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용이 된 연극 〈햄릿〉 서미숙ㆍ박호빈
좁아진 주제 전달과 이해의 폭
이상일_평론가. 문화예술멘토원로회의 대표
 줄거리가 있는 연극은 결말이 해결로 끝을 낸다. 혹은 결론을 내지 않고 열어 놓기도 한다. 그리스 고전극이나 근대희곡들은 대체로 사건의 결말이 나서 막이 내리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폐쇄희곡이라 하고 현대희곡에 이르면 종말의 끝을 맺지 않고 열어놓는 경우가 많아서 개방희곡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극작(劇作)의 상식이다.
 고전극의 실연(實演)이나 패러디, 오마주 작품들이 극장무대에 오를 때는 개방, 폐쇄 같은 줄거리의 분철(分綴)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극은 구상(具象)적이기 때문에 줄거리의 연속이나 단절, 생략, 그리고 복구의 일관성이 유지되기만 하면 복잡한 구성이라 하더라도 웬만하면 주제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런데 구상이 추상(抽象)으로 바뀌는 예술장르의 세계에서는, 그러니까 연극이 무용이나 음악양식에 담기게 되면 서사(敍事)의 일관성을 좇던 수용자들은 매체의 활용을 일백팔십도 바꾸어야 한다. 가령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을 소설 ‘영웅’으로 옮겨 써서 읽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추상예술인 무용으로 탈바꿈시켜 춤출 수 있을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실험을 내세우는 전위예술가들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전위예술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전공 장르에 갇혀 있던 연극인이나 무용가, 음악가들이라면 고유양식에서 벗어나 장르를 드나들며 숨을 고르는 모험도 하고 싶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지나면서 문화사조가 양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총체ㆍ종합예술과 융ㆍ복합예술을 지향하고 학문적으로도 통섭(統攝ㆍconsilience)이론이 학문과 예술의 영역마저 서로 교류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21세기의 새로운 문화예술영역이 새로 창조될 수도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상식이 무너지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예술양식이 새로 탄생하고 상식적인 예술의 장르들이 사조적으로 뒤섞이고 있으며 조명이 빛을 발하고 의상의 패션영역이 확고해지며 영상이미지의 에어로웨이브도 어떤 장르영역을 확보하게 될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연극 〈햄릿〉이 무용의 모티브가 되거나 추상무용이 햄릿 주제를 무용예술적으로 비틀어 영상을 이어가도 구상이고 추상이고 가릴 시빗거리가 아니다.


 

 



 서발레단의 〈크레이지 햄릿〉과 박호빈의 한ㆍ영합작 〈햄릿, 카멜레온의 눈물〉

 무용이 된 연극 〈햄릿〉은 먼저 서발레단의 〈크레이지 햄릿〉(초연은 2016년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이번 재공연은 12월 7~8일.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이었고 안무가 박호빈의 한ㆍ영합작〈햄릿, 카멜레온의 눈물〉 (12월 9~10일. 강동아트센터소극장)이 구상과 추상의 마찰로 예술이해의 교두보역할을 어느 정도 해냈는지 궁금해진다.
 무용 〈햄릿〉 공연은 ‘크레이지’와 ‘카멜레온의 눈물‘이라는 모티브를 포인트로 주제를 집중해 표현해내고 있다. 서미숙의 초연 〈햄릿〉에 대해 나는 이렇게 논평했다.

-- 미친 햄릿이 주역인지,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형수와 결혼해서 왕좌를 차지한 숙부 클로디어스와 어머니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가 진정 미친 것인지-정답은 오필리아가 분명하다. 햄릿은 미친 척 할뿐, 그의 내면풍경은 사막이다.

 이번 〈햄릿〉재연에서 서미숙은 추상의 이해 폭을 넓히기 위해 구상적인 연극적 요소, 곧 연기자의 활용과 대사를 많이 삽입했다. 그렇게 되니까 무용적 순도가 많이 떨어지고 연극적 구상성이 추상적 직관적 이해를 방해한다.
 무용〈햄릿〉은 미친 햄릿의 내면풍경을 사막으로 간주하여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극중 포인트는 계단으로 구체화된 무대세트 세 군데를 거점으로 숙부와 어머니와 오필리아에게 초점을 맞춘다. 사막의 거친 풍광이 그들 세 사람과 햄릿의 행동을 대변해 주고 있다. 어느 쪽이 미쳤는지 분명한 캐릭터 설정은 안무가 몫인데 그 점을 의식한 안무자는 초연에 나오지 않던 내레이터 역으로 연극처럼 배우(강다형)를 첫판부터 등장시킨다. 연기자의 몸짓이 너무 크고 목소리도 너무 우렁차서 무용공연이 연극판으로 착각되는 점이 아쉽다.
 서발레단의 망령들과 함께 숙부인 국왕 클로디어스(이원국)와 왕비인 어머니 거트루트(도아영)의 에로스와 음모와 유도(誘導)는 망령들의 일사불란한 집체와 함께 미친 정황을 조성해 표현적인 협조를 이룬다. 그런 가운데 햄릿(조형준)은 현대무용적인 움직임으로 사뭇 겉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미친 햄릿만이 제정신이고 방계 세 사람들이 미쳐 보이고 그 가운데서도 진짜 미친 캐릭터 오필리아만이 진정 〈크레이지 햄릿〉의 핵심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크게 보면 1부 거트루트 부분과 2부 오필리아 부분으로 미친 햄릿이 양분되듯 한다.
 햄릿으로 하여금 미치게 하는 것은 세속스러운 어머니의 행적이고 어쩌면 성스럽기조차 한 오필리아의 고뇌가 아닐 수 없는데 광증(狂症)의 두 포인트 대신 사막의 햄릿을 투영해서 미친 증세의 분열을 드러낸 것은 안무의 의도인가, 연출의 과욕인가. 그런 측면에서 형상화가 손쉬워 보이는 캐릭터들이 단편화(斷片化)되어 초연 때보다 연극적 구상성은 풍부해졌지만 무용적 순도가 떨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햄릿, 카멜레온의 눈물〉도 영국 필립 파 감독과 배우 브레트 브라운 참여의 연극ㆍ무용화 작품-안무가 박호빈의 현대무용이랄까 융ㆍ복합 퍼포밍아트 형식이다.
 이 무용공연〈햄릿〉의 포인트는 비정한 악어의 눈물처럼 위장된 변신의 카멜레온 눈물로 변죽을 울린다. 햄릿을 축으로 한 어머니와 숙부와의 관계를 희랍비극 〈외디푸스〉의 모자관계, 아버지 살해로 콤플렉스화 하여 신화적 점복(占卜)의 위력을 과시하고 스핑크스의 원초적 수수께끼 풀이로 무대 확대와 주제의 외연(外延)을 노린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처럼 햄릿은 복수라는 무기로 숙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고 싶은 잠재적인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렸을까. 그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무용극 〈햄릿-카멜레온의 눈물〉에서는 외디푸스 신세가 바로 햄릿 자신임을 밝히는 사건전개와 인물 중첩수법을 차용하였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연극적 구조는 추상언어인 몸의 무용언어로서는 선명하게 스토리텔링 어법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뚜렷한 부각이 불가능한 표현영역이다.
 그야말로 직관적으로 꽂혀오는 이해의 진폭은 원작 햄릿의 시퀀스적 ‘분위기’가 무용이미지로 표현되었을 때 겨우 파악이 된다. 직접적인 이미지로 굳혀지는 형상화가 아니면 연극의 구상성(具象性)은 무용이미지의 긴장의 끈을 쳐지게 만드는 법이다. 그래서 해설이나 설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연극적 대사(말)로 반영되는데-그것도 영어 같은 외국어로서는 번역의 소통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려 에피소드의 이해조차 느려진다. 대본에 있는 장면과 Text의 넘버링도 혼란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독백의 경우도

(프린트된 번역대본에 의하면)
---마음에 고상한 마음을 품고 무서운 재산의 화살과 화살을 짊어지느냐,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팔을 짊어지느냐, 아니면 반대하는 말을 말을 하느냐? 죽을 때: 자고--(Text 8)

라든지

장면 7-2 오필리아의 죽음 (Text 6)
달콤한 스위트 - 달콤한 스위트/ 너의 가난한 사람들이 물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물/ 나는 네 신부를 생각했다./ 신부 침대 자존심 침대/ 인어가 그녀를 지루하게 한 것처럼/ 그들은 그녀를 낳았다-죽은 사람들의 손까락/ 죽은 남자의 손까락이 그녀를 낳았다./ 죽은 자, 죽은 자, 죽은 자(로즈곡의 첫 번째/두번째 구절로 노래하기)--

 이러한 대사(말)의 효과는 서투른 번역 때문에 연극대사의 리듬효과까지 박탈한다. 매끄럽지 못한 TV모니터의 영상은 복잡한 심리상태를 전달하는 서사적 매체의 기능으로서는 효능이 아주 약하다.


 

 

 햄릿의 외디푸스 컴플렉스 탐색이라는 주제는 아이디어로서 참신하다. 그러나 추상예술인 무용공연으로서는 관객에게 오는 임팩트가 연극만큼 충격적이지 않다. 연극적 후광보다 캐릭터 형성에 전력투구하는 한류리와 박명훈의 뛰어난 테크닉과 표현력이 오히려 신선하다.
 증오라든지 죽음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햄릿의 캐릭터에 함부로 투영되어 외디푸스 모티브가 드러나지 않는 것도 무용 〈햄릿〉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제한한다.
 연극 〈햄릿〉의 시퀀스들을 떠올리며 이해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무용극적인 이미지로 대체시키고 그런 가운데 무용적 이미지를 걸러내는 복잡한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햄릿과 외디푸스 두 관념의 심리적 중첩현상에서 빠져 나와야 햄릿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심층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잡한 카멜레온적인 변신의 술수인가 ---햄릿의 명쾌한 몇 장면만 즐기고 햄릿의 내면적 외디푸스 콤플렉스까지는 전문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용이 된 연극〈햄릿-카멜레온의 눈물〉처럼 그만큼 해체되는 작업도 유의의하다 할 것이다. 
2018. 01.
사진제공_서미숙, 박호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