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발레단 〈안나 카레니나〉
음악의 힘이 이끄는, 사색적 발레
방희망_춤비평가
 국립발레단 제171회 정기공연 작품으로 2014년에 초연된 크리스티안 슈푹 안무의 〈안나 카레니나〉(11월 1-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평자 5일 공연 관람)가 선택되었다. 마침 이 작품이 내년에 있을 평창동계올림픽의 문화프로그램의 일부가 되면서 20여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올림픽과 〈안나 카레니나〉는 언뜻 접점을 찾기 힘들다는 의문에 대문호의 명작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수진 예술감독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불륜이라는 소재 때문에 관객층을 가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올림픽 시즌이라 하여 군사정권 시절의 ‘국풍’을 떠올리게 하는 〈왕자호동〉이라던가 〈스파르타쿠스〉류의 스펙터클한 작품만 고려한다는 것도 해묵은 발상 아니겠는가? 뚜껑을 열어본 〈안나 카레니나〉는 기대했던 이상의 예술성을 담고 있어 이 새로운 시도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신문에 연재할 〈안나 카레니나〉를 기획하면서 처음에는 제목을 ‘두 커플’ 내지 ‘두 부부’로 정했었다고 한다. 당대 러시아가 신구(新舊)교체로 인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조르주상디즘’이라 불리는 자유연애주의가 귀족들의 도시문화를 파고들었고, 작가는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농촌을 돌아가야 할 이상향으로 생각했기에 안나-카레닌-브론스키 커플과 레빈-키티 커플의 삶을 대비시켜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런 의도를 생각하면, 무대장치로 쓰인 자작나무와 샹들리에는 각각 전원과 도시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서 함축적이었다.
 안무가가 작가의 의도를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주인공인 안나의 이야기 뿐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모습이 반영된 레빈에게 상당한 비중을 준 것에서도 볼 수 있었다. 또, 브론스키와의 강렬하고 화려한 무도회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으로 돌아온 안나가 남편과 재회할 때 기계음(기차 소음)을 배경으로 무미건조한 춤을 추게 한 장면에서 그런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여성 무용수들이 발목까지 오는 긴 드레스를 착용해야 했기에 안무는 섬세한 기교를 선보이는 것보다는 긴 선을 담대하게 그려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작품의 색채에도 맞았다. 특출하게 참신한 부분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사교춤의 스텝을 응용하여 안나 내면의 망설임과 갈등을 표현한다던지, 기존 발레에서 단순한 배경으로 둘러지곤 했던 군무진들에게 현대적인 마임―무도회에서 상대를 탐색할 때 맞잡으려는 손을 꺾어 돌리는 동작, 경마장에서의 관람행위 등―을 부여해 스토리에 일정부분 개입시킨 점이 흥미로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압도적인 인상을 남긴 것은 안무가가 음악을 선곡하는 능력과 그것을 펼쳐내는 방식이었다. 라흐마니노프와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들은 너무 통속적이지 않으면서 세련되고 깔끔하게 서글픔과 우아함을 담고 인물들의 감정선을 안내하였다. 슈푹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함께 하는 협주곡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런 선곡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명징한 소리를 장점으로 내세워 긴 서사를 물 흐르듯 시원스럽게 전개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 원작의 안나가 지니고 있던 지적이고 고상한 면모가 작품 전체의 이지적인 선곡으로 에둘러 표현되어, 이 작품이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기품 있는 모양새를 갖추게 하는데 기여한 바가 컸다.
 특히 레빈의 농촌장면에 사용된 라흐마니노프의 로망스들을 압권으로 꼽고 싶다. 노래는 목가적인 분위기로 극 이곳저곳에 배치된 갈등요소들을 잠시나마 잠재우며 부드럽게 감쌌고, 가곡이 지닌 가사들이 장면의 분위기나 작가가 레빈에게 부여하려 한 주제의식에 부합되었다는 점에서도 무척 예리한 선택이었다.
 반면 안나와 브론스키가 이탈리아로 도피했을 때 배경음악으로 쓰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은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곡인만큼 양날의 검과 같이 위험한 선곡이기도 했다. 이 곡이 에릭 카멘의 ‘All by myself'의 테마인 점을 떠올려보면 비극이 예정된 이 커플의 위태로움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곡 후반부에 돌리가 등장하여 남편의 부정을 감내하는 고통에 찬 연기와 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음악이 단순하게 부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달콤하게 다가오는 멜로디 때문인지 안나와 브론스키에겐 걱정 없이 해맑은 연인의 그저 그런 파드되로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현대무용 작품에서는 간혹 무대 위에 연주자를 직접 등장시켜 라이브로 꾸미는 경우가 있으나 발레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편인데, 이번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협업이 얼마나 근사할 수 있는지 단번에 보여주었다.
 평자가 관람한 5일의 공연까지 총 6회 공연 중 4회의 피아노 연주를 담당한 피아니스트 조재혁은 극음악이 아닌 음악에서도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하는 뛰어난 연주로 깊은 여운을 남겼고, 국립합창단 단원인 최윤정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국립발레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섭외였을 것이다. 또한 초청된 지휘자 폴 코널리는 코리안심포니로부터 간만에 집중력 있는 연주를 이끌어내었다. 이러한 협연은 관객에게 눈과 귀를 모두 즐겁게 하는 뜻밖의 선물을 선사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며, 클래식음악 팬이나 발레 팬 양쪽 모두에게 화제가 되어 관객층이 확장되는 효과도 있으리라 본다.


 


 


 강수진 예술감독 취임 이후 수혈된 여러 모던한 작품과 창작활동으로 표현력이 한껏 고무된 젊은 주역무용수들은 대체적으로 평균 이상의 연기와 춤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국립발레단이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의 드라마발레를 맞아 열의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연륜이 부족한 탓인지 보다 깊은 내면을 보여주어야 하는 2막의 장면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 도피 장면에서 언뜻언뜻 드러났어야 할 안나(박슬기)와 브론스키(이재우)의 근심과 고민이 보이지 않았고, 안나의 중독과 자살은 여타 발레의 매드 신(mad scene)처럼 평이하게 급조되었다. 무용수들의 이해가 미진했을 수도 있고 혹은 긴 문장으로 설명되던 내면을 춤과 연기로 압축해야 하는 안무가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부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국립발레단이 앞으로 이 작품을 고정 레퍼토리로 장착하기 위해선 풀어야 할 숙제다.
 와중에 돌리 역을 맡은 신승원의 연기가 가장 돋보였는데, 이 작품에선 마침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역시 남편의 불륜을 감내하는 토냐 역의 제랄딘 채플린과 흡사해 보이는 모습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분노를 토로하다가도 짙은 슬픔에 잠기는 성숙한 연기는 무대 중앙에서 가장자리 의자로 옮겨갈 때에도 저절로 눈길을 옮겨 주목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11.
사진제공_국립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