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나 유 프로젝트 〈구토〉
이 시대 존재를 향한 구원의 화두
김채현_춤비평가
 우리 존재는 타인과 사물에서 도대체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존재하는 것 또한 우연일 뿐이며 허무와 고독의 지배를 받는다. 사르트르의 소설이 던진 메시지이다. 메스꺼울 정도의 부조리로 점철된 존재들의 압도적인 현실을 벗어날 방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일, 살아가는 일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 소설에서 착상 받아 미나 유가 같은 제목으로 공연한 〈구토(嘔吐)〉(12월 2일, 국민대 예술관)에서 질문하는 화두(話頭)이다.




 소설과는 좀 다르게 〈구토〉는 질식할 듯한 지금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각자 홀로 그 무엇에 쫓기는 사람들은 쫓기는 줄도 모른 채 제 자신에 몰두할 뿐이다. 어느 순간 자신에의 몰두를 멈추고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대며 관계를 맺는 듯하나 끝내 각자의 존재로 스러져간다. 존재들이 제 홀로 그러나 동시에 모두 스러져가는 마지막 부분에 미나 유가 지금의 세태를 진단하는 시선이 농축되어 있다.
 〈구토〉에서 최우선적으로 거론할 바는 미니멀리즘을 춤에 무한대로 적용한 점으로 보인다. 짙은 쥐색 캐주얼 차림의 일곱 춤꾼들이 한 명씩 무대를 가로지르며 대개 1분 사이에 저마다의 움직임을 마치 광기(狂氣) 들린 듯이 날뛰며 질주하는 것으로 무한정 반복한다. 검정색만 보일 뿐인 무대에 수평의 조명을 따라 날뛰는 춤꾼들만 부각된다. 남녀 구분 없이 팝핀, 셰이킹, 슬라이딩 등등 제 나름 허우적대고 비틀대고 미끄러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회전하고 경련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어대며 날뛰는 그들 뜀박질 각각의 움직임들은 매우 격렬하다.


 

 

 예상과 상식을 단연 능가하는 이 미니멀리즘 환경은 춤계에서 전에 전혀 접할 수 없던 독보적 의의를 띤다. 여기서 관객의 시각에 잡히는 무대 요소는 검정색 허공으로 최소화되고 춤꾼은 어둡고 푸른, 간간이 어둡고 붉은 한 줄기 광선속에서 개별적으로 최대한 부각되며 그 움직임들은 무한정 반복된다. 어두운 밤 옥외에서 나 홀로 흥에 겨워 체조하는 그런 식의 모습들은 아주 리드미컬하며 춤 스텝은 마치 스트리트 댄스를 총망라한 듯이 다채로우며 박진감이 넘친다. 도입부의 찌지직 전자파 굉음에 이어 랩 뮤직과 디제잉의 점차 빨라지고, 급하게 가팔라지는 힙합 계열 음향이 거듭 거듭 되풀이되면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리듬에 몸을 내맡긴 듯한 모습들이다. 그 속에서 춤꾼들이 확실하게 보여준 사실은 그들 각자가 정체가 명확치 않은 어떤 충동에 휩쓸려 무대를 가로지르는 질주를 거듭한 점뿐이다.
 1시간 남짓 공연의 절반 시간을 이 뜀박질 질주에 과감하게 할애하고 있듯이 〈구토〉에서 이 부분은 엄청 강조되고 있으며, 아마도 이 부분에는 객석이 구토가 날 지경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바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움직임으로 표출되는 춤꾼들은 움직임에 최대한 몰입하는 자기 집중성을 강력하게 보여 주었으며, 이 강력한 집중성은 춤꾼들이 제 흥에 겨워 그러기보다는 모종의 동기에 따라 뜀박질을 연출한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낸다.
 단적으로 정신없는 인간 군상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강해 보이는 이 부분에서 객석은 압도당한 것 같다. 움직임과 음악, 무대, 조명에 두루 적용된 미니멀리즘의 쾌거이다. 춤꾼들이 진폭이 넓은 광폭(廣幅)의 움직임으로 질주에 몰입하도록 한 안무자의 의지는 미니멀리즘이 형식주의에 맴도는 법 없이 춤 구성의 실질적인 한 방법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어지는 후반부는 붉은 무대로 돌변하며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이 느릿 배회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거듭 들려오는 타이프라이터 음향이 사람들 간의 대화를 암시하는 가운데 그들은 배회하되 대화에 애쓰는 듯한 눈치들이지만 상호 소통을 이룬 것 같지는 않다. 의료기구의 주파수 도형과 음향을 따라 두 사람의 대거리가 연출되어도 상황에 뚜렷한 진전은 없다.
 영화 〈일급 살인〉 〈피아니스트〉 〈타이타닉〉의 발췌 영상을 배경에 곁들여 진행된 마지막 15분간은 영화의 맥락과 호흡을 맞춘다. 제 혼자 탈출을 기도하다 단념하는 사람은 현실이 감옥 같이 밀폐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이어 여럿이 숨바꼭질하듯 상대방들을 주시하며 간혹 몰려다니다 흩어지고 때로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군가의 몸이 느릿느릿 쓰러지면서 춤꾼들 모두 그런 양상을 보인다. 〈피아니스트〉의 음악(쇼팽의 〈발라드 1번〉)과 〈타이타닉〉의 음악(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 두드러지는 이 부분은 짙은 여운을 길게 남긴다.
 〈피아니스트〉의 해당 부분 말미에 자신을 살려줘 감사하다는 피아니스트의 반응에 오히려 나치 독일 장교는 신에게 감사할 일이라 답한다. 인간애가 진한 순간이다. 이 지점에서 춤꾼들은 비로소 서로를 접촉하고 돌보려는 낌새를 보이지만 끝내 실의에 빠진 고독한 군상으로서 망연자실한 채 서성인다. 잇달아 〈타이타닉〉의 영상으로는 물이 연방 들이차는 선상의 수많은 승객들이 우왕좌왕 피신하는 아수라 지경에서도 악사들이 자발적으로 찬송가를 연주하는 처연한 화면이 등장한다. 타인과 가족을 위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육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그 화면과는 대조적으로 일곱 춤꾼은 모두 쓰러져 제각각 버둥대다가 탈의로써 맨몸을 드러낸다. 맨몸이라는 인간의 최소치에 도달하는 이 부분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육신)에 갇힌 사람의 비극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 이르러 〈구토〉 무대는 육체만 남아 고독한 사람은 자유는 있을지언정 추억도, 의미도 미약한 헐벗은 존재(껍질뿐인 존재), 게다가 인간애와는 동떨어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전한다. 전반부와는 전혀 다르게 숙연한 분위기로 마감하는 〈구토〉는,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존재에 대해 희망의 끈을 대면서 그 구원과 의미 있음에 대해 묻는다.


 

 

 〈구토〉는 오랜만에 만나는 압권이라 하겠다. 후반부에 다소간 선명도가 더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더라도 전체적으로 오늘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이어가면서 구원을 헤아리도록 하는 뜻을 사려깊게 제시하였다.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미니멀리즘의 방식으로 춤을 집요하고도 조밀하게 구성하여 작품의 질감을 한껏 드높였다. 70대 중반 연령이 무색할 만큼 30대의 결기를 과시하면서 미나 유는 참신한 감성으로 우리 시대 존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환기하였다. 2017 한국춤비평가상 후보작으로 〈구토〉를 추천할 때도 필자는 사회 및 인간과 함께 하는 춤 의식(意識)을 선도한 점을 강조하였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8. 0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