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A. T. 드 케이르스마커 〈Violin Phase〉
현장과의 동화(同化) 선사한 미니멀 댄스
김채현_춤비평가
모리스 베자르(20세기발레단 예술감독, 1927~2007)의 현대 발레가 주도하던 80년대 벨기에에서 현대춤의 빗장을 열어젖힌 인물로는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 T. de Keersmaeker)가 들어진다. 그녀의 〈바이올린 페이즈(Violin Phase)〉는 1981년 발표되는 즉시 단번에 주목을 끌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눈에 띈다. 이 작품은 그녀가 춤공부로 유학중이던 뉴욕에서 약관(弱冠) 21살 때 발표하였고, 지금까지 현대춤에서 자주 공연된 레퍼토리로 손꼽을 만하다. 이번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다원예술 프로그램에 초청받았다(2018. 4. 2~3. 6회 공연, 서울관 지하 로비).



 

 〈바이올린 페이즈〉는 같은 이름의 곡을 음악으로 썼다. 이 곡은 미니멀 뮤직 계열의 초기작으로 스티브 라이히가 1967년에 작곡한 것이다. 라이히는 음악에서 한 마디의 선율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그와 동시에 같은 선율이 그보다는 약간 어긋난 속도로 계속 대응하는 페이징(phasing) 기법을 개척하였다. 미니멀 뮤직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짧은 선율은 페이징(우리말로는 위상전이·位相轉移)으로 제작된다. 페이징 기법으로 지어진 〈바이올린 페이즈〉에서 여러 대의 바이올린이 급하게 뿜어내는 날카로운 선율은 그다지 감미롭지 않으며 음악 취향에 따라선 부담스러울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복을 무기로 듣는 이의 청각을 길들이는 바가 있다. 이 음악을 분위기 삼아 〈바이올린 페이즈〉의 춤은 춤대로 자기 흐름을 타고 진행되며, 춤 구성 또한 미니멀적이어서 미니멀 댄스로 분류된다.
 흰 모래가 얇게 깔린 넓은 사각형 바닥(백색의 미니멀리즘?) 위에서 〈바이올린 페이즈〉는 전개된다. 여기서 옅은 색의 낙낙한 실크드레스 차림의 드 케이르스마커는 일정한 스토리텔링이나 정해진 배역도 없는 상태에서 날렵한 회전 동작 위주로 독무를 펼친다. 16분 남짓 공연 시간 동안 그녀는 두 발로 모래 바닥을 문지르거나 가벼운 깡충 뛰기를 번갈면서 두 팔과 상체를 지속적으로 휘두르기를 반복하며, 그 사이에 발자국이 스쳐간 자리에서는 모래 바닥이 파여진다. 모래가 벗겨진 곳마다 밑바닥의 까만 흔적들이 드러나고, 그녀가 움직여나감에 따라 점차 거의 정확한 동그라미, 그리고 동그라미 속을 횡단하는 4개의 지름이 그려진다.
 벌써 공연 초반에 탐스럽게 활짝 핀 꽃 또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연상시키는 검은 궤적이 바닥에 모습을 드러낸다. 드 케이르스마커가 잔걸음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발산한다. 때로는 이동 중에 변화를 주려는 듯 상체를 굽혀 모래 바닥에 손을 갖다 대고, 또 빠른 회전으로 실크드레스가 부풀려 둥글게 펼쳐지거나 말려서 올라가는 순간도 연출된다. 공연이 끝나도록 그녀는 앞의 동작들을 쉼없이 반복하면서 궤적의 선들을 겉보기에는 불규칙적으로 오간다. 음악의 종료에 맞추어 춤도 정확히 끝나는데, 음악이 끝나지 않으면 춤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세로 드 케이르스마커는 춤에 몰입하는 정도가 높았고 상당히 표현적이다.

 


 1960년대 미국 미술의 미니멀리즘은 미술이 환영(幻影, 가상의 이미지) 효과를 제거하고 사물이기를 지향하는 데서 발단하였다. 당대의 이 같은 예술 분위기 속에서 라이히의 〈바이올린 페이즈〉 미니멀 뮤직에서도 스토리텔링이나 구체적 정서가 제거된 소리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이에 동조하는 드 케이르스마커의 〈바이올린 페이즈〉는 몇 가지의 짧은 동작절을 반복할 뿐 어떤 환영이나 구체적 정서를 지시하는 바가 없다. 1980년 무렵 21살의 그녀가 미니멀 뮤직을 접하고 미니멀 댄스에 착안한 것은 매우 조숙했음을 시사한다.
 미니멀 댄스인 〈바이올린 페이즈〉의 속성상 이 춤에서 어떤 환영이나 구체적 정서를 기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관객의 눈에는 하얀 모래가 덮인 사각형 바닥이 사막처럼 보이고 또 춤 진행 과정에서 드러나는 바닥의 검은 궤적이 꽃 또는 수레바퀴 모양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나로선 드 케이르스마커가 그런 구체적인 현상을 환기하려는 의도가 없거나 미약한 상태에서 춤에 집중했을 것으로 본다.
 쉼없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미니멀 뮤직에 상응하려는 듯이 〈바이올린 페이즈〉에서 움직임 또한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미니멀 뮤직과의 동반 관계를 구현하는 장치로서 드 케이르스마커는 바닥에 그려질 궤적으로 동그라미를 선택한 것 같다. 가령 각이 진 사각형 등속의 궤적보다는 동그라미의 궤적에서 그렇게 쉼없이 반복되는 움직임을 보다 용이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그라미 자체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감춰져 있었을 성싶지는 않으며, 다시 말해 동그라미는 유연한 형식적 전개를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 춤에서 음악의 빠르기는 시종일관 ‘거의 동일하며’ 움직임 또한 초반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가는 부분을 제외하면 ‘강도의 변화가 없이’ 경쾌하며 날렵한 기조를 유지한다. 자칫 지겨울 수 있는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점차 〈바이올린 페이즈〉의 춤에 빠져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음악의 흐름을 타고 몇 가지 동작절이 서로 교대하면서 반복되는 나름의 전개 구조에 관객이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관객 나름의 정서도 함께 고양되는 때문으로 보인다. 단아한 모습의 드 케이르스마커가 조용한 표정을 유지한 상태에서 예리한 움직임을 충만한 에너지로 펼칠 때 관객도 그에 동화된다.
 스토리텔링과 환영 효과, 구체적 정서를 배제한 채 단조롭게 반복되는 음향과 몇몇 비기교적 동작절만으로 기하학적 궤적 위에서 춤을 전개하는 것은 어쩌면 드 케이르스마커 스스로 불러들인 자승자박(自繩自縛)일 수 있다. 그러나, 춤의 흔한 요소들이 그렇게 제거된 상태에서도 〈바이올린 페이즈〉에서 관객은 오히려 정서가 고양되고 서서히 현장에 동화된다. 〈바이올린 페이즈〉는 미니멀리즘의 공연답게 관객에게 일임하는 열린 마인드로 이번 서울에서 관객이 춤을 자기대로 향유할 여유를 선사하였다.




* 1982년 벨기에로 귀국한 드 케이르스마커는 〈페이즈〉 4부작을 공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하며, 이를 발판으로 1983년 자신의 무용단 Rosas를 창단하였다. 창단 공연작 〈Rosas danst Rosas〉로 무용단은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자신이 10대 후반에 재학한 무드라(모리스 베자르가 운영)학교가 1988년 문을 닫은 후 1995년 Rosas는 라모네극장과 공동으로 현대춤학교 P.A.R.T.S.를 브랏셀에서 창설하였다. 사실상 스티브 라이히 음악으로 자신의 창작 세계를 열었으나, 정작 라이히가 춤작품 〈페이즈〉를 본 것은 1998년이었다 한다. 〈페이즈〉를 라이히와 협력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낭설로 알려져 있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8. 05.
사진제공_국립현대미술관·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