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수호 〈무위〉
대지 품에 안긴 무위의 세계
김채현_춤비평가

무위자연(無爲自然), 오늘에 이르러 이 말을 주변에서 접할 경우는 퍽 드물다. 무위자연이 삶의 태도로 존중받는 세상이라면 굳이 무위자연 운운할 일이 있겠는가. 오히려 무위자연의 태도를 등한시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무위자연 같은 경구(警句)는 빠르게 잊혀간다. 춤 세계에서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 한 없이 밀려나는 무위자연을 국수호는 신작 〈무위〉(無爲)에서 새삼 상기시켰고, 그의 오래 들인 공력을 대변하듯 〈무위〉는 값진 노작(勞作)이었다(9. 19~2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위〉는 전체적으로 대지(大地, 땅)와 천(天, 하늘) 사이에서 사람들이 무위자연의 경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한다. 관객들이 입장할 동안, 소극장 바닥 한가운데 그려진 하얀 동그라미 둘레 바깥에 출연진들이 볍씨로 다시 테두리를 엮는 장면이 있다. 이 원형의 공간 안에서 〈무위〉의 춤들이 행해질 터이며 공간의 바깥 한켠에는 타악과 아쟁, 생황, 첼로, 피아노 등속의 악기가 놓였다. 그 원형의 공간은 대지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즉, 볍씨로 동그라미를 에워싸는 행동은 자신들 삶의 터전을 무대에다 원만하게 마련해두는 정지 작업을 상징한다.
 모두 아홉 장으로 설정된 〈무위〉에서 사람들은 대지에서 기(氣)와 정(精)의 생명을 이어 받고 하늘을 경배하며 무위자연의 삶을 그려 보인다. 〈무위〉의 전개 구도는 먼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본체, 그리고 연속되는 탄생과 생산의 섭리, 두 가지로 정리되듯 단출하다.


 


 어미와도 같은 여인을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느슨한 춤짓을 계속하며 둥근 대지 속으로 입장하는 무리들의 맵시는 매우 고우며 반주 소리는 무척 청아하다. 원형의 공간 둘레에 정좌한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경배의 마음을 표하고선 어미(장혜림 출연)의 조신한 춤과 경건함 속에서 다양한 약동이 샘솟는 집단무를 느리되 기운차게 이어간다. 그들에게 화답하듯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 남자(조재혁 출연)의 춤 또한 기운차되 강골(强骨)의 결기가 완연하다. 하늘의 기운에 반응하는 땅의 사람들은 기다란 수건을 전신에 휘감거나 허공에 뿌리며 역시 약동의 움직임들을 연출한다. 그들은 점차 정돈된 어울림을 이루면서 원무 대형을 완성해나간다.
 하늘과 땅의 조화가 뚜렷이 감지되는 느낌 속에서 땅의 어미는 하늘의 남자와 대무(對舞) 위주의 정결한 춤을 오래도록 살갑게 이어가는데, 대무 끝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주위에서 흙의 신이 일종의 점지 의식을 주재한다. 잉태와 탄생을 기원하는 이 의식은 안무자 국수호의 몸짓으로 진행되며 사뭇 숙연한 분위기를 전한다. 흙의 신이 바닥의 볍씨를 한 움큼 주워 흩뿌린 후 출산의 정경과 새 생명들의 탄생이 이어지고, 어린 생명들은 집단무로써 하늘과 땅의 섭리를 예시하고 볍씨를 뿌려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탄생과 소멸은 순환을 지속할 것이며 삶의 희로애락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무위〉에서 대자연의 순리는 아름다운 형상들로 연속된다. 이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춤꾼들의 움직임은 시종일관 정제된 자태를 유지하며 크지 않은 원형의 공간 속에서 춤 도형들은 다채로움을 발하였다. 맹목적이며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안주하는 경향이 지난 몇 해 한국춤 분야에서 적지 않았던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무위〉는 깊이를 갖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이 대목에서 한국춤의 살아 있는 엔사이클로피디어라 할 안무자의 안목을 실감하게 된다. 〈무위〉가 단출한 전개 구도를 취하면서도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은 것은 춤이 풍요로웠던 때문이다. 한국춤의 방대한 세계에서 추출되었을 움직임들은 번잡스런 나열과는 거리를 두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의 근간을 이루었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무위자연의 세계를 〈무위〉는 무용극적 스토리텔링이 소거된 무위자연의 내러티브로 전개하였다. 단출한 전개 구도와 스토리텔링의 소거 등 간결한 구성으로 깊이를 성취하는 데 있어 안무자의 연륜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안무자가 고희(古稀)를 맞아 올린 〈무위〉에는 그의 안목은 물론 춤 연륜이 촘촘히 스며들었다.
 본성에 다가서는 사람은 연륜을 더할수록 절제한다. 일획을 그어 세상을 창조해내듯이 〈무위〉는 간결한 구성으로 무위자연의 세계를 선뜻 그려보였다. 무위자연이 더러 회자되려면 인식의 변화를 자극할 춤 또한 필요하다. 오늘의 황망한 세태를 거슬러 무위자연을 춤계에 내놓은 안무자의 연륜과 더불어 무르익은 안목이 새삼스레 도드라져 보인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8. 10.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