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발레단 KNB 무브먼트
줄탁동기의 가능성을 묻다
김채현_춤비평가

국내 공공무용단마다 내세울 자체 레퍼토리가 얼마나 될지 자문하자면 답은 시원치 않다. 이런 배경에서 더욱 공공무용단에서 ‘창작력 증진’은 초미의 과제로 떠오른다. 일부 공공무용단에서 수행하는 자체 프로그램은 이런 맥락에서 적극 수행될 필요가 있다. 국립무용단의 ‘넥스트 스텝’, 부산시립무용단의 ‘안무가 양성 프로젝트’, 국립현대무용단의 ‘픽업 스테이지’는 이런 범주에 속하는 프로그램으로 올해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에 따라 단체 차원의 창작력 개발 또는 단체 외부로부터의 창작력 유입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창작력 증진이라는 포괄적 취지가 프로그램들을 관통한다.
 이들 프로그램이 올해 또는 연전에 선보였듯이 그 연조(年祚)는 퍽 얕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동안 국립무용단에서 정기적으로 열은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공공무용단의 창작력 증진 프로그램은 대개 안정된 이벤트로서 지속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주로 단장(예술감독)의 의중에 따라 부침을 겪는 창작력 증진 프로그램이 공공무용단에서 정착되어 이른바 새 피를 수혈하는 창구로서 제 역할을 진행할 만큼 제도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립발레단의 ‘KNB 무브먼트 시리즈’ 또한 발레단 자체의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로서 올해 4번째 열렸다(강동아트센터, 8. 4~5.). 국립발레단도 밝히듯이,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이 직접 안무한 작품을 선보이는 장으로서 단원들의 잠재적 안무 능력을 발굴해 차세대 안무가로 성장하도록 지원, 육성하고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 확장 및 확보라는 목적을 갖는다. 강수진 예술감독 재임 이듬해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발레단 고유의 레퍼토리를 가져야 하는 발레단의 미션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단원이 발레단의 작품을 주도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나간다’는 포부를 천명하고 있다. 올해는 8편의 단원 소품이 출품되었다.

 




 박슬기의 〈Smombie〉는 미니멀적 리듬에 동조하는 움직임의 재빠른 반복으로 소재와 주제 모두 선명하게 제시한 소품이다. 스몸비(스마트폰과 좀비를 합친 말)의 행동 양태를 여실하게 재현하는 움직임은 현실감이 역력하다. 횡대로 늘어선 네 사람이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들에서 그들의 움직임은 기계적이고 마음도 기계적인 것으로 전달된다. 동체(胴體)와 사지(四肢)를 뻗치는 움직임의 와중에서도 손바닥을 끊임없이 주시(해야)하는 네 사람의 행동은 오늘 주변에 흔한 인간들의 숙명처럼 다가온다. 뻗친 동작으로 발레의 특성을 한껏 발휘하면서 현대의 편집광(偏執狂) 같은 일상 행태와 정서를 컨템퍼러리의 양식으로 매우 강렬하게 노출한 수작(秀作)이다.
 


 


 한 사람의 연기를 마주보는 상대방이 똑같이 해내는 거울 연기를 이영철이 활용한 〈오만과 편견〉은 여성을 향해 오만과 편견이 만연한 세태를 파헤치려는 의도를 갖는다. 고전발레와 마임이 적절히 안배된 이 소품에서는 제기된 문제의식에 비해 3쌍의 남녀 관계는 엇비슷하면서도 추상적이고도 평이하게 묘사되었다. 이로 인해 오만과 편견의 현실을 환기할 만큼 인상을 남길 남녀 관계나 캐릭터가 분명치 않았다.
 




 여성을 볼거리로 내세우곤 하는 고전발레에서 모성애 일화를 접하긴 쉽지 않고 컨템퍼러리 발레 또한 모성애 일화가 희소한 그런 관행과 그다지 멀지 않다. 박나리가 안무한 〈Born: 탄생〉은 엄마와 딸의 흡사한 삶의 과정을 소재로 모성애를 부각시켜서 발레의 상식에서 비켜난다. 붉은 핏줄이나 탯줄 같은 선들을 수놓은 레오타드 차림의 두 여성 출연자 중 한 사람은 돌아누웠고 한 사람은 여린 사지의 움직임으로 떨며 누운 이에게 서서히 다가가며 누운 사람이 생명력을 전수받은 듯 일어서기까지가 〈탄생〉의 작품 도입부이다. 이후 두 사람이 거의 같은 동작으로 시종하는 듀엣은 세대가 다른 두 여자를 빼닮은 삶을 살아가는 동일 운명체로 제시하면서 〈탄생〉 작품의 전체 과정을 잉태-출산-양육-인간활동의 순간들로 펼친다. 후반부에 측면의 스탠딩 조명이 5줄의 광선을 비추는 속에서 듀엣은 사이버 세계를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촉발하지만 삶의 양상이 엄마로부터 딸에게로 유전되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변치 않는다. 유사한 움직임의 듀엣이 자칫 빠지기 마련인 지겨움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재빠른 테크닉을 현란하게 구사하는 발레의 상투적 기법을 〈탄생〉은 택하지 않는다. 다섯 손가락을 펴서 공중에 파닥이는 포즈를 여러 지점에 배치하고 〈On the Nature of Daylight〉(막스 리히터 곡)의 늘어지듯 이어지는 음향에 따라 몸의 조형미를 십분 발휘하여 다양한 움직임들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동안 〈탄생〉은 엄마와 딸 사이의 공감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




 김명규의 〈이몽룡아~~~~~~~〉는 신세대 발레로 불릴 법하다. 판소리 〈춘향가〉의 ‘춘향이 그네 뛰는 대목’을 단서로 이 공연은 여섯 몽룡과 춘향의 만남, 몽룡의 주경야독과 오매불망, 춘향이 보러 가는 길의 순서로 전개된다. 몽룡을 6명으로 늘인 데서는, 쉬이 짐작되듯, 이번 공연을 일종의 아이돌 그룹의 판으로 펼쳐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춘향가〉 가운데 줄거리를 건너 뛰어 이몽룡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주경야독 부분 이외에서) 흥겹게 연출해가는 가운데 〈이몽룡아〉는 국악가요 〈이몽룡아〉의 분위기와 매우 가까운 흥취를 유지한다. 발레보다는 아크로배틱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움직임들 사이 사이에 힙합과 복근의 야성미와 코믹한 전개가 두드러진다. 발레에서 거의 도외시되다시피 한 세계와 신세대의 감성을 되돌아보며 관객과 함께 후끈하니 호흡하는 계기로서 〈이몽룡아~~~~~~~〉는 주목작이다.


 


 이번 ‘KNB 무브먼트 시리즈’에 함께 출품된 〈포모나와 베르툼누스〉 〈피아니스트의 러브 스토리〉 〈Inside Out〉 〈시간에 닿다〉는 작품에 따라서는 작품 소개에 제시된 스토리가 부재하거나, 페미니즘 시각 측면뿐 아니라 스토리 전개에 무리가 있거나, 음악의 리듬에 종속되되 몸의 조직적 사고가 미진하거나, 듀엣의 형식에 맴도는 등 제각각의 맹점을 보였다. 출품작 8편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습작 정도에 머물러 완성도를 더 갖출 필요가 있었고, ‘KNB 무브먼트 시리즈’에 과연 올릴 만하였는지 되묻게 된다.
 ‘KNB 무브먼트 시리즈’는 어느덧 4년차를 맞아 국립발레단 나름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발돋움하는 듯한 느낌이다. 발레계와 국립무용단 모두에게 요청되는 창작력 증진 과제에 있어 ‘KNB 무브먼트 시리즈’가 향후 어떤 결실을 가져올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국립발레단만의 기획으로 창작력 증진이 가능했다면 왜 진작 하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가 쏟아질 수 있겠으나,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과제가 아니라는 점은 미리 새겨둘 만하다.
 특히 이번 습작 정도 수준의 작품들에서 안무와 테크닉의 전시가 심하게 혼동되고 있듯이 테크닉에 갇힌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최우선으로 강조되어야 할 급선무로 보인다. 안무자가 테크닉에 갇히다보니 소재에 적합한 안무는 뒷전으로 밀리며, 그리하여 안무자가 소재를 매우 초보적인 선에서 사고하고 전개하는 경향의 맹점이 뚜렷하다. 가령 남녀의 사랑이라는 스토리가 남녀 간의 테크닉 전시에 밀려나서 피상적인 듀엣으로 마감하는 습작에서 무슨 감흥을 취할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는 더욱이 작품에서의 성숙(成熟)이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재로 등장하는 캐릭터의 연령대와 상황에 걸맞은 것이 제철드는 성숙일 텐데, 그 반면의 미숙이 역력하다는 뜻이다.
 성숙은 안무적 사고력과 상상력을 위한 대전제로서 관객과의 대화-공감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다. 단적으로, 이 전제부터 충족시켜가는 슬기가 발레 분야에서는 더욱 요청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啐啄同機(줄탁동기)라는 말이 있다. ‘KNB 무브먼트 시리즈’가 멀리 내다보고 지향할 바로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줄탁동기하면 우리 발레계에 언젠가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라 군계군학(群鷄群鶴)이 군림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8. 09.
사진제공_국립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