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댄스씨어터 창 ‘그 말 못한 이야기 S’ · 페미니즘연극제
젠더 재현의 여러 모습
이지현_춤비평가

미투운동의 진동과 열망이 답답하나마 제도적 장치 마련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흐름(도종환 문체 "성희롱·성폭력 행위자 '공적 지원 배제' 추진" http://news1.kr/articles/?3376376)을 만들어 가고 있다. 도장관은 "대책위가 제시한 성희롱·성폭력 고충처리 시스템 설치, 성희롱·성폭력 행위자에 대한 공적 지원 배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 권고사항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의지를 밝혔으니 이 조치가 앞으로 문화예술계에 성희롱, 성폭력 문화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 지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 말 못한 이야기 S'


김남진이 이끄는 댄스씨어터 창이 미투 운동에 대한 주제의 신작 〈RED〉와 작년 부산시립에서 초연한 위안부 문제를 다룬 〈또 다른 봄〉을 묶어서 ‘그 말 못한 이야기 S'(2018. 7. 22. 아르코 대극장)로 무대에 올렸다. 라벨의 〈볼레로〉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음악을 반주음악으로 차용한 두 작품은 무용에서 쓰인 지 오래되어 이미 고전에 속하는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에게는 익숙한 몰입을 도왔고, 두 음악이 가진 강렬한 제의성으로 인해 여성이 제물화되어가는 현실과 상통되는 면은 확보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상시에 다룬 ‘여성 주제’가 아니라 미투운동의 와중에 올려진 시의성이 강한 공연이기에 갖게 되는 ‘어떤 새로운 기대’를 안무가들이 앞다투어 사용하는 음악을 가지고 과연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갖게 하였다.

 



 1부 남녀 듀엣의 〈RED〉와 2부 여성 군무의 〈또 다른 봄〉은 주제의 긴장감과 음악의 강렬함에 걸맞은 긴장감을 생성하지 못한 듯 보인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로는 주인공인 여성을 드러낸 이미지가 여태까지 통상 보여주던 것에서 별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춤이나 창작춤에서 흔히 다뤄오던 피해당한 여성들의 절규와 몸부림, 깊은 한의 정서를 담아낸 어떤 정적과 침울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표현이고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별로 각인되지 않는 여성 무용수의 연기력과 캐릭터, 레드라는 단어가 통상 떠올리게 하는 것, 검은 의상, 격렬한 몸부림과 그것의 중첩화, 그 후에 몸에서 나온 듯한 몸에 묻은 선혈의 이미지와 할머니의 동요 노래, 이내 그녀를 에워싸는 검은 여성 군무의 코러스적 구도와 적절한 여운 뒤에 클리셰에 가까운 종결도 여성의 내면을 상당히 추상화시켜 선형적으로 풀어나간 경우로 보인다.

 

 


 이 교과서적인 담론의 전개는 김남진이 초기 작품에서 보여 왔던 아무도 춤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도발적 주제선정과 거칠지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각을 건드리는 신선한 표현과 낯선 전개를 기억한다면 같은 안무가의 작품인가라고 되물을 만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미투, 몰카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우리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인권차원을 건드릴 만큼, 더 이상 현실을 사는 여성이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남성중심의 고정된 성 역할이 굳어진 가운데의 고름처럼 터져 나온 요즘이다. 그런데 위안부와 권력에 의한 성적인 유린을 다루는 작품에서 김남진이 주로 쓰는 재현 속 여성은 앞에 열거했듯이 이 사회에서 통상 사용되는 코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공연의 제목 ‘그 말 못한 이야기 S’의 S (sexuality, sexual, skinship, skirt, s-line 등을 의미)가 주는 뉘앙스 역시 요즘 여성문제의 깊이보다는 수치심을 바탕에 깔고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다분히 표면적 시각의 한계가 보인다.
 음악은 온갖 긴장을 만들어 내며 점증되거나 음조를 파괴하면서 격렬해지는데, 무대 위의 춤은 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도, 권력을 무기로 성을 착취하는 오래된 관습도 다루지 못한 채 ‘관점과 사건’을 구성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긴장감, 즉 시의적 공감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 〈이방연애〉 · 〈아담스 미스〉


작년 연말부터 기획자 나희경과 드라마투르그 장지영, 디자이너 황가림 이들 셋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주제의 연극을 모아 축제를 만들자는 얘기가 시작되었고, 텀블벅을 통한 펀딩 1700여만원을 가지고 페미니즘 연극 공모를 시작했다. 예상외로 많은 수인 9개의 작품을 선정되었고, 대학로 일대에서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2018. 6. 20.- 7. 29.)가 열리게 되었다.

 요즘 청년들의 주거문제는 뜨거운 주제이다. 창작집단 3355의 〈이방연애〉(Alien Romance)는 ‘방’과 ‘연애’를 주제로 세 명의 ‘퀴어 여성 예술가’(기푸름, 라소영, 이세영)가 방안으로 꾸며진 곳에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서울, 여성, 주거 문제로 연극을 만들자고 했던 연출자 ‘소문’은 그야말로 소문처럼 배우들 말에서 언급될 뿐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고, 나타나기를 지연시키는 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직접 연극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이야기하면서 작품은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우주마인드프로젝트의 〈아담스 미스〉는 아담 스미스의 띄어쓰기를 달리함으로써 위트있게 ‘아담의 실수’로 읽힐 것을 유도한다. 18세기 국부론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 이론을 비판하면서 남녀불평등의 문제를 이브의 파트너 ‘아담의 실수’로 살짝 탓을 돌리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론이 태동되던 당시의 상황을 재미있게 교육만화처럼 풀어내는 우주마인드프로젝트의 신문영, 김승언의 이인극 〈아담스 미스〉는 만인을 평등한 것처럼 설정하는 경제이론의 허점처럼 남녀평등이론이 오히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강압적인 평등론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촌철살인의 속도로 짚어내며 달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지하철 역사에서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폭력을 당하는 사건으로 향하면서 그들 고유의 몸짓과 아카펠라 의태어로 폭력을 실감나게 재연한다.

 



 〈이방연애〉는 실제 배우의 삶을 작품 안으로 갖고 들어오는 다큐멘터리 연극 형식에 가깝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담과 수합된 퀴어 여성들의 생활에 근거한다. 작년 프린지 페스티벌 때 1인극이었던 것을 확장하여 3인극으로 만들어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더 풍부하고 관객이 편안히 공감할 수 있도록 내밀하고 솔직하다. 세 명의 예술가들은 연극 배우로, 기획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제빵, 스피닝 강사, 프리랜서 기획으로 공모제안서를 쓰기도 한다. 그들의 불안정한 일과 노동 강도 덕분에 연극을 하기 위해 돈을 벌려던 일은 오히려 연극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병원비에 많은 지출을 해야 하거나 자신언어를 잊고 행정언어에 길들여지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
 장이 바뀔 때마다 매직으로 써내려가는 각 장의 제목 중 ‘나의 각성’ 장에서는 각자의 각성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람의 화원〉을 보고 동성애를 연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고, 〈헤드윅〉을 통해 배우결심을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사랑의 기원〉을 부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 〈스티븐 유니버스〉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 퓨전으로서 하나의 더 큰 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마음 속의 문장을 옮기기도 한다. 이런 개인적 반경의 이야기는 어느 덧 퀴어이기에 겪어야 하는 이야기로 옮겨 간다. 이성애 신혼부부에게 초점을 맞춘 제도의 혜택에서 제외되고, 애인을 친구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 등 소수자로서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이 방이기도 하고 이방(異邦)이기도 한 ‘다른 나라’에서 그들은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방에 들어가지만 자신들은 방이 아니라 방과 방 사이 문지방에 누워 있는 기분”이라는 고백은 여운을 길게 남긴다. 이 멘트는 마지막에도 몇 번 반복되면서 구획되지 못하는 존재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 준다.

 



 〈아담스 미스〉가 특유의 예리함으로 현재의 여성에게 권리 이전에 생존이 불안한 상황을 잘 포착하여 탄탄한 공감을 이뤄냈다면, 〈이방연애〉는 여성 퀴어 예술가의 삶을 소소하고 따뜻하게 극장공간으로 갖고 오는데 성공하였다. 다큐멘터리가 가진 그들 삶의 실제를 부각시키는 힘은 세 명의 배우를 현실과 연극의 경계 사이를 아무 부담 없이 넘어 다니며 자신을 구성하도록 하여 마지막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언어인 “문지방에 누워있는 느낌”을 건져 올리는데 도착하였다. 이 두 작품의 기본 입지는 기존의 담론을 의심하고, 자신을 좀 더 정확히 있는 대로 드러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드러낸다. 그 결과 여성 퀴어 배우로 범주화하려는 우리의 습성을 가볍게 뛰어넘어 생생한 무대 위 존재들을 각인시키고 마음에 담아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나 만약 이 두 작품이 이후에 발전될 기회를 갖는다면, 〈아담스 미스〉는 서론과 주제부의 시간 비율을 조정하여 여성문제에 대한 비중을 늘려 줄 것과 〈이방연애〉는 생생한 이야기들은 잘 놓였으니 그 이야기 층 아래에 있는 그들만이 느끼는 감정과 감성에 대해 더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가 있고 행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로 우리가 구성된다고 본다면, 여성에 대한 연극이 더 생생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고정된 관념을 벗어나기 위해 행위하고, 드러나지 않은 여성의 욕망을 담아내는 일을 반복 수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담스 미스〉는 기록을 갱신하는 폭염 속에 대학로 야외무대에서 5일간 진행되었고 마지막 날인 29일은 반가운 소나기 덕분에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공연을 했지만 그들이 여성불평등의 기원을 찾기 위해 무대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달리며 쏟은 낙수 같은 땀이 아직도 뚝뚝 흐르는 듯하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8.
사진제공_김채현, 창작집단3355, 황가림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