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7 서울시무용단 정기공연 〈로미오와 줄리엣 Blue Bell〉
‘길을 잃어버린 최초의 지점’은 어디일까
이지현_춤비평가
 서울시무용단이 전 단장의 임기 후 정기공연(11월 9-1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김충한 안무가에게 의뢰하였다. 작년에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해 그의 걸작에 대해 변함없는 애정으로 유럽의 나라들이 기념공연을 한 것과 맞물려 한국춤 안무가는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국춤 그것도 ‘창작무용극’으로 변환해보고자 야심찬 출사표를 던졌다.
 기존 단원 32명을 포함하여 8명의 연수단원과 8명의 객원 남성무용수 그리고 여자 주인공과 오르가니스트 등 50여명이 출연했을 뿐 아니라 이병준 극작, 김태근 작곡, 무대디자인 임일진, 의상디자인 선미수 등 관록을 충분히 갖고 있는 무대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올리는 오랜만의 대작이었기에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립무용단의 네오 클래시시즘(신고전주의)을 등대로 세우고 출발한 ‘새로운 무용극’에 대한 〈리진〉과 〈춘상〉의 도전이 모두 2017년에 일어난 것이고 서울시무용단의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그 흐름의 연장선에 놓인다면 2017년은 ‘한국 무용극’에 있어서 국시립무용단이 의미있는 실험을 한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시간을 넘기는 런닝 타임만 보더라도 안무가 뿐 아니라 서울시무용단원과 창작스텝이 얼마나 성의와 열정을 담으려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춤 안무가 중에서 드물게 남성적인 에너지를 갖춘 힘 있는 안무를 할 수 있는 안무가답게 그의 무대는 긴 시간 속에서도 지루할 틈 없이 몰아치는가 하면 어느 순간엔 군무의 역동성이, 그것이 아니라면 귓속에 내려앉는 강렬한 음악의 테마가, 또 다른 장면에선 지켜볼만한 무대전환과 이미지와 색감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무대를 채워나갔다.


 


 왜 셰익스피어인가?

 한국춤이 동시대춤이 되기 위한 모색 중에 우리의 전통을 현대 감각으로 재조망하는 방식은 아주 보편적인 큰 방향성이다. 그 중 국시립무용단이 또 하나 갖고 있는 역할과 책임은 구체적 대상인 국민과 시민을 작품으로 수시로 만나면서 그들의 문화향수권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야 하고, 창작결과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창작방향과 논리에 대한 의미부여 역시 공공영역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 책무를 가진다.
 그런 공공성에 대한 예술단의 책임부담은 국시립 무용단이 각 장르와 지역에서 설립되는 2010년 이후에 뚜렷해졌고 창작환경의 이 같은 변화는 더디긴 해도 한국춤에 있어서 강력한 환경의 자극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는 사이 노회한 안무가의 퇴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으며 중진 안무가들이 새로운 환경, 공공성이 강화된 환경 속에서 창작을 시작하고 있으나 그들의 의식은 아직 이런 변화를 아주 조금 밖에 눈치 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예전 노령의 예술감독들이 하던 담론이나 의미부여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 상황이고, 그에 따르는 작업방식 역시 새로운 상황에 맞게 변화해나가야 할 때인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니 왜 ‘로미오와 줄리엣’인가란 질문이 떠오른다. ‘사랑’에 많은 의미부여를 하고, 서구의 텍스트를 한국춤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 Blue Bell〉은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것이라는 특이성을 작품 속에서 생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면 수많은 애절한 비극적 사랑의 보편성만을 드러낸다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지는 않을 터인데, 원전이 있는 작품을 차용하면서 그것을 차용하지 않았을 때와 차별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치기어린 포장용 차용일 뿐이다. 게다가 보편적 비극의 밋밋함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우리의 설화와 접목하기 위해 청동종이야기를 접합시킨 것은 더욱 궁색해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춤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서구의 원작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업일지 몰라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극작가 한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서구 텍스트 차용을 매우 쉽게 편의적으로 한 것이 작품의 근간을 위태롭게 하였다.


 



 고전 對 전통의 혼란

 우리 한국 무용가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혼란은 자신이 배운 신무용류의 춤들이 전통춤인줄 아는 것이다. 지금 50대라고 하면 제대로 춤을 배운 시기는 10대일 것이고 그 시기는 한국 전쟁 후 남북분단에 이어 사회가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남한에 정착한 무용가들 역시 활동을 복구하여 안정되기 시작한 1970년대이다.
 서울 중앙의 근대식 무대라는 환경과 일제하에서의 외래문물의 영향으로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한 한국춤은 최승희의 대대적 성공으로 신무용으로 형성되는 급물살을 타게 되고 남한에서 1920년대에 탄생하고 이후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친 무용가들―송범, 김진걸, 황무봉, 김백봉 등―이 왕성한 활동을 하던 1950-60년대에 일군의 스타일로 완성되어진다.
 그러니 지금의 50대가 춤을 배운 시기에 뚜렷한 지방춤을 집중적으로 수련하거나 한성준 가문에서 춤을 배운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신무용 1세대의 영향 속에 있게 되고 특히 80년대에 대학 무용과에 입학하면서 대학에서 춤을 배운 두 번째 세대가 된다.
 그런 50대 한국춤 안무가들이 현재에 한국춤이 현대무용 동작과 유사해져가는 상황을 자각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해결을 위해 돌아가야 할 지점에 대해 그들이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마 앞서 언급한 신무용 형성기까지일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시점과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은 자신이 선택한 상황이 아니기에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가장 오래된 과거라고 생각해 그것에 ‘전통’이라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는 전통이 될 수 있으나 사회 보편적으로 통용될 전통과 혼돈되어져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무용을 배웠다는 것의 힘은 자신을 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바라볼 학문적 소양을 갖춘 것일 텐데 우리의 대학교육이 부실한 문제가 이런 혼돈에서도 확인이 된다. 교수가 자신이 명무가 되고 싶고, 전통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만을 가르치니 대학이 어찌 대학이고, 무용과 졸업생이 무용의 역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겠는가. 모든 게 자기포장용이고 아전인수식의 해석들…
 그런 졸업자들이 이제 중진 안무가가 되었고, 또 다시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이 다 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회활동을, 더욱이 공공영역의 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인 상황이다.
 김충한 안무가 역시 매우 의욕적으로 한국무용극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개선해나가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윗세대 안무가가 해놓은 흐름을 객관화시키지 못하여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면서 서양의 고전이 보편성이 있을 것이란 시대착오적인 착각과 예술적으론 매우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그것을 전통의 현대화의 하나의 방안인 양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진지하게 설파한다 해도 자신만의 사유가 결핍된 오류에 불과하다.


 

 



 익숙하고 낡은 것들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포함된 동아시아 문명에서 음양오행의 원리는 동아시아 예술에서도 가치있게 사유되었다. 그리고 그 원리를 잘 포착하고 담아내는 것이 미학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차면 기울어야하고, 태어나면 죽어야 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생성과 쇠락의 원리는 벗어나기 어려울뿐더러 받아들일 때 그 깊이와 아름다움이 빚어져 나온다. 
 모든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는 여성주의에 역행하는 멜로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우리시대에 필요한 걸까? 시기와 반목, 갈등과 투쟁의 요즘 사회에 필요한 것이 젠더에 찌든 로미오와 줄리엣이 보여주는 사랑 모델이 답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우긴들 예전 송범 때부터 보던 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표현의 구조와 구성을 가리고 새롭게 변화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뮤지컬의 표현방식이 우리 무용극이 모방해야할 모델일까? 아니 그것의 긍정성을 모방한 것이 이런 모습일까?
 ‘새로운 무용극’ 이든 ‘창작무용극’이든 이전 세대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시도하려는 의욕과 능력을 갖춘 안무가들이 어느 정도의 변별능력은 갖추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춘 춤의 형식원리와 미학구조를 객관화하고 그것과는 다른 이 세상의 춤들을 찾아보고 탐구하면서 학연, 지연, 인연에 휘둘리지 말고, 물질적 투입에 유혹당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동시대를 바라보고 느끼면서 생각한다면 자신만의 해법이 왜 나오지 않겠는가? 한번이라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작품을 관객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바라보거나 작품을 본 관객에게 신분을 속이고 대화를 나눠본다면 그러면서 답을 찾는다면 그래도 자신만의 해답이 안 나올까.
 「동의보감」에도 몸속에 익숙하고 낡은 것, 즉 며칠 전에 먹은 것들이 내 몸과 이별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으면 거기서 병이 생긴다고 한다. 익숙하고 낡은 것과는 헤어져야 한다. 익숙하고 낡게 느껴졌다는 것은 나와 헤어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신호인 것이다.
 특히 매번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결과보다는 그렇게 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대 예술가에겐 나의 선생이 하던 것, 무용수들에게 익숙한 것, 자기의 과거작품과 비슷한 것과는 결별하는 것이 예술적 건강에 좋다. 무용극이 화두가 아니라 춤을 대하고 바라보는 자신의 방식이 앞서야 하고 그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은 사람이 세상에 나와 (공공영역에서) 안무를 하는 것이 예의다.
 한국춤에서도 자기의 답, 자신만의 방식이 서사의 출발이라는 명제는 다르지 않다. 우리 한국춤이 회복해야할 것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명작이 아니라 신무용에서 거세된 자신의 서사와 자신의 표현방식을 찾는 것이 아닐까. 또 시민의 극장에서 시민의 세금으로 개인의 혼돈과 착각에 찬 작품을 보는 쓸쓸한 초겨울이었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12.
사진제공_서울시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