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클래식에서 컨템포러리까지 국립발레단 간판스타 김지영
고전과 컨템포러리가 어울리기를 꿈꾼다

김지영(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은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이다. 이즈음 그녀는 클래식 발레는 물론이고 한국적 소재의 창작발레, 그리고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에서 절정의 기량과 예술성으로 비평가들과 관객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립발레단에서 시작한 프로 무용수 생활을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을 거쳐 다시 국립발레단에서 만개시키고 있는 그녀는 외국의 발레단에서도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고 있다. -편집자 주-






김채현 우선 모스크바 크렘린 국제 발레 페스티벌(International Ballet Festival at the Kremlin) 초청 참가를 축하드립니다. 이전 국립발레단 단원인 김현웅씨와 함께 가던데요. 9월 25일 <로미와 줄리엣> 공연에 두 사람이 주역으로 출연하지요?
김지영 네. 큰 페스티벌인데,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크렘린 궁 국립극장에서 크렘린 발레단 소속 무용수들과 같이 김현웅씨와 출연합니다.

거기 웹사이트 보니까 올해가 제3회째로 소개되어 있어요. 9월19일부터 9월 30일까지 매일 저녁 대작 발레 레퍼토리를 바꿔가며 행사가 진행되더라고요. <로미와 줄리엣>은 9월 25일 하루만 하는 건가요?
네. 25일 하루만 해요. 22일 출국해서 공연하고 26일이나 27일 귀국합니다.

거기서 언제 초청 연락을 받았습니까?
올해 3, 4월 쯤 국립발레단으로 제안이 들어왔었죠. 단장님께서 처음에는 저랑 다른 단원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다치는 바람에 저랑 김현웅씨랑 가게 됐죠. 유리 그리가로비치 선생님 버전으로 <로미와 줄리엣>을 한 단원이 저와 김현웅씨뿐이라서 아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행사 웹사이트를 보니 9월 25일 날 크렘린발레단이 공연한다는 사실은 공지되어 있는데, 주역 출연진이 한국에서 온 김지영과 김현웅이라는 소개가 아직 없습디다. 다른 날의 다른 공연들도 보니 출연진이 아직 소개 안 되기는 마찬가지고요.
아직은 홍보를 안하나보죠. 이미 주최측과 컨택은 완료됐어요. 음악을 어떻게 할거냐 등의 일로 연락은 하고 있어요.

무대 폭이 40미터 정도로 대형 극장이고 입장료가 55달러에서 150달러 정도 되던데, 러시아 사람들이 좀 느려서 그런지 아직 공연의 세부 소개는 없더군요.
근데 포스터 시안도 왔는데, 이렇게 포스터 만들고 싶은데 괜찮은지 확인해달라고 연락이 왔었죠.

김지영씨는 유리 그리가로비치 작품에 언제 처음 출연했어요?
2000년도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부터였고, 그 다음에 <백조의호수> <스파르타쿠스> <로미오와 줄리엣> <레이몬다> 등에 출연했죠.

나 자신도 여러 작품을 보았고,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국내에 와서 직접 지도했지요. 유리 그리가로비치 선생께 안무작을 직접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어요?
아, 유리 선생님은 진짜 천재세요. 그리고 기억력이 엄청나세요. 제가 지금 십몇 년 넘게 뵙고 있는데 다 기억 하세요. 요만한 거 하나까지. 게다가 큰 그림을 보실 줄 아시는 것 같아요. 당연하시죠. 그렇게 큰 발레를 만드시니까.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이고... 제가 어찌 감히 평가를 하겠어요.

유리 그리가로비치의 강점을 소개하면 어떻게 정리될까요.
쿨 하세요. 쪼잔하지도 않으시고요. 멋지신 거 같아요, 굉장히... 되면 되고 아니면 아니고 분명하십니다. 비열하지 않으시고요.

결단력이 강하시다는 거군요.
네.

그분이 지영씨에 대해 좋은 무용수라고 평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네요. <레이몬다> 무대 리허설 할 때, 저를 붙잡으시더니 그러시더군요. 근데 전 뭐 다른 미사여구 붙이는 것보다는 그게 정말 좋은 칭찬인 거 같았습니다. 그냥 걸어가고 있는 저를 붙잡고 그렇게 얘기하신 걸 보면…

어찌 보면 그게 유리 그리가로비치로서는 극찬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까지 지영씨의 발레 인생을 살아오면서 유리 그리가로비치 안무작에 출연하고 그런 찬사를 받은 것은 큰 비중을 차지하겠죠. 아무튼 이번 공연 잘 하길 바랍니다. 크렘린 국제 발레 페스티벌 초청 출연은 아마 한국 최초일 테지요? 혹시 이 발레 페스티벌을 이전에 구경한 적은 없나요?
네, 아직은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볼쇼이 극장에 2010년 <로미오와 줄리엣>, 2012년 <스파르타쿠스>로 그곳 군무진들과 같이 두 번 섰었습니다. 현지에서 한국 발레에 대해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는 덕을 본 셈이지요.



그때 경험도 이번에 초청하는데 많은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인터뷰 방향을 좀 틀어서 김지영씨가 지금까지 지내온 발레인생을 좀 들어 봅시다. 바가노바학교 졸업했잖아요. 그전에는 어디 다녔어요?
예원 다니다 3학년 중간에 갔어요. 바가노바에 가는 게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요.

그렇게 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코발료바 선생님이 90년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일주일간 연수를 오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러시아 발레를 접한 거예요. 사실 그 전까지 우리나라에 러시아 발레가 잘 알려지지 않았죠. 미국이나 영국의 비디오만 접할 때라. 그래서 그때 처음 러시아 발레를 접한 거예요. 그때 전 완전 반했어요. 그 뒤로 한 1년 뒤에 러시아 발레 비디오로 보게 됐죠. 88년도에 볼쇼이발레단이 왔기 때문에 우리가 볼쇼이를 더 많이 알고 있었고 키로프발레단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어요. 근데 91년도에 처음으로 그 선생님한테 비디오를 받았죠.

91년도에요?
네. 그 후에 일 년 뒤에 또 오셨거든요. 키로프발레단의 <해적> 비디오를 처음 보게 된 겁니다. 완전 그때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러시아 발레를 너무 알고 싶은 거예요. 전 러시아 테크닉의 상체 움직임이 영국이나 미국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거든요. 훨씬 더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고 우아함이 제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저 학교에 꼭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바가노바에 대한 꿈을 가졌죠. 제가 진수인 선생님한테 배웠는데요, 어렸을 때 유학을 가야 한다고 많이 쇄뇌당한 건 있었어요. 바가노바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그 비디오를 보고 어린 나이에 결심을 했죠.

그럼 코발료바 선생을 만난 것은 그 이전이지요?
예원 들어가기 바로 전에 초등 6학년 졸업 시기였어요. 90년 1월 코발료바 선생이 국내에 와서 워크숍을 장충동 국립극장에 있는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했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인생의 전기(轉機)가 시작되었군요.
네. 그때 저랑 제 친구가 제일 어렸어요. 다들 대학생 언니들, 발레단 단원들이 워크숍을 했는데 그때 진선생님께서 국립발레단 지도 위원이셨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저희보고 들으라고 권하신 거죠. 물론 나이 제한은 없었어요. 저희가 들어가서 했는데 귀여우니까 잘 봐주신거죠.

그럼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2학년 때도 계속 코발료바 선생이 국내에 와서 워크숍을 받았나요?
제가 진선생님께 정말 감사한 게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해외 연수나 워크숍에 꼭 참가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90년도 여름에는 미국에 한달 간 연수를 갔어요. 미국 뉴욕에 가서 그 당시에 진수방 선생님께도 배웠었고요. 도쿠도프스키 선생님이라고 모르시겠지만 발레계에 유명한 선생님께도 한 달간 배웠고, 또 91년 겨울 1월 다시 코발료바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워크숍 했고. 또 여름에는 우리 학원 학생들이 다 러시아에 연수를 갔었어요.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그 때 학교는 방학이니까 보리스 에이프만 연습실을 빌려서 바가노바 선생님들 몇 분 초청해서 연수하고, 또 91년 겨울에 바가노바 연수에 갔어요. 예원 3학년 여름 방학 때 바가노바로 혼자 가서 오디션을 거쳐 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어요.

그때 바가노바에 진학한 한국 사람으로는 누가 있었나요?
저보더 먼저 유지현 언니랑 이윤경 언니가 1년 전에 가셨어요. 91년도에. 지금 윤경 언니는 이소라로 개명하고, 리옹에 있습니다.

바가노바에서 92년 9월부터 몇 년간 재학했었죠?
4년이요. 96년 8월까지 재학했습니다.

바가노바 학교 재학생은 몇 명입니까?
한 학년에 40~50명 정도고 그렇게 8학년이 있죠. 10살부터 18살까지요. 근데 그게 지금은 9학년으로 바뀌었대요. 19살까지 한다고 하더라고요. 바가노바가 처음 생겼을 때는 9학년까지 있었데요, 그러다가 중간에 8학년으로 바뀌었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9학년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때 재학 때 출연도 합니까, 아니면 전적으로 학습만 하는 건가요?
공연은 일 년에 한 두 번씩 학내 발표회를 하죠.

학내 발표회 수준이 궁금한데, 일반 공연단에 비추어서 품질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프로발레단이랑 비교해보면, 당연히 차이가 없지 않죠. 그래도 바가노바의 장점이라는 것은, 일 년에 크게 하는 것은 졸업 공연이랑 1주일 넘게 하는 <호두까기 인형>이에요 그거는 마린스키 극장에서해요. 다른 거는 에르미따쥬 극장 이런 조그만 극장에서 하는데 일 년에 두 번 졸업공연은 졸업생들이 하는 거니까 크게 하는 거고, <호두까기 인형>도 지금 마린스키에서 하는 세트나 그런 걸 그대로 사용을 해요. 그러니까 발레단이랑 똑같이 하는데 다만 무용수들이 학생들이라는 것뿐이지요.

그럼 1년에 한 두 번은 학내 발표회에 꼬박꼬박 출연하고요.
네. 그리고 중간에 작은 공연들이 있고요. 학년별로 하기도 하고요.

그럼 학년 정원이 40~50명이니까 대작 캐스트도 충분하겠네요? 연령이 좀 어리다는 차이는 있을 테고요.
그럼요. 대작은 충분히 하죠. 그래도 7~8학년 같은 경우는 발레단 들어가기 직전의 무용수니까 준비된 무용수죠. 다만 프로 무용수와의 다른 스타일이라는 것뿐이지 테크닉적으론 큰 차이가 없죠.

혹시 학교 재학 중일 때 춤과 연관해서 내가 앞으로 어떤 춤을 해야 하겠다든지 자기한테 깊은 인상이랄까 하는 그런 계기가 있었나요?
지금 제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안타깝게 여기는 점은 학생들이 너무 바쁘니까 공연을 많이 못 보는 겁니다. 바가노바에서 저희는 솔직히 밤에 시간 나면 무조건 공연을 봤거든요. 그리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라든지 디지털 기기로 보니까 테크닉적으론 많이 보고 그러는데 약간 차이는 있죠. 저희는 학생증만 있으면 가서 무료로 봤어요. 물론 입석이었지만요.

좋은 제도입니다.
네. 입석으로 살짝 가서 보는 거죠. 좋은 자리에 몰래 앉기도 하고 원래 꼭대기로 가서 봐야 하는데. 입장은 가능한 거죠. 그런 거 있잖아요, 오늘은 누가 한데 하면서 꼭 주역뿐만 아니라 저희는 솔리스트에도 관심이 많은 거예요. 예를 들어 <백조의 호수>에서 보통 주역에만 관심을 쏟잖아요. 근데 거기 오늘 파 드 트루아는 누가한대, 또 다 자기 선배들이잖아요. 오늘 선배가 어느 역할에 솔리스트로 나온대, 그러면 다 같이 우르르 가서 보고. 그런 공연들을 많이 보니까. 물론 선생님들한테 배우는 것도 많지만 그렇게 자기 선배들, 프로 무용수들을 보면서 머릿속에 각인이 많이 되요. 예를 들면 제가 <라 바야데르>를 한다면 원래 선생님들한테 배운 것도 있지만 제가 좋아했던 무용수의 이미지가 제 머리 속에 많이 남아서 그걸 많이 따라 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또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은 다 키로프에서 다 내로라하던 명수들인데 저희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제가 배울 때 일흔이 넘으셨는데 앉아서 가르쳐주셨어요. 그런데 손짓 하나 하는 것만 봐도 발레리나가 갖춰야 할 뉘앙스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인간문화재가 전수하잖아요. 발레도 똑같은 것 같아요. 제가 배웠던 선생님 밑에 있던 유명한 제자가 있잖아요. 그러면 약간 스타일이 비슷한 것은 대를 이어 전수됩니다. 그런 거 보면서 아 정말 인간문화재가 이렇게 전수가 되는구나라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무용수를 보면 아 저 무용수는 누구 제자이겠구나 짐작하죠. 꼭 러시아 발레가 아니라도 다른 나라에도 그 나라 스타일이 있잖아요.

잠시 여담입니다만, 바가노바 재학 때 러시아에서 무엇을 맛있게 먹었어요.
깜포트라고 잼 같은 것을 물에 타는 거예요. 흑자두 같은 걸 시럽이랑 같이 넣어서 물을 타고 주스처럼 마시는 거예요. 그게 정말 맛있었어요. 그거랑 흘리에프라 하는 흑빵! 제가 처음에 갔을 때는 흑빵이랑 치즈 되게 싫어했는데 한 번 입맛 들이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게 많이 생각나요. 우리나라에는 흑빵이 많이 없잖아요.

그럼 흑빵 하고 치즈하고 깜포트하고 먹으면 맛있겠네요.
네. 맛있어요. 그리고 그 치즈가 어릴 때는 좀 그랬는데 갈수록 김치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바가노바 학교 졸업하고 거기서 무슨 입단 제안이 있었습니까?
졸업할 때쯤에 작은 발레단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어요. 제 졸업 공연을 보시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그냥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우리 가족들이 저를 거기 혼자 남겨 두는 것도 걱정되고, 저도 그 나라에 있고 싶지 않았고. 사실 러시아가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전 그 드라마틱한 사건 때문에 귀국하게 됐죠.

그때 졸업공연에서는 뭘 했어요?
조금 잘 하는 친구들은 파드되를 시키고, 조금 밑에는 솔로하고 그러거든요. 그때 저는 <해적>의 상인 파드되를 했습니다.



그럼 졸업 공연을 전후해서 외부 섭외가 들어왔어요?
네. 졸업할 때쯤 되면 각자 단장들이 와서 본다든지, 졸업 시험 때는 단장들이 와서 보거든요. 저한테 직접 연락 오지 않고 선생님한테 많이 얘기를 하죠.

그 다음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해서 한 5년 활동하게 되었지요?
96년 여름에 졸업했고, 97년 1월에 입단했죠. 그 전에 12월에 객원으로 뛰긴 했는데 입단은 97년 1월에 한 거죠.

그럼 그 때 상대역으로는 누가 있었나요?
김용걸, 이원국, 최세영, 신무섭 선배 단원들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 시절에 계속 승급되었죠?
네, 너무 감사하게 단장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제일 어렸거든요. 최연소 입단이라 그러고, 다 쟁쟁하신 언니들이었죠. 근데 해설이 있는 발레 시리즈 첫 행사에서 김용걸 선배 단원과 <파키타>를 추었어요. 그게 1회 해설이 있는 발레였어요. 그때 제가 못하지는 않았나 봐요. 그래서 믿어주시고서 또 전막을 저한테 맡기신 거예요.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의 <노트르담의 곱추>에 트리플 캐스팅이 돼서 강수진 지금 단장님, 최경은 언니, 그리고 제가 주역으로 캐스팅됐었죠.

수석까지 승급됐었지요?
네. 그런데 2000년도 전까지는 저희가 완전 공무원이었고 급여는 호봉제를 따랐어요. 연봉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사실 발레단 무용수의 직급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97년부터 쭉 주역을 했고 군무도 같이 하긴 했지만 봉급은 아마 제일 낮았을 걸요. 출연 수당도 따로 나오는데 출연 수당이 주역을 하든, 군무를 하든, 잠깐 나오든 다 똑같이 5만원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주역을 하면 출연 횟수는 더 적잖아요. 주역은 하루 하고 하루 쉬고 그러니까. 그래서 오히려 출연 수당은 더 낮았지요.

96년부터 최태지 단장이 선임되면서 초창기에 쭉 같이 함께했고, 2000년에 국립발레단은 재단법인화되면서 예술의전당 내로 옮겼지요.
그 때 재단법인 되면서 제 봉급이 올랐어요. 그 때 제대로 체계가 잡혀갔죠. 재단법인이라 일단 분위기가 다르고, 그리고 연습실 하나가 더 많아졌거든요. 물론 장충동 시절에 비해 연습 공간은 훨씬 작아요.

장충동 시절에는 국립무용단과 함께 썼었잖아요?
네. 근데 매일 같이 연습을 했는데 이제는 분리가 되어있으니까 솔리스트, 군무 따로 연습할 수가 있었고요.

다시 묻는 건데 그럼 장충동 시절에는 호봉 시스템이었는데 재단법인화 이후 연봉 체제로 바뀐 거지요?
네. 그렇지요. 그래서 저희가 장충동에서 서초동 올 때 장충동에서 퇴직금을 받았어요.

그럼 장충동 시절과 서초동 시절을 비교해볼 때 차이가 어느 정도이던가요?
매달 두 배 정도 차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장충동 시절에는 대졸이 아니어서 거의 제로에서 시작했을 겁니다. 그래서 차이가 많이 났죠.

그럼 그런 점에서는 재단법인이 된 게 강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서초동으로 옮겼을 때도 수당은 계속 5만원이었다가 나중에 바뀌었어요. 전막하면 저희는 수당을 80만원 받아요. 그리고 굉장히 세분화됐어요.

이처럼 기여도에 따라 인정받는 경영 시스템을 어떻게 봅니까.
그게 공평한 것 같아요.

국립발레단에 있다가 네덜란드로 갔잖아요. 그 계기가 무엇이었어요?
그때 제가 발레단 생활하면서 해외 콩쿨 나가고, 해외 안무가도 만나고 그러면서 유럽 발레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왜냐하면 러시아 발레만 공부했었는데, 서유럽 발레에도 눈을 뜨게 되고. 아무래도 모던 발레에 눈을 뜬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모던 발레에 언제 눈을 떴어요?
음... 일단 해외 콩쿨 나가면 컨템퍼러리를 꼭 하잖아요. 근데 기가 막힌 작품들을 들고 나오는 외국인들이 많은 거예요.

그럼 해외 콩쿨에 처음 나간 게 언제에요?
1998년 국립발레단 허락을 받고 나간 미국 잭슨 콩쿨이었습니다. 거기 가보니까 외국 무용수들이 모던으로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우리 입장에선 안타깝기도 하고 너무 좋은 작품도 많고. 그래서 관심이 많이 갔었고 그러다 국립발레단에서 장 크리스토프 마이오 안무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면서 굉장히 많이 빠졌죠. 그래서 더 다양한 레퍼토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해외 발레단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마이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더블 캐스팅 됐던가요?
원래 더블이었는데 공연 막판에 그냥 원 캐스트로 갔어요. 4횐가 5회 공연을 했었는데 초연 때는 저랑 김용걸 선배가 타이틀 주역을 했습니다.

그럼 잭슨이라든지 국내에서 마이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모던에 대해 눈 뜨게 됐다는 말입니다. 해외 경연대회 경험을 좀 더 들어보지요. 그리고 김용걸 선생하고 함께 경연대회도 갔었잖아요?
김용걸 선배가 국립발레단에 있을 때는 항상 파트너로 했죠. 그 다음에 선배는 파리가고 전 네덜란드 가고. 그러기 전에 용걸 선배와는 98년도에 같이 파리 콩쿨 갔었죠.

그때 이야기를 좀 들어봅시다.
파리 콩쿨 말이지요? 97년에 용걸 선배는 모스크바에서 상 타고, 저는 98년 잭슨에서 솔로로 상을 타고, 둘 다 아마 동상인가 탔을 거예요. 근데 용걸 선배가 98년에 같이 나가자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좋았던 게 컨템퍼러리는 안 하고 클래식만 하면 됐어요. 그때는 바리공주 연습할 때였어요. 발레단에서는 신작을 하고 있어서, 참 힘들은 스케줄로 갔어요.

그때가 1998년 가을이죠?
네, 가을이었어요. 10월인가 그때쯤인데 바리 작품 연습하랴, 홀도 안 비고 그래서 새벽 7시에 나와 연습하고 그랬었어요. 아무튼 힘들게 갔어요. 그리고 입상만 해도 아니 파이널까지만 가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는 심사위원도 없었고. 그때 파리 콩쿨 참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을 겁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그냥 맨땅에 헤딩이죠. 정말 저는 1등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1등을 하였는데, 신문에 났었어요. 잭슨에서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지요? 레퍼토리는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한국에선 센세이션했죠. 처음 나가서 한국인 최초로 받았으니까요. <돈키호테> <차이코프스키 파드되> <잠자는숲속의미녀> 등 4가지 레퍼토리로 했어요.

1등 위에 그랑프리가 있어요?
네. 그랑프리는 모든 카테고리에서 뽑는 거였고요. 저희는 듀엣 시니어 부문에서 1등 하였지요.

대략 그때부터 우리 발레 무용수들이 해외 콩쿨에 나가서 자주 입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테이프를 끊은 세대였지요. 그 비슷한 시기인 2000년도에 김주원씨하고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안성수 선생 안무작 <초현>에서 정교하게 공연한 적이 있었지요. 그 공연에서 소개할 만한 점이 있을까요?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때 안성수 선생님이 저희 둘을 지정해서 하게 됐죠. 그때는 시간이 안 되서 항상 밤에 연습했어요. 매일 6시 이후에 선생님 시간될 때 무용원 연습실에 가서 연습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안성수 선생님 같은 스탭진은 저희한테는 처음이었으니까. 굉장히 복잡해요. 그때는 그냥 시키니까 하는 그런 게 많았어요. 솔직히 나는 어디 있고 누구인가 라는 느낌으로 했어요. 근데 어떻게 보면 그게 그 선생님의 컨셉이었을 수도 있어요. 나의 감정을 넣지 않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게 선생님께서 노렸던 한 수 아니었을까. 근데 그때는 정말 몰랐어요. 지금 와서 그때 영상을 봤거든요. 좀 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주원이랑 보면서도 우리 저렇게 잘했어? 완전 잘 한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 몇 해 후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 입단하게 됩니다. 김지영씨가 그쪽에 연락을 해서 그쪽에 가고 싶다고 했는가요, 아니면 그쪽에서 연락이 왔던가요?
사실 그 당시는 팩스 시절이에요. 이메일도 없었고 비디오를 보내야 하는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발로 다 뛰어야 했고 내 CV나 비디오를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외국 발레단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얻을 수 없었어요. 외국 사람들의 말을 통해 얻을 뿐이었어요. 지금처럼 쉽게 클릭해서 나오는 시절이 아니었잖아요. 제가 아는 발레단이라고는 크고 오래 된 발레단 밖에 없었죠. ABT, 로얄 이런 단체 밖에 몰랐죠. 외국 선생님들한테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이 괜찮다는 얘기는 들었었어요. 공연도 본 적 없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전 큰 발레단 밖에 몰랐으니까요. 99년부터 2000년도에 외국에 있는 모든 발레단에 제 자료를 그냥 제가 여태까지 했던 작품들을 하이라이트만 몇 개 뽑아 비디오로 편집해서 보냈죠. 근데 대부분 잘 안 됐어요.

돌아가는 테이프 형 VHS 비디오 말이지요?
그렇죠. 그걸로 쫙 보냈어요. 당시 한국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보낸 사람이 해외에서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 저 말고도 콩쿨에서 상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나는 너무 우물 안 개구리다 보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거예요. 직접 가서 부딪쳐야 되는데. 그리고 대개 사람들이 주역이라고 하면 주역으로 바로 못 받아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애는 주역을 원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다들 노노노 하는 거죠. 하여튼 그렇게 참다가 2001년도에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우리는 보통 여름휴가가 길잖아요. 겨울휴가가 안 길고. 그러면 우리는 여름에 움직일 수가 있는데 외국 같은 경우는 시즌이나 그런 것들이 보통 8, 9월에 시작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은 오디션을 볼 때 다 1월 경에 움직여요. 그걸 알고서는 여름에 움직여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름에는 이미 자리가 꽉 차거든요.
사실 그 전에 2000년도에 캐나다 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제안을 받고 가서 오디션을 봤었거든요. 그리고 그 전에 미국의 작은 발레단에서도 제안을 받았었고. 미국 발레단은 그냥 제가 안 간 거고 캐나다는 시간이 안 맞았어요. 그때 제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야 했어서 못 갔어요. 인연이 아니었겠죠. 2002년 1월부터 내가 돌아 다녀야겠다 마음먹고 그냥 막무가내로 항공권을 끊어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갔어요. 무작정 그날 도착해서 호텔 잡고, 지금 생각하면 여자 혼자 너무 당돌했거나 용기가 있었거나 했던 거예요.

혹시 <돈키호테> 출연한 적 있어요? 오늘 듣다보니 그 끼가 있는 거 같아요.
<돈키호테> 많이 했죠. 그런 기분으로 갔었죠. 물론 그 전에 이메일을 보냈었죠.

그때 비로소 전자 메일이 되기 시작했지요?
네. 그때는 이메일이 조금씩 될 때였어요. 그래서 제가 갈 거라고 메일을 보냈죠. 근데 문제는 그 시기에 네덜란드에는 오픈 오디션이 없었어요. 다 프라이빗 오디션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는 너희 발레단에 관심이 많다면서, 잘 모르면서 연락을 한 거죠.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그 어시스턴트가 그러는 거예요. 너무 기대는 말래요. 자리가 꽉 찼대요. 그러면서 내일 올 수 없냐고 하는 거예요. 근데 전 갈수가 없잖아요. 내일이면 비행기 타고 가고 있을 텐데 그래서 전 먼 나라 한국에서 왔다고 그랬더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모레 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프라이빗 오디션을 보러 연습실을 들어갔는데 프라이빗 오디션은 거기 단원들이랑 클래스를 하는 거예요. 그때 단장이 와서 보고 결정을 하는 건대 그날 저 말고도 오디션 보러온 애들이 더러 있었어요. 한 네 다섯 명은 됐던 거 같아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는데 동작을 주는 선생님은 제가 러시아에서 공부한 줄 몰랐겠죠. 피아니스트도 러시아 사람이었고, 그 클래스 진행하는 선생님도 러시아 출신이었어요. 둘이 대화를 하는데, 어 좋은 무용수가 왔네 라고 하는데 제가 다 알아듣잖아요. 그리고 그 클래스할 때 제가 좀 잘했어요. 튀었어요. 그 뒤 단장이 한명씩 부르잖아요. 다른 애들은 내일 오라는 소리를 안하는데 저는 그 다음날 오후 비행기인데 너 내일 하루 더 올 수 있냐고 물어 보는 거예요. 어차피 오후 비행기니까 아침 클래스에 참가하겠다고 얘기를 했죠.
아무튼 그 단장이 되게 관심을 가졌어요. 그 단장 말이 사실은 자리가 꽉 찼대요. 자리가 없는데 자리 하나 더 만들겠다고 그러면서 이거는 일단 파이낸스 쪽이랑 얘기를 해봐야 하는 거라 지금 당장 컨트랙을 못 주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얘기를 들었지요. 그리고 너무 기분 좋았던 건 바로 주역은 못 주지만은 거기 발레단이 크니까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사실 제가 그때도 어린 나이였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드미 솔리스트 급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컨트랙을 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뭘 달라는 말도 안했는데 드미 솔리스트로 컨트랙을 주려고 한다는 거예요. 너무 감사했죠. 그러고 한국에 왔는데 한 1주일 뒤에 바로 전화가 왔어요. 오라고.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은 규모가 어때요? 한국 출신 단원도 있던가요?
단원이 70~80명 됩니다. 그때 한국 출신은 없었어요. 중국인도 없었고, 일본인이 한 세 명 있었어요.

거기서 봉급 받고 생활 했을 거 아니에요. 생활은 풍족했어요?
유럽 발레단은 복지가 잘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일 년 뒤부터 라이프 컨트랙이 나오고. 물론 집 렌트비나 세금을 많이 떼긴 하지만. 복지가 잘 돼 있잖아요. 봉급이 낮은 애들한테는 국가적으로 싼 아파트를 렌트해주는 법이 있는데 그걸 하기엔 제 봉급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싼 아파트를 렌트할 수가 없었어요. 오히려 경제적으론 봉급을 받아도 거의 다 나가서 전 좀 불편했던 거 같아요.

경제적으로는 조금 그랬다고 해도, 2002년부터 2009년까지 한 7년간 있었는데, 암스테르담 생활은 어땠어요?
사실 암스테르담 도시는 너무 조그맣고 저는 사랑하지 않아요. 제가 한국에서 가다보니까 유럽은 저녁 6시만 되면 죽은 도시가 되잖아요. 그게 너무 익숙하지가 않은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땐 공연 끝나고 밥 먹으러 가거나 할 수 있었는데 거기는 전혀 그런 게 안 되는 거예요. 다 집에서 해결해야 되고. 문제는 제가 자전거를 못 탔어요.

거기는 자전거 중심 아니에요?
네. 자전거를 타야지 생활이 풍요로워지는데 제가 자전거를 못타는 거예요. 사실 제가 아직까지도 자전거를 못 타요. 노력은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되게 심심하고. 그리고 문제는 가자마자 한 달 만에 부상을 당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어요. 너무 힘들었죠. 가자마자 주역으로 역할도 받고 좋은 기회가 참 많았는데...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 있어보니까 어떤 점이 좋았어요?
일단 다양한 레퍼토리에다 또 거기에는 다양한 민족 출신들이 있었어요. 그 7~80명 되는 단원 중에 네덜란드 친구들은 15명 정도였고 세계 각지의 친구들이 많았어요. 프랑스, 스페인, 독일, 루마니아 등 정말 각국의 나라 애들이 다 왔어요. 그러니까 다양한 문화를 간접 체험하는 거고, 다양한 춤 스타일을 보는 거죠.

인종 차별 관점이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봅니다만, 흑인들은 없었어요?
네. 없었어요. 근데 지금은 1명 있대요. 옛날에도 있었대요. 근데 제가 있을 때에는 약간 까무잡잡한 카리브해 출신 친구는 있었죠.

거기 단원들 연령 분포는 어떻게 되던가요?
연령은 다양해요. 왜냐하면 군무는 38살까지 보장이 되어있어요. 솔리스트 급으로 가면 본인이 더 할 수 있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18살부터 38살까지 있어요.

우선 다양한 레퍼토리가 고전에서부터 켄템포러리 발레까지 있죠. 한스 반 마넨이라든지 윌리엄 포사이드 같은 사람들의 작품도 했을 테고요. 매달 공연 몇 회 하나요? 쉬는 달도 있겠죠?
네. 포사이드 작품도 했었지요. 극장 안에 소속된 발레단으로서 자체 극장이 있다 보니까 뭐 매달 공연이 올라갔지요. 7, 8월과 1월에 모두 3개월 쉬는 대요, 매달 평균적으로 10회는 공연합니다.

김지영씨 같은 경우에는 며칠 정도 출연했어요?
전막 같은 경우에는 주역을 할 경우에는 적게 하는데 트리플 빌 할 때에는 10회를 다 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또 제가 드미 솔리스트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역을 한 게 아니어서 솔리스트 역이나 군무를 할 때에는 거의 매일 했죠.

그럼 거기서 모던 발레 내지는 컨템퍼러리 발레 출연 비율이랄까?
해마다 절반 정도씩입니다. 그게 일 년에 9개월을 하는 거잖아요. 거기서 클레식 작품은 보통 3~4 작품은 전막 발레를 하고요, 나머지는 트리플 빌로 해요.

트리플 빌에서 모던하고 컨템퍼러리 이쪽으로 많이 오겠네요. 그럼 한스 반 마넨이나 윌리엄 포사이드 안무작 말고…
사실 유럽에서 발란쉰 작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발레단 중에 하나입니다. 발란쉰 작품도 굉장히 많이 하고 또 루디 반 단치히라는 거기 상임 안무가 그리고 크리스토퍼 휠든, 지금의 폴리쉬 발레단 단장 그리고 다른 젊은 안무가들을 많이 불렀고요. 갑자기 생각은 안 나지만 많은 현대 안무가들이 있었죠.

게스트 안무가로 해외 모던이나 컨템퍼러리 발레 마스터를 많이 부를 것 아닙니까. 그들이 작품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참고가 될 듯해서 듣고 싶은데 가령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을 가져다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이 공연할 계획이면 기획은 발레단에서 알아서 하는 거고 단원들은 연습을 어떻게 하는지 그 과정을 소개해 줄 수 있어요.
그거는 어느 발레단이나 비슷한 거 같은데 새로운 작품을 하지 않는 이상 기존 작품을 사올 때는 안무가가 직접 올 때도 있고, 그 밑에 조안무가가 와서 한 달에서 한 달반 정도 같이 연습을 하고 막판에 안무가가 와서 마지막 연습을 하죠.

안무가가 제일 마지막에 와요? 한 1주일 전?
그건 사람마다 달라요. 근데 대부분 막판에 와요. 거의 큰 이름의 무용 안무가들이잖아요. 한 1주전 빠르면 2주전입니다. 보통은 1주일 전에 와요.

그러면 모던 발레나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을 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 안무가들마다 다 다른 거 같아요. 근데 안무가들의 성격이 다 느껴져요.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리고 이런 게 느껴져요. 이 사람은 무용수였구나, 아니었구나, 이 사람은 무용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아니구나가 많이 느껴져요?

무용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떤 점에서 느낄 수 있죠?
그러니까 무용수의 움직임들을 많이 존중한다는 그런 느낌? 아니면 존중을 안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요.

김용걸 선생 같은 경우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윌리엄 포사이드에게서 안무작을 직접 받아보고 굉장히 충격 받고 컨템퍼러리 발레에 대해서 새로이 눈뜨게 됐다고 합디다. 또 클래식에 전통한 발레단이지만 모던과 컨템퍼러리를 가져다가 병행하니까 단원들의 기량이랄까 그런 것도 다양하고, 작품도 풍부해지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죠. 근데 부상자들도 속출해요. 컨템퍼러리를 할 때 쓰는 근육과 클래식을 할 때 쓰는 근육이 다른데 그걸 빨리 빨리 바꿔야 되잖아요. 그만큼 자기 몸 관리에 소홀하면 안 되죠. 대신 클래식만 하게 되면 거기에 고립되어있는데 컨템퍼러리를 하면서 아 이런 느낌의 호흡이 있구나 하면서 그걸 클래식 발레에 적용하기도 하는데, 클래식 발레를 잊으면 안 되거든요. 클래식 발레를 열심히 해야지 몸을 굉장히 긴장시킬 수 있거든요. 그걸 하면서 컨템퍼러리를 하면 컨템퍼러리가 더 퀄리티 있게 나오기도 하고요.

그럼 네덜란드국립발레단 단원 생활로 다시 돌아가면, 그랑 쉬제 단계부터 시작해서 승급이 쭉 됐죠? 거기서는 승급이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던가요?
단장님이랑 지도위원 선생님들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럼 2009년까지 있게 됐는데 최종 급수가 어디까지 갔죠?
프린시펄까지 갔죠.

프린시펄이 몇 명이었어요?
11명이었던 걸로 압니다.

발레단 운영 자체가 좀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그만큼 인건비가 많이 나가는 거니까.
그만큼 공연이 많아서 주역이 그 정도는 있어야 되지요.

우리 국립발레단은 주역이 7명 선인 줄로 압니다. 아무튼 네덜란드에 7년 있었는데 그 7년이 나의 발레 인생에 있어서 중요했었겠지요? 그 7년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다양한 생각들을 배운 것 같아요. 결국 느낀 건 여기든 거기든 같은 듯합니다. 생각하기 나름인데, 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는 거기를 경험했으니까 가능할 수 있겠지요. 세상사는 건 다 똑같은데, 내가 경험하지 못 했으면 거기에 항상 꿈을 갖고, 아쉬움을 갖고 있겠죠.

그렇군요. 내가 아니까 그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지 모르면 내 판단이 맞는지 애매할 때도 있고, 어정쩡해지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제가 여기 와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거기 생활을 조금 하고 오면 여기 와서 많은 불평하고 그러겠지만 거기도 알고 여기도 알고 하니까요. 불만이 있다고 해도, 모르고 불만을 갖는 거랑 알고 불만을 갖는 거랑은 차이가 크답니다. 모르면 오히려 불만을 쉽게 표출할 수 있거든요. 근데 정말로 알면 문제의 성질을 이해하기 때문에 팍 표출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네덜란드에서 2009년에 왜 돌아왔어요?
최단장님께서 국립 단장님으로 다시 복귀하셨을 때였어요. 제가 이전에 최단장님 계실 때 국립에 있었거든요. 최단장님이 암스테르담에 공연을 보러 오셨었어요. 겸사겸사 오셔서 공연도 보시고 그 다음에 2009년에 예정된 유리 그리가로비치 <로미오와 줄리엣>에 객원으로 절 초청도 하셨고, 그러면서 한 1년 정도 지나서 저한테 제안하시더라고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냐고요. 저도 유럽에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항상 돌아갈 생각은 했었는데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몰랐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고민을 안 했었는데 단장님 말씀 듣고 고민하기 시작했죠. 또 너무 드라마틱한 게, 당시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암스테르담에서 말입니까?
네, 암스테르담 집에 도둑이 든 거예요. 심지어 제가 그 도둑을 봤고. 집 안에 있는데 그 도둑이 뛰쳐나가고. 여자애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일주일 안에 당장 짐 싸서 돌아오고 싶었어요. 그러다 그 다음 시즌부터 돌아가겠다고 말씀 드렸죠. 다행히 처음엔 네덜란드 단장이 1년만 게스트로 왔다갔다 하는, 약간 휴직 같은 그런 식으로 하고 너의 컨트랙은 갖고 있겠다고 해서 그렇게 1년 동안 왔다갔다 했지요.

프린시펄이 어느 정도 많으니까 여유 있게 귀국을 준비했겠네요.
당시에 큰 작품 두 개를 네덜란드에서 하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하고 그랬죠.

그럼 다시 한국 돌아와서 지금 느낌은 어때요? 지난 5년 동안.
좋아요. 점점 재미있어요. 한국 관객들 앞에서 춤추는 거랑 네덜란드 관객 앞에서 춤추는 거랑 다르더라고요. 받는 에너지도 다르고요.

그 다르다는 에너지를 한 마디로 하면 뭘까요?
사실 전 그런 생각을 해요. 같은 민족끼리 사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외국에 있으면 철없는 외국 정키 애들한테 놀림 많이 받잖아요. 동양인들 지나가면 니하오 그러고. 아무 이유 없이 그게 저는 너무 기분이 나쁘기 시작한 거예요. 항상 겪는 일인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얘들한테 니하오를 들어야 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너무 나빠지는 거예요. 근데 한국에 오면 아무도 나에게 니하오 하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나한테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하진 않아요. 같은 민족끼리 사는 이유도 더 짐작하게 됐고, 같은 민족끼리 같이 춤을 추는 것도 참 좋은 일이구나 생각을 해요.

쓸데없는 긴장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네, 그리고 약간 좀 더 따뜻한 거 같아요. 한국 관객 앞에서 춤추는 게. 한국 관객 분들은 나를 또 너무 잘 아니까 아 김지영 왜 저래 라고 말 할 수도 있는 거고 또 오히려 나를 더 응원해 줄 수도 있는 거고.

2007년도에 네덜란드에서 받은 알렉산드라 라디우스 상은 어떻게 수상하게 된 건가요?
네덜란드에서 알렉산드라 라디우스라는 대단한 빅 스타 발레리나가 있었는데 그 발레리나를 기리기 위해 발레단의 위원들의 투표로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한테 해마다 한 명에게 주는 상이죠. 이 분은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도에 러시아에 브누아 드 라 당스에 노미네이트 됐다면서요.
그 해 작품들 중에서 각 심사위원들이 뽑습니다. 유리 선생님이 아마 조금 더 하셨을 거예요.

그리고는 작년에 김보람씨하고 작품을 했었잖아요.
그때 한팩(한국공연예술센터)에서 먼저 연락이 왔죠. 제가 안무가를 정할 수 있어요. 근데 그 전에 용걸 선배가 김보람씨랑 공연하는 걸 봤어요. 너무 새로웠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하게 됐죠.

그 작품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거예요?
보람씨는 동작, 움직임, 움직임에 감정을 넣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워요. 눈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철저하게 무용수의 움직임으로만 표현을 해요. 15분 정도의 솔로 공연으로서 굉장히 실험적이었지요.



이제 마무리 삼아 말해보지요. 앞으로 20년 동안 하고 싶은 걸 소개할 수 있을까요?
일단은 저는 멀리 멀리 생각을 못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은 무용수로서 무대에 춤추는 게 제 꿈이었고요 현재 하고 있고, 그냥 저는 계속 건강하게 좋은 춤, 발전하는 춤, 테크닉 적으로만이 아닌 어떤 부분으로든 계속 발전하는 춤을 하고 싶어요. 제 꿈이에요. 무대를 언젠가 내려오게 되면 길이 있겠죠. 전 아직 모르겠고요. 단순하게는 제가 후배들한테 아까 말했듯이 인간문화재처럼 제가 그렇게 오래 춤추었으니까 제 춤이 또 후배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발상을 좀 더 발전시키고 구현했으면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걸 어떻게 발레적인, 발레틱한 무브먼트를 갖고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걸어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요. 앞으로 컨템포러리 발레하고 클래식 발레 이 둘을 함께 해나가고 싶은 의지는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본인이 지금 원대한 꿈을 갖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 둘의 조화랄까 그런 것에 대해 우리나라 발레의 일반적 상황을 염두해 두고 이야기해본다면 우리가 이런 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든지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든지 하는 그런 점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춤이라는 것은 클래식이라는 것도 그 당시에는 그게 컨템퍼러리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클래식을 보존해야겠지만 점차 발전시켜야 된다고 봐요. 클래식도 현 시대에 맞게 발전해야죠. 뭔가 하나만 파고 있는 것은 특히 지금 시대에는 안 맞는 것 같아요. 지금은 새로운 콜라보도 해야 하고. 춤이라는 것은 뭔가 딱딱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엔 같은 춤인데. 딱딱 나눠져 있는 것은 이 시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컨템포러리 발레의 경험이라든지 거기서 받은 바로서 소개할 만한 것들이 있는지 소개해 보시지요.
저는 컨템포러리에서 음악성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발전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정말 정박에 맞췄다면 컨템포러리를 하면서, 보람씨랑 하면서도 음악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보람씨가 음악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고요. 한스 반 마넨 작품을 하면서 아 무조건 정박에 맞추진 않는구나. 앤 투도 있고, 읏 따도 있고 그런 식으로 음악적으로 많이 배웠어요.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 움직임, 그런 것도 복합적으로 개발하면 형식이나 내용이 풍부해지겠지요?
그렇죠. 음악에 따라서 나의 움직임이라는 게 굉장히 풍부해질 수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남들을 보면서도 배우고 그걸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배우고. 아 저기서 조금만 이렇게 하면 훨씬 다양해지고 그럴 텐데 하는 눈과 귀가 생겼다고 할까요.

귀가 다듬어지면 눈도 다듬어지고, 눈이 다듬어지면 또 몸이 다듬어진다는 그런 이야기겠지요.
네, 정리가 그렇게 될 수 있겠네요. 그런 걸 배웠죠.

오늘 대담 감사합니다. 러시아에 잘 다녀오기 바랍니다.

2014. 09.
사진제공_국립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