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7 ‘K-발레 월드’
갈라 공연에서 창작발레까지, 춤의 성찬
문애령_춤비평가
 한국발레협회에서 주최하는 케이-발레월드(K-Ballet World)가 10회를 맞이했다. 예년처럼 개막공연 ‘월드 스타 갈라’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신인안무가전과 중견안무가전에 이어 신작 〈처용〉이 폐막을 장식했다.
 극장규모가 달라진 덕분인지 ‘월드 스타 갈라’(11월 19일, 국립극장 해오름)는 작년에 비해 더욱 화려했다. 작품에 필요한 각각의 배경을 영상으로 장식해 분위기를 살린 무대연출도 큰 몫을 했고, 출연진의 열연과 함께 작품도 훌륭해 흡족히 즐길 수 있었다.
 볼쇼이발레단 수석 니나 캅초바와 알렉산더 볼취코프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그랑 파드되로 갈라의 막을 열었다. 그들의 등장에 ‘발레를 본다!’는 기쁨을 느꼈으니 배역에 어울리는 분장은 물론 남성의 섬세한 발목 사용까지도 여유로운 안정감을 전했다.
 이들이 2부에서 선보인 〈황금시대〉 중 파드되는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1982년 개작한 버전으로 ‘골든 에이지’라는 식당이 배경이다. 여자는 흰색 튜닉, 남자는 흰색 바지와 셔츠를 입었는데, 1920년대의 진취적 청년 주인공들이다. 여자가 재주넘기를 하면서 남자의 어깨에 오르고, 거기서 다시 몸 방향을 바꾸는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고난이도 앙레브망은 여전한 탄성의 대상이 되었다.


 

 

 〈백조의 호수〉 2막 파드되를 공연한 바이에른 주립발레단 루치아 라카라와 도르트문트 주립발레단 말론 디노는 스타 중의 스타로 각광받았다. 이 아다지오의 특성상 여성의 연기력에 주목하는데, 든든한 파트너링에 기대어 최선의 기량을 뽑아낸 오데트의 연기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치 대화를 하듯이 동작을 연결해간 루치아 라카라는 피루엣 앙드오르 후의 아라베스크 과정에서 매우 규칙적인 전개선을 보여준다. 새털처럼 가볍고, 회전기는 여유로우며, 놀라운 유연성을 지닌 반인반조의 형상이다. 느리다가도 회전에서 날랜 속도감을 강조하는 춤의 고수가 파트너의 큰 키 덕에 공중 포즈의 높이까지 남다르니 객석에 설렘이 가득했다.
 평론가 앙드레 레벵송은 순수한 발레 기교에 대해 이렇게 찬양했다.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기계… 가장 세련된 감정의 영향을 받는 호흡하는 존재다.” 루치아 라카라가 보여준 오데트 연기는 레벵송이 무엇을 찬양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이 커플이 2부에서 공연한 〈가랑비〉는 미국 조프리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제럴드 알피노의 1981년 작이다. 발레리나의 유연성을 최대한 강조한, 다양한 곡예적 포즈가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등장하는 멋진 창작발레다.


 

 

 마린스키발레단 수석 올레시아 노비코바와 미하일로브스키발레단 수석 레오니드 사라파노프는 1부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2부에서 〈해적〉 그랑 파드되를 공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안무자가 레오니드 라브로브스키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맥밀런, 크랭코, 마이요 등의 버전을 자주 접하나 라브로브스키 안무를 원천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깨동무를 한 뒷모습을 몇 차례 보이는 전개에서 발코니 장면을 보다 어리고 순박한 만남으로 다룬 안무자의 해석이 엿보였다. 〈해적〉은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의 대표작이라 객석의 반응이 남달랐는데 회전기와 도약에서 기교파의 면모를 여전히 과시했다.
 스페인국립무용단 주역 김세연은 1부에서 조지 발란신의 〈후 케어즈(Who Cares)?〉 중 2인무를 같은 무용단 수석 안토니 피나와 춤췄다. 김세연은 흥겨운 재즈발레 스텝을 잘 살렸고, 안토니 피나는 정확한 회전과 도약으로 남자가 분위기를 끌어가는 작품 특징을 잘 소화했다. 2부에서는 스페인국립무용단 주역 에스테반 벨랑가와 김세연이 〈장미의 죽음〉을 공연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안무가 중 하나인 롤랑 프티의 1973년 작품이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쓴 동명시 낭송 소리가 음악에 묻혀 들리는 신비하고 서정적인 2인무다.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 홍향기와 객원주역 이현준은 〈백조의 호수〉 그랑 파드되를 선보였다. 성숙해진 무대매너와 자신감을 각각 자랑하며 2인무 회전기에서 탁월한 조화를 보였다. 국립발레단을 대표한 솔리스트 박예은과 수석 이재우는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에서 발랄한 키트리와 상체 포즈에 여유가 넘치는 바질을 연기했다.
 한국발레협회 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견안무가전과 신인안무가전은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신인안무가로는 박윤희 양승하 황나남 김민지 류한울이 11월 23일 공연했고, 21일에는 여섯 명의 중견안무가들인 유지숙 고현정 이범구 장소정 임혜경 원혜인이 각각 소품을 발표했다.
 이들 중 유지숙의 〈바뜨망〉, 고현정의 〈마라톤〉, 임혜경의 〈리투얼(Ritual)〉이 색다른, 혹은 원숙한 형상을 제시했다. ‘부딪치기’라는 뜻의 발레 용어 ‘바뜨망(battement)’은 여러 명칭으로 사용된다. 땅뒤, 프라뻬, 데가제, 퐁뒤 등의 앞에 붙어 다리 동작임을 알린다. 유지숙은 이 용어를 발레기교의 대명사로 앞세우고 홀로그램을 통해 멋진 포즈를 실현한다. 포인트와 턴-아웃과 균형 잡힌 몸이 무대에 일렁인다. 실연자 두 커플이 등장할 때, 홀로그램 포즈는 숙명적 과제처럼 부상한다. 기하학적 문양, 별무리 풍경, 중세의 고성과 오페라 극장 등이 배경 막에 투영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공존하는 ‘발레’를 차례로 강조한다.


 

 

 〈마라톤〉은 발레기교의 형식미를 파괴한 외양으로 눈길을 끌었다. 운동화를 착용한 선수가 물을 마시며 몸을 풀고, 대규모 군무가 재즈 리듬에 꼬고 굴신하며 양팔로 날개 짓하듯 솟아오른다. 달리는 마라톤 포즈 사이사이에 “마라톤을 완주하는 젊은이”가 마주할 여러 단상들을 제시한다. 제목에 충실한 통일성과 함께 정형적 틀을 벗어난 기교 발굴이 모범적이다.


 

 

 〈리투얼〉의 부제는 ‘신뢰와 용기의 문’이다. 어머니의 백팔배를 삶 속의 ‘의식’으로 본 임혜경의 작품은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긴 플레어스커트가 흔들릴 정도의 큰 보폭으로 등장한 여인이 촛불을 밝히고, 이어 등장한 소녀가 교습 받는 방식으로 여성 2인무가 전개된다. 일상복 차림을 한 안무자의 어머니가 무대에 등장해 볼룸댄스 포즈로 안무자와 함께 스텝을 밟으며 세대교체를 묘사하는 마무리다. 일상에서 인간의 존귀함을 구분해낸 사유가 예리하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양일간(11월 24-25일) 공연된 폐막작 〈처용〉은 한국적 소재에 의한 창작발레 기획제작을 염두에 둔 발레협회의 첫 산물이다. 발레 〈처용〉은 초대 국립발레단장 임성남이 1981년에 초연, 1983년과 1985년에 재연했으나 수많은 다른 작품들처럼 사장되었다.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을 지낸 문병남의 신작 〈처용〉은 임성남과 무관하나 동일한 소재로 레퍼토리화 한다는 취지를 지녔다. 거대한 무대세트, 수차례 바뀌는 의상, 오케스트라 연주는 물론 작곡까지 의뢰한 제작 규모가 대단하다. 특히 25일 공연에는 전 국립발레단 수석 김현웅과 솔리스트 윤전일이 처용과 역신으로 각기 열연해 전문적 기량의 발전상도 확인했다. 
문애령
이화여대 및 동대학원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미국 조프리발레스쿨 등지에서  수학했다. 월간 '객석'의 예술평론가상 공모를 통해 무용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객석> <몸> <춤웹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비평작업을 하고 있다.
2017. 12.
사진제공_한국발레협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