 시간, 치유의 시간이다. 바로 세우지 못한 척추로부터 일탈한 뼈들. 안선희의 고통, 무정한 우주 사이에서 바로 서기 위한 이상의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어둠속에 묶인다. 춤의 앞날을 위한 온갖 노력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인간 실존의 기초 원리처럼 한번 그 얼굴을 스윽 내미는 것, 기운 척추로는 실현할 수 없는 춤추는 이의 이상이다. 그것은 모든 길을 가로막는 기울어진 사회적 조건들과의 싸움이기도.


 

 

 두 사람이 막대 두 개를 서로 마주 든 채 앞뒤로 자리를 바꿔가며 움직이는 4쌍의 무용수들, 그 아래에서 추는 안선희 춤. 척추의 흔들림을 보여준 것으로 읽히나 너무 쉽게 푼 안무다. 이다. 웅크리고 있는 여자무용수 둘레에 세워놓는 막대, 무용수의 몸은 척추에 갇힌(품은) 정신이자 몸이다. 처음의 바로 선 척추로 돌아가기 위한 춤(몸)의 돌아 봄. 순수의 상태에 이르는 것,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다.
 무대 뒤쪽, 제단의 형태로 쌓아 놓는 막대, 척추가 다시 반듯하게 정렬되기를 희망하는 장치거나 혹은 채 의미부여를 하지 못한 뼈들의 무덤, 폐허의 환원. 선명하지 않다. 늘어뜨려져 있던 팬던트 조명을 끄면서 닫는 무대.
 안선희의 춤(몸)의 성찰은 기운 무대에 서 있는 무용수의 깊은 불안과 다짐에서 온 것이라 짐작된다. 춤추는 몸의 존재방식에 대한 치열한 공부는 안무자의 창창한 앞날에 붙이는 다른 이름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2017. 11.
사진제공_현대무용단 자유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