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두혁 〈고월의 봄〉
춤(봄)은 고양이로다
권옥희_춤비평가

고월 이장희(1900~1929)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현대춤으로 해석한 〈고월의 봄〉(아양아트센터, 6월 12일). 대구문화재단의 ‘문화인물콘텐츠제작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최두혁이 시인의 작품 중 〈눈〉 〈겨울밤〉 〈비 오는 날〉 〈청천의 유방〉 〈석양구〉 〈봄은 고양이로다〉를 춤으로 옮겼다.
 짐작컨대 시들을 옮기는 춤 언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흩어져 있는 모험. 이장희의 호 ‘고월’을 가지고 와서 〈고월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명시하면서도 그 시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고월의 시 하나하나를 그것이 고월 이장희의 생애에서 어느 시기의 어떤 사건과 정확히 대응하며, 어떤 사람과의 어떤 관계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것인가를 확인하고 춤으로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춤을 본다.

 



 빈 무대, 흩날리는 눈이 객석까지 날아들면서 극장 안은 일시에 황량한 겨울벌판이 된다. 최두혁이 눈바람 속에 서 있다. 인상적인 프롤로그다. 채 서른 해를 못 넘기고 자살한 시인. 서른 해 가까이 사는 동안 자신이 누구이며, 역사와 현실 속에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려고 애를 썼으리라. 젊은 청년이 등장하자 자신의 검정색 재킷을 벗어 건넨다.
 이 검정색 재킷은 작품 내내 (이장희)삶을 고백하거나, 마지막 비밀의 언저리, 혹은 침묵 속에 가라앉거나 베일에 가려지면서 청년에서 청년에게로 건네진다. 시인을 상징하는 좋은 장치였다. 재킷을 입은 청년(이장희)이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불어, 러시아어로도 들리는)로 말을 쏟아놓는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봄은 고양이로다...’ 시를 읊지만 그 역시 알아들을 수 없다. 모호한 언어(시)이고, 모호한 춤이었다.
 시 〈비 오는 날〉, “불현듯 도깨비의 걸음걸이로” 검정 슈트를 입은 무리 속에 흰 공을 굴리며 “우경(雨景)에 비틀거리며” 무대를 누비는 이가 있는가하면 재킷을 건네받아 입은 또 다른 청년은 의자위에서 물구나무를 선다. 시인의 삶속에서 후회해야 할 것밖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한 청년의 신음소리 같은 춤이다.

 

 


 시인의 모든 세계가 녹아들어 통합됨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 모든 춤이 여기에서 정리된다. 쓰레기로 채워진 무대는 시인의 분열되고 무너지는 한 세계의 방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쓰레기더미 위에 엎드리고, 그 가운데로 뛰어들어 춤을 추는가 하면, 청년들이 무기력하게 서 있다. 그 위에 시인의 삶이 겹친다. 눈바람이 이는 텅 빈 무대에서 시작하여, 남녀가 춘 불협화음의 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청천의 유방’을 거쳐 ‘석양구’, 그리고 ‘봄은 고양이...’를 통과하여 다시 눈바람이 이는 텅 빈 무대에 서 있는 최두혁(이장희 분)에서 끝나는.
 그 시대 시인이 처한 현실과 안고 있던 고통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없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희망과 좌절, 군국주의와 국수주의 등 사상적 정치적 갈등이 시작되던 20세기 초. 사회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시인은 그 갈등 속에서 태어나 세기를 휩쓸었던 상징주의의 몰락과 함께 개인적 삶 또한 몰락한, 마치 쓰레기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인 이장희가 살아냈던 지나간 시간은 죽어 버린 시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을 춤추는 최두혁이 무대에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라져 버린 시간들로 인한 것이다. 사라졌다기보다는 안무자 최두혁의 정신과 몸 어딘가에 녹아 들어가 있는 시간들이고 무대에서 시를 읊고 시인을 춤춘 무용수의 시간으로 존재한다. 재킷을 서로 건네고 건네받은 무용수가(이장희) 무대 위에서 춘 모든 춤의 순간 속에는 과거 시인이 살아낸 모든 순간이 합쳐져 있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춤의 “불길이 흐르”게 춤을 추고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어놀 듯, 춤으로 예민한 정신(시)들을 다른 세상으로 끌고 간 최두혁의 〈고월의 봄〉이 곧 이장희의 시 정신이라고, 그의 생애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이장희)가 애써 찾고 규명하려한 어떤 것(정신)은 구현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 안 깊은 곳에서 걸어 나와 눈바람 속에 서 있는 안무자(최두혁), 빛났다. 예술가의 아우라는 감수성 문제이다. 예술가의 감수성이란 넓고 깊게 바라보는 능력이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감정적 확신을 무대에 선 최두혁에게서 본다. 아우라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월의 봄〉은 시인의 시를, 생애를 서사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다가가는 그 만큼 멀어지는, 시를 정지시켜 붙잡기에 실패했기에, 그것이 좋은 춤이라는 역설로 설명된다. 안무자가 지지부진한 춤 속에 눈부신 것이 숨어있음을 믿으며 자신이 생각한 모든 춤의 언어로 닫힌 문에 곁쇠질을 하며 보이지 않는 춤의 얼굴을 무수히 확인하려 하는 것. 이 춤의 얼굴은 우리한테 익숙해진 춤 사이에 그 역시 낯익을 모습으로 전혀 예기치 않았던 형식, 서술적이지도, 춤이기도 춤이 아니기도 하는 춤의 구별이 사라진 춤은 시의 말이 드러내는 시인의 감정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게 드러내고 거기서 어떤 서정을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강력한 춤의 정서를 형성한다. 최두혁 춤의 또 다른 확장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2018.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