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스윙〉
이 애매한 혼종을 신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방희망_춤비평가
안성수 예술감독이 국립현대무용단에 부임한 이래 ‘신작’으로서 두 번째로 선보인 〈스윙〉(4월 20~22일, CJ토월극장, 평자 21일 관람)은 관용적으로 통용되곤 하는 ‘신작’이라는 표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되묻게 하는 작품이었다.

 


 전임 안애순 예술감독 시절 국립현대무용단은 ‘수행’이라고 번역되는 퍼포먼스에 관한 외국의 이론들과 담론을 무대 위에 담아내기 급급한 듯 보였다. 현대무용이라는, 이젠 그 개념조차 명확히 구분짓기 어려운 이 장르는 분명 우리 안에서 먼저 자연발생된 것이 아니기에 학문의 시류를 좇아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정표를 세웠던 독립된 혁명가들은 그 자신의 몸을 수행의 제물로 직접 내놓아 관념과 실천을 일치시켰던 반면, 그때그때 작품에 따라 오디션을 치러 일시적으로 고용한 무용수들을 통해 관념을 전달해야 하는 시스템을 가진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이론은 말 그대로 이론에 그치기 쉬웠다. 채 뜸들지 않은 말의 잔치 속에 관객은 지쳐갔고 ‘현대’무용임에도 동시대와 불화하고 있다, 어렵다는 이미지는 거기서 비롯되었던 듯하다.
 안성수 예술감독이 이런 면면들을 의식하여 레퍼토리 전개에 반영해 나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립현대무용단의 공연을 꾸준히 관람해 온 사람이라면 이번 〈스윙〉처럼 일찍이 이렇게 매진사례를 이루며 관객의 열띤 호응을 얻어낸 공연이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로 객석 반응의 차이는 극명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흥행이 온전히 안무가의 전략과 감각에 힘입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윙〉의 파트너로 합류한 스웨덴 6인조 밴드 젠틀맨 앤 갱스터즈(Gentlemen & Gangsters)는 국내 스윙댄스 동호인들의 파티와 축제의 반주자로서 몇 년 전부터 자주 초청되었던 팀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동호인 문화 속 친숙한 음악인들을 그대로 공연장에 모셔오면서 국립현대무용단은 적지 않은 관객까지 자동으로 확보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음악을 ‘정통’ 뉴올리언스 핫 재즈 스타일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어폐가 있어 보였다. 그들의 출신을 콕 집어 얘기하려 함이 아니다. 스윙 특유의 그루브가 그들의 연주에서는 마치 곡선을 옆으로 잡아 늘여 편 듯 직진으로 뻗어 악흥(樂興)의 정감이 스며들 여유가 없었다. 우리에게도 어깨춤이 있듯, 스윙도 은근히 달구어 저절로 어깨 춤사위가 나오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젠틀맨 앤 갱스터즈가 동호인들의 행사에서 분위기를 불어넣는 모습만 보아도 이렇게 내달리지는 않았었다. 기교를 갖춘 무용수들을 데리고 자신의 안무를 얹으려는 안무가가 업 템포를 주문했을 터이다.




 거의가 익히 잘 알려진 16곡의 재즈 넘버(더구나 시작과 끝을 ⟨In the Mood⟩, ⟨Sing Sing Sing⟩으로 배치했다)를 바탕으로 안무가는 대중춤으로서의 스윙댄스에서 무엇을 진화시켜 ‘새롭게’ 보여주었나. 안성수 특유의 팔을 엇갈려 들어 회오리처럼 찔러 넣는 동작들은 여전했고 과밀한 안무구성이 재즈리듬 사이에 버겁게 들어앉았다. 새로움을 이야기하기엔 그의 안무들이 전작에서 익히 보아왔던 형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여타의 스윙댄스가 아닌 안성수표 안무라 하여 공연 내내 전해져 오는, 이 작품이 뭔가 안이하다는 인상이 상쇄되진 않는다. 근래 한참 유행했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 아미 해머를 닮은 듯한 트럼펫 주자 폴 월프리드슨의 훤칠한 외모와 사근사근한 무대 매너는 처음 접하는 관객이라도 좋아할 만했고, 오디션을 통해 재야의 숨은 고수들을 찾겠다던 예술감독의 인터뷰(〈춤웹진〉 2017년 1월호 참조, 
http://koreadance.kr/board/board_view.php?view_id=166&board_name=plan)와 달리 스타급 무용수가 다수 포진된 출연진의 면면을 보면 예술감독은 손쉬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거듭 드는 것이다. 
 가공된 환상적인 세계, 아름다움으로만 치장한 발레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와 무용수의 몸 너머로 인간의 의지를 보라 선언했던 현대무용의 정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복고풍의 의상이 우리가 향수를 느껴야 하는 영화(榮華)로운 어떤 시점을 정당하게 지목하고 있는가? 곱게 스타일링한, 동경과 선망의 대상으로서의 무용수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는 동안에도 왜 우리가 ‘뮤지컬 같은’, ‘영화 같은’, 혹은 ‘콘서트 같은’ 따위의 수식어를 동원해 이 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저 수식어들이 내포한 뜻은 일반적으로 ‘즐겁고 화려한 볼거리’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전까지의 현대무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도 되며 한편으로 이 〈스윙〉은 그런 ‘볼거리’, ‘즐길거리’이고자 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거듭 쓰지만 춤이 춤으로써 스스로를 세우길 포기한다면, 다른 어떤 무엇의 힘을 빌려야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존재의미가 무엇인가? 〈스윙〉이 자신을 ‘세상 근심을 잠시 잊게 한 판 뜰 볼거리’로 규정한다면, 그동안 안성수 사단의 선봉장으로 그 안무를 전파해왔던 무용수 이주희의 출연이 이 무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으면서 자충수가 되었다는 것을 유감스럽지만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
 비평가로서 대중들이 춤을 향유하고 소비하는 문화의 부피가 생각보다 훨씬 큰데도 놓치고 있었다는 반성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번 〈스윙〉의 역기능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자조적일까. 전임 안애순 예술감독 시절엔 목적을 알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안무가가 자부하는 음악적 취향이 바람직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음악의 해체, 혼합과 재구성 등을 안무의 단초로 삼는 안성수 예술감독의 작업이 거기에만 몰두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갖길 바란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5.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황승택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