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성태 〈시그널〉
‘자각’을 잃지 않은 자의 유쾌한 원시성
이지현_춤비평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넋 놓고 뒤쫓는 아이들 무리를 “자각을 잃은 집단 행위”라고 본다. 피리는 하나의 신호가 되고, 그 신호는 무의식을 건드려 피리 소리를 뒤쫓게 만든다. 〈시그널〉 (정성태 안무, 2018. 10. 13-14. 서울무용센터 곳곳)은 익히 알고 있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신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작품엔 피리나 사나이, 피리 소리나 무리가 나오진 않는다. 물론 이 우화를 증명할 현재적 상황도 재현되지는 않는다. 다만 전혀 인과적 연관성 없는 5개의 장소에서 5개의 질 다른 움직임과 오브제나 도구들이 등장해 기상천외함을 쌓아나갈 뿐이다.

 




 리플렛에 나온 신호와 관련된 작품설명은 오히려 이 작품을 하게 된 배경설명에 가깝다. 안무자에게 주요한 것은 무의식까지 털리는 신호에 딸려가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하며, 생명력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육체의 능력을 고양시켜, 좀비와 반대항에 있는 어떤 강한 활동성을 갖추는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강한 생명력이 담긴 상태는 이 문명의 반대항인 원시적 자태와 행위라는 것이 3장 쯤에선 아주 명확해진다.
 정성택, 김선혁, 정성태 3인의 남자 출연자는 인트로부터 매우 가볍고 장난스럽고 우스꽝 스러운 방송국 녹음실을 연출하는가 하면 앞으로 유쾌한 기대를 하게끔, 충분히 논리를 벗어난 루저의 모습으로 관객의 경계를 늦춘다. 상대적으로 훅 지나간 인트로와 작은 신호들 후 갑자기 2층 테라스에서 로비로 쳐들어 온 출연자들은 라이브로 녹음하여 루핑시키고 그 소리를 쌓아나가는 녹음기를 사용하여 온갖 의성어와 아카펠라, 선율을 뒤섞어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에 맞춰 로비에 있는 나무벤치를 쌓아 올리며 그 위에 올라가 서로를 밀어내거나 서로를 들어 올리며 그야말로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놀이를 한다. 관객은 스스로 알아서 비켜야 하고 무엇을 봐야할지 정해야 할 만큼 로비에 산발적으로 서있는 관객은 출연자들의 도발적인 위치 선점에 의해 작품과 공간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거나 밀려난다.
 


 


 ‘긴급신호’ 장면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나면 관객은 서서히 이들이 거의 서커스 급으로 훈련된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한치 앞 계획을 알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 사라지면 관객은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무용센터에 많이 가봤어도 옥상에 올라가본 적이 없어서 매우 낯선 계단과 마주치게 되고 그것도 센터의 옥상 왼쪽 구석으로 가야 볼 수 있게끔 그들은 이미 옆 건물 낮은 옥상에 가서 웃통을 벗으며 2미터가 넘는 굵은 폴대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도 참 낯선 경험인데 관객이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렵게 된 분리된 듯, 연결된 듯한 높이가 다른 옥상에서 가깝지 않은 거리의 다른 쪽을 쳐다보는 경험은 많은 거리예술 작품을 봤어도 흔치 않은 경험일 만큼 신선했다. 이미 그들은 원무를 추는 오랑우탄처럼 삼각 꼭지점을 유지하며 폴대를 활용해 원을 돌면서 괴성을 지르며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관객이 서있는 센터의 옥상으로 한 사람씩 넘어오게 되고 그들의 아크로바틱 수위는 점점 높아간다. 혼자 폴대에 체중을 실어서 장대높이뛰기 같은 동작을 하거나, 한 사람의 체중을 나머지 두 사람이 폴대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루기 시작하면 이제 거의 묘기의 수준에 다다라 저절로 탄성이 나오고 박수가 나오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묘기에 혼을 뺏기지 않도록 그들은 뭔가 주의를 계속 당기는 팽팽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 힘으로 그들을 따라가면 다시 또 흰색 천막이 쳐진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천막이 벗겨지며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흰색 큐브들이 원형의 대열로 무작위로 놓여있고, 가운데 2층 높이로 단이 쌓여 있으며 거기에 서너 개의 문이 달려 있는 큰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앞 장에서부터 옥상 구조물 앞까지 공간성의 증폭은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작은 박스 안, 유리벽 건너, 바로 옆에서 올려 보아야 하는, 내려 보는, 시야를 막는 건물이 없이 툭 터진 광활한 옥상에서 하늘을 향하게 되는 ‘시선과 시야의 변화’와 ‘쌓여감’이 증폭의 기술이 되었다.
 




 정성태의 화이트 큐브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이 〈시그널〉이다. 정성태는 서울문화재단의 유망예술지원 ‘닻’(2년 연속지원)에 선정되었으며 17년엔 화이트 큐브 프로젝트 1탄으로 어린왕자 이야기를 모티브로 작업하였으며 이번이 2탄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옥상 씬의 화이트 큐브이다. 낱개의 큐브도 있지만 중앙의 2층 높이의 큐브 역시 섬처럼 떠있는 화이트 큐브-가상의 공간이 된다. 거기엔 물론 드나들 수 있는 1, 2층의 문과 세워서 쇠줄로 당겨 고정해 논 폴대, 그리고 출연자가 떨어지면서 튕겨 오르고 나서야 존재를 알게 되는 큰 트렘폴린이 장치되어 있다. 작년 서울거리예술축제에서 한예종에 초빙교수로 와있던 얀 뢰뢰의 〈그래비티 0〉가 트램펄린에 떨어지고 몸을 수직으로 바로 세우며 바로 착지하는 기술을 국내관객에게 선보이고 놀라게 했던 것처럼, 이들도 수없이 떨어지고 다시 건물에 착지하고 한발 더 나아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다.
 앞장면의 원시성을 극대화해 갔던 것과는 조금은 대조적으로 큐브에서의 장면은 ‘완벽한 대답’을 위해 계속 오르고 또 오른다고 써놓은 것처럼 철학적 사유와 고뇌가 잘 어울어진 그러면서도 앞의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각해져 버린 것 같은 어색함도 남아있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떨어지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며 문을 열고 뭔가를 계속 찾으러 가는 비장한 모습이 꽤 길게 이어지면서 노을이 내려오는 가을 하늘과 바람, 그들의 속절없는 반복에 어느새 관객의 마음도 앞의 소란함을 잠재우며 점차 가라앉게 된다.
 




 정성태는 2012년부터 거리예술 퍼포머로 에어리얼 댄스 영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그가 어떤 움직임도 감당되는 몸의 능력을 자신 있게 보여주며 쌓기, 균형 잡기, 폴대, 트램펄린 기술 등이 융합된 작품을 만들어 낸 건 하루아침에 가능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국내 서커스와 거리예술에서 쉽게 도달하기 힘든 수준의 기술력과 그것을 주제의식과 동떨어지지 않게 잘 당겨낸 것은 어느 누구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놀라운 성과로 볼 수 있다. 마지막 장이 앞의 장면과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공간에 대한 연구, 시선을 고려한 관객의 새로운 시각경험 그리고 몸에서 나오는 생명력과 기술의 조화로 작품을 점차 상승시켜간 에너지와 그 에너지를 관객이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 점은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깊이 각인되었다. 서울문화재단의 유망예술지원작이 서울무용센터에서 공연한 작품 중 장소와 완벽하게 잘 어울린 걸작이 탄생되었음을 기쁘게 알린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 11.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조현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