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방담 리뷰_ 2018 서울세계무용축제 난민 프로그램
특집의 시의성과 작품성의 부조화
  • 일    시
    2018. 10. 20.(토)
  • 참석자
    김채현 서정록 김혜라 방희망

올해 시댄스는 ‘난민’을 주제로 특집을 마련하여 8편의 작품을 한 주제 아래 소개하였다. <춤웹진> 편집위원들은 올해의 난민 특집을 시의성 있는 기획으로 주목하면서 상당히 방대한 이 특집의 성격을 고려하고 리뷰의 충실도를 높이기 위하여, <춤웹진>에서 집필자 개인의 리뷰보다는 편집위원 공동의 리뷰 형태로 소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본 리뷰를 위하여 <춤웹진> 편집위원들은 방담을 진행하였으며, 본 방담 내용을 난민 특집 전반에 관한 리뷰 및 개별작에 관한 리뷰로 나누어 방담 소개 방식으로 게재한다. 방담 내용이 부분적으로 겹치거나 상충되는 감이 있더라도 각 발언의 취지를 존중하였음을 밝힌다.​ -편집자 주


- 올해 시댄스의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난민’ 특집이 들어진다. 난민 문제는 범세계적이어서 특이한 사회적 현안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현안으로서 특히 시댄스 20년 역사에서 처음 다뤄진 의의가 있다.


- 이번 난민 특집은 난민뿐만 아니라 다민족 같은 인종 억압, 차별 같은 현상을 말하는 춤들을 함께 제시했다. 어쩌면 난민의 범주를 매우 넓게 잡은 듯해서 얼마간 모호함도 없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상식이나 통념에 대해 질문을 폭넓게 던진 편이다. 이번 특집은 대체로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과 난민 자기 자신의 이야기, 두 부류로 나뉜다. 난민을 은유한 것과, 물리적으로 난민 상태인 당사자가 춤춘 〈추방〉 〈나의 배낭〉과 같은 작품으로 나뉜다.

- 넓게 보면 세계인이 난민이었지 않나 싶다. 한국인이 난민이었던 경우는 일제강점기와 6·25 때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또는 서울 중부지방에서 남한으로 피난 이동해야했던 사람이 630만명이었다. 그러니 한국도 잊지 못할 난민의 역사를 거쳤다고 봐야한다. 그런 것을 깡그리 잊고선 최근 예멘 난민들에게 그런 식의 태도를 취한 것은 부도덕하다. 문화예술에서 사회적 주제, 특히 인륜과 대의명분에 적절한 것은 주제로 등장할수록 바람직하다.

- 우리 현실과 연관해서 춤 주제를 발굴하고 해외 관심작을 소개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유튜브를 비롯 국제적 영상 채널들이 유통되는 배경에서 해외 작품에 대한 무지나 호기심이 퍽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무용가·무용단이 개별적으로도 많이 오가며 교류하고 있는 현실이다. LG아트센터나 대형 극장들도 거의 마찬가지이겠는데, 그저 해외 화제작이라 해서 해외 명품을 수입해서 단순 소개·흥행하는 식의 안일한 기획은 지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해외 명품의 국내 소개도 상당한 명분이 뒷받침되어야 할 단계에 이미 들어선 것이다. 해외 수입 작품을 거론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홍보하는 식이 되어 남 좋은 일에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예술은 사회에서 연원하고, 사회로 환원된다. 사회적으로 첨예한 현안들을 예술의 소재 또는 주제로 채택함으로 해서 그것을 관객과 함께 하려고 하면 대중성이라는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대중들이 이해해야 하되 예술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난민특집에서 대중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난파선〉이었는데 거기에 예술성이 얼마나 있었는지 짚어보면, 고려해볼 점이 많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 면에서, 사회적 현안과 주제를 예술로 잘 형상화하는 작품이 국내외에서 늘어나야 한다.

- 시댄스가 이왕 의지를 갖고 특집을 추진할 것이었으면 작품에 따라 번역에 공을 더욱 들였으면 하는 문제가 정말 아쉬운 부분이었다. 난민 출신 예술가의 자전적 작품은 내레이션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였다. 진행은 시댄스가 다른 축제들보다 잘한다고 여겨지는 편인데도 댄스시어터는 자막처리를 했으면서 솔로 작품에서는 이런 부분을 너무 쉽게 간과했다. 모처럼의 특집을 마련하고도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융복합 시대라 그런지 춤에서 대사 사용이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 사회적 반향이 일어날 수 있는 주제를 채택한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팸플릿에 콩고, 시리아를 다룬 작품에서처럼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배경 지식 소개가 부족했던 데서 아쉬움이 크다. 한 페이지만이라도 소개가 되었더라면 일반인들도 공연작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지 않을까 한다.

- 이번 작품들이 만족스러웠는지 질문한다면 물음표를 붙일 수 있겠다. 무용인들에게 자극을 주었겠는지도 회의적이다. 공연장에서 무용인들이 많지 않았다. 난민 주제라 그런 것인지, 춤 행사가 많아서인지, 이즈음 들어서 춤계 행사에 관심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시댄스에 대한 관심이 낮아서인지, 어느 하나의 원인으로 돌릴 수는 없을 테고, 주최 측도 생각하는 바가 없지 않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무용인들이 많이 왔다 하더라도 난민 특집이 무용인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었겠는지 하는 의문은 작품성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 참 재미있네’ ‘새로운 안목이 보이네’라는 수준의 자극적 포인트라도 이번 난민 특집에서 덜한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매력을 끌 핵심 포인트가 미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시댄스는 이전까지 여러 작품을 선보여 왔다. 국내 무용관련 축제가 더욱 늘어나 해외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으므로 해외작의 단순한 소개만으로는 축제의 정체성과 방향이 살아나기 어렵다. 이제야 시댄스가 난민 같은 시의적 주제의 특집을 제시했다. 사실 모든 작품이 난민 프로그램으로 분류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점을 강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주제를 잡고 나아가는 방향은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다.

- 기획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룬 것이 의미가 있지만 예술적 자극이나 미적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표현력에서는 자극이 미진하였다. 난민 특집이 아닌 다른 시댄스 프로그램, 예컨대 홍신자 웃는돌 작품이나 마를레느 프레이타스의 작품에서 예술적 자극을 짚어볼 수 있었다.



설치물에 못 미친 단순한 전개

피에트로 마룰로(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 〈난파선-멸종생물 목록〉

 



-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이하 난파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춤이냐 퍼포먼스냐라는 것이다. 이런 구분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나, 〈난파선〉은 춤으로서의 질감은 전무했다. 그렇다면 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시댄스)에 등장할만한 작품인가 하는 점에서 아쉬움이 들 법하다. 그리고 〈난파선〉의 발상은 설치미술에 기반을 둔다. 설치미술에서 말하자면 몸을 설치했고 퍼포먼스적 발상이 주도했는데, 작품의 맛 그리고 작품의 구성이 단순해서 작품의 깊이가 얕았던 것으로 보인다.

- 〈난파선〉과 마지막 공연했던 니키 리스타의 〈볼프강〉 작품을 연계해 생각해볼 수 있겠다. 두 작품이 유럽 사람들, 난민이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난민 이슈를 고민하는 것이랄지, 나신이 등장하는 등 유사한 점이 있다. 〈난파선〉은 검정색 버블백 설치물로 막연한 공포심을 표현했다면, 〈볼프강〉은 늑대 떼가 표현되는데 독일 극우단체를 울프로 표현하는 세태와 관련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즉 〈볼프강〉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극우적인 행동 또는 난민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었고, 〈난파선〉은 전체적으로 반감이든 두려움이든 아니면 그것을 수용하든 여러 가지를 흐릿하게 표현하여 보여주었다. 〈난파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가 적나라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 〈난파선〉은 언제나 검정색 버블백이 아이콘처럼 띄워진 상태에서 해외에서 이미 나신(裸身)과 착의(着衣)를 번갈아 공연되었으며 국내에서는 공연 전부터 행사 개막작으로서 나신의 공연으로 예정되어 약간의 화제를 모은 것으로 관측된다. 착의와 나신의 차이는 분명하고 특히 헐벗음으로써 난민 같은 이미지나 소재가 강조될 수 있겠는데, 이번 공연에서 굳이 나신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앉기, 서기, 피신하기, 숨기, 배회, 휩쓸리기, 도주하기’ 등의 움직임 양상에서도 나신을 특별히 결부시킬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신과 버블백, 검은색의 상징성을 더 살려낼 장치나 여지가 있었어야 하였다

- 나신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와 닿았다고 생각한다. 살아내야 하는 마지막 본연의 모습, 처절한 상황의 상징으로서 나신이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해석하는 이들, 관객과 비평가들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설치 성격이 강한데 이것 또한 춤으로 볼 수 있다. 버블백에는 난민이 들어갈 수도 있고 이방인에 대한 거대 담론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인을 바라보는 공동체라고 볼 수도 있는 등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다. 플라스틱 물체 버블백으로 본다면 환경에 휩쓸려가는 현실문제와 결부 지을 수도 있겠다. 굉장히 많은 해석과 다양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설치물이었다. 객석에 버블백을 끌어올리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또한 난민문제를 바라보는 입장만이 아니라 언제든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역시 아쉬운 점은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용수들 움직임에 비추어 충분히 춤을 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뭔가가 빠져 보였다. 그것이 춤이든 언어이든 영상이든 확실하게 보여줄 만한 것이 곁들여졌다면 창작자가 의도했던 과정이 훨씬 부각되었을 것이다. 50분 정도까지 끌고 갈 만한 질감은 아니었다.

- 이색적 메소드를 단순히 활용했다가 놓쳤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은 제목과 내용에서 그 소재가 난파선인지, 생태계 멸종인지, 난민인지를 확정하지 않고 여러 면으로 해석될 여지를 두었다. 해석을 열어두는 것의 풍부함의 이점을 간과해선 안 되지만, 〈난파선〉에 국한해서 보자면, 이래저래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작품의 정체성 면에서 애매한 점을 유발하였고 재고할 점이었다.

- 〈난파선〉은 시댄스 대표 포스터에 올라간 작품이다. 개막작이어서뿐 아니라 어떤 의미를 담아 포스터에 썼을 수 있다. 난민 특집이라는 타이틀을 제하고 봤을 때 이 작품이 과연 난민과 연관되는지 모르겠다. 난민으로 끌어들이면 그렇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인류멸망, 디스토피아에 관한 보편적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였다. 시간을 재면서 봤는데, 1시간의 러닝타임 중에서 20~25분 가까이 타블로(계속 반복 연출되는 정지화면)를 보여주었다. 시간을 이렇게밖에 쓰지 못하나 싶었다. 첫 장면은 폼페이 유적지에 나올 법한 정지 동작들을 여러 가지로 보여줬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전반부의 흐름이 전체 공연의 인상을 지배했다는 생각이 든다.

- 검정 버블백을 유용하게 움직이는 아이디어는 좋았던 것 같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내는 것을 고안해서 잘 움직여 썼다는 것 자체가 안무의 확장 개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새 버블이 다시 등장하고 마무리될 때 힘이 좀 빠진 듯하였다. 사람들이 버블을 쫓아 가만히 따라 갔는데 작품 전체가 어떤 역동적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전체적으로는 정적인 흐름이었다.



난민의 절실함에 공감할 맥락은 무엇인가

미트칼 알즈가이르 〈추방〉
 



- 〈추방〉은 시리아 난민이 프랑스에서 난민 인정을 받기 전까지의 불안감 즉 난민의 심정을 소재로 하였다. 그곳 민속춤의 전통스텝 다브케를 응용하여 작품을 전개해 나간다. 일상적 민속춤 다브케는 잔치 등에서 굉장히 많이 추어지고, 특히 남성들이 강강술래처럼 손에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손수건을 막 휘두르며 춘다. 경쾌한 춤사위와 리듬을 난민의 심정을 나타내는 작품에 활용했다.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이다. 어쨌든 ‘추방’이라는 주제 내지는 소재를 뒷받침하기에 족하였다. 민속춤의 다브케는 업바운스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운바운스로 쓰였다. 작품의 취지에 따라 업과 다운이 뒤바뀔 수 있고 이런 점은 참조할 만하다.

- 다브케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남부지역의 민속춤이다. 웨딩이나 잔치에서 많이 쓰이고 남성춤과 여성춤으로 구분된다. 리더도 있어 춤 전개에서 패턴을 바꾼다. 잔치 때 쓰이는 춤이 난민문제를 다룬 작품에 쓰여 어둡고 슬픈 분위기로 전환된 점이 아이러니하다. 아랍어 다브케는 stepping of the feet, 발구르기라는 뜻이다. 중동 집의 지붕을 지을 때 진흙을 발로 꾹꾹 밟아 벽돌처럼 만드는 것에서 이 춤의 유래를 살필 수 있다. 음악은 ‘가서 도와주자’는 의미를 갖는다. 안무가가 다브케의 유래와 음악을 작품에 차용하여 같이 도와주자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전통이 가지고 있는 깊이가 있어 새롭게 다가왔다. 군대 이미지도 있기 때문에 시리아 내전을 그린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작품에서 피난민의 묘사나 반군에 잡혀있었던 모습이 반추상적으로 그려진 느낌을 받았다.

- 처음 한 사람이 전반부를 전개하다가 뒤에 세 사람이 함께 전개해 나가는데 전반부나 후반부나 의미 변경이 있은 건 아니었다. 팸플릿에서도 언급이 있었던 흰 천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켜진 천을 풀어 자신의 몸에 두르기도 하고 머리 위에 치켜들기도 하고 천으로서 감싸기도 했다. 천이라는 것이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데 한 가지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 소도구로 사용되었다. 옷을 입고 벗는 것도 다면적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주로 상의를 벗고 하는 것은 난민에서 흔히 연상될 수 있는 헐벗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의 처지 등 난민 자기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민속춤의 춤사위로서 작품에 녹여냈다.

- 일반적 이야기인데 미국 흑인들의 노예시절 아프리카에서 가져왔던 음률이 있었고 춤도 많이 추지 않았나. 이 작품을 넓게 보면 난민뿐 아니라 노예, 소수자,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만든 춤의 역사가 추가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반부 세 사람의 몸짓이 노예 행렬 같다는 느낌도 든다. 관객이 너무 헤매지 않도록 중심을 조금씩 잡아나갔으면 좋았겠는데 좀 막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민인 것을 알겠고 상당히 불안하다는 것, 그 모습이 우리에게 와 닿은 정도였다.

- 그들의 몸짓 자체가 열심히 항변을 하고 있는 듯했다. 특히 솔로가 나온 전반부에서는 춤추기 굉장히 무거운 장화를 신고 쉴 틈 없이 노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흔히 아랍인들은 게으르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를 전복시키기라도 하는 듯) 말로 설명하기보다 우직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자기들의 처지를 얘기하고 싶다는 인상을 받았다.

- 공연 자체보다도 이후 관객과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관객들이 오지랖 넓게 던지는 질문들이 이후에 보는 난민특집 공연과 연계되기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사람들은 이미 프랑스 국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며 난민은 그들 출신 배경의 하나일 뿐이지 이들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체 춤의 색깔에서 더욱 많이 느껴졌는데 굉장히 절제되어 있었고 오브제를 하나도 동원하지 않고 건조하게 표현했던 점이 그러하다.

 



- 참고로 이들은 난민 처지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사이에 난민 인정을 받게 되었다. 비자 발급을 받아 이제는 프랑스 국민이라고 한다. 작품을 보는 입장에서는 애매하다. 난민이 춤을 추는 것은 이렇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예술가의 작품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 〈추방〉은 프랑스 안무 경연대회 당스엘라지에서 수상한 작품이라고 들었다. 프랑스인들이 좋아할 취향이지 싶다. 절제된 스텝, 아이리시 댄스처럼 발의 움직임이 많았고 시리아 난민 출신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다. 허밍과 같은 배경음악에서 노스텔지아가 표현되었다. 프랑스인들의 특성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랑스 국적자로서 전통을 해석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상을 수여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춤이라는 것이 환경조건, 관객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므로 한국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는 그런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았다. 정서적으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겠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거나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고 볼 수 없다. 스텝 자체가 시리아 민속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음악을 소거한다면 어려울지 모른다. 한국 상황에서, 난민 문제에 대해 그렇게 예민하지 않은 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갖기에는 제한적이었다.

-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였다. 당연히 프랑스 사람들은 시리아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관객과 프랑스 관객은 이해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고 본다. 현재 시리아 사태에 대해서도 프랑스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지난날 식민지였고 지금도 일정 부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시리아가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와의 대결구도에서 핵심지역이라는 그런 복잡성도 있다. 아쉬운 점으로, 팸플릿에서 시리아 내전에 따른 난민 발생의 이야기 등 맥락과 배경지식을 간략히 요약해서 제시해주었다면 보는 이가 작품을 훨씬 더 이해하고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 타인이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또 다른 타인이 그 작품을 좋아할 거라는 절대적 보장은 없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우리는 시리아와 사실상 무관하지 않은가. 프랑스 사람 입장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당스엘라지에서 상을 수여할 정도로 흥미로웠겠지만, 한국에서는 그 정도의 수용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댄스에서 해외작품을 선정할 적에 그런 점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현실감 있게 들추어진 문화 충돌 속 갈등

프로틴무용단 〈국경이야기〉

 



- 〈국경 이야기〉는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 해서 혼란스런 감이 많은 공연작이었다. 이 작품은 대체로 타민족, 타종족, 타인종의 정체성을 편견에 의해서 낙인찍지 말자는 것, 그리고 그런 풍토에 대해 경종 울리기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낙인찍는 사람은 낙인이 아니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특히 세계 인권 측면에서, 인권을 중시하는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낙인이고 사회적 금지 행동이다. 유럽은 지난 2~30년 동안 낙인찍는 풍토를 중대 사회 현안으로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 들어 급증한 난민은 유럽의 대대적인 사회적, 국가적 이슈로 제기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난민과 연관된 사회적 현상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 런던 토박이라고 할까, 거기서 일반 직장인으로서 여러 나라, 다인종, 다문화 사람들을 접촉하는 어느 청년이 타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편견이 흔들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고 결국은 자기 자신이 어떤 혼돈감에 빠져버리는 줄거리의 공연작이다. 안무자는 이탈리아 출신자로서 런던 사회를 관찰, 또는 경험한 것을 작품 속에 녹여 넣은 것 같다. 난민, 피난민, 이주민 등 타인종을 보는 런던 사람의 시선을 작품화시켰는데 이것이 상당히 현실감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작품으로 꾸려진 것 같다.

- 난민 이야기도 되지만 기본적으로 다문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원래 자신이 주인이었다는 시각에서 본 것을 작품으로 다뤘다. 공연 속에서 대만에서 온 무용가에게 마사지를 해달라는 장면이 있었는데, 영국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은 누구나 마사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이런 장면이 영국식 유머로 승화되었다고 할까, 묘한 쾌감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영국 원주민들의 스트레스를 보여주며 끝낸다. 브렉시트 저변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라는 것이 국민 투표에서 통과될 정도로 난민의 현안으로부터 영국 국민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몇 년 전 LG아트센터에서 불러왔던 DV8의 〈Can we talk about this?〉와 이 작품은 대칭을 이루는 듯하다. 우리는 전혀 그런 문제에 대해 노출이 안 되어있던 시절에 DV8의 작품을 접했는데, 저기에서는 정말 생존의 문제겠구나 싶었다. 특히 몸과 언어까지 훈련된 무용수들이 격하게 소화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다보니 더욱 강력하게 와 닿았다. 〈국경이야기〉는 몇 해 사이에 유(柔)해진 흐름을 보여준 작품이다. 공감하며 즐길 만하다는 점은 있었지만 예술적 충격 면에서는 DV8보다는 덜했다. 난민 이슈보다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다문화 문제 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국 소설이나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은 익숙할 것이다. 대본이 정교해서, 대사 하나하나가 영국인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수다 속에서 일상을 담아내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것은 영국의 문화적 토양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개인적으로 다문화라는 용어가 부적절해 보인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 어린 친구들을 두고 학교에서 불리는 별명이 ‘다문화’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그것도 아주 빈번하게, 현재 일어나는 문제다. 〈국경이야기〉에 파티를 한다고 초대하는 장면이 있다. 이웃사람들을 초대해서 의자에 둘러앉아 모자를 쓰는 것은 영국에서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보통 있는 모습이다. 안무자는 런던에 사는 사람이었을 텐데 영국에 있는 다른 지역에서 원주민과 살다가 굉장히 세계적인(cosmopolitan) 런던에 오게 되면 영국인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외국 한가운데 사는 느낌이 있다고 한다. 그런 데서 오는 충격들을 이 작품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 〈난파선〉은 춤 동작이 없었지만 춤적이었고, 〈국경이야기〉는 굉장히 많은 움직임과 춤이 있었지만 연극적 성격을 띠었다. 작품은 영국사람, 백인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면서도 결국에는 자기 정체성을 묻는다. 이방인에 대해 온화하고 관대하게 매너를 갖췄지만 막상 본인의 생존권을 위협할 때에는 굉장히 못 견뎌 하는 모습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연출되었는데 냉소적인 이런 장면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한국의 환경에서 본다면, 이번 작품을 통해 한국 이주 노동자들, 무슬림에 대한 우리들의 닫힌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극을 주었다. 안무자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사회의 편견 뿐 아니라 자신을 반추해보고 이 작품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 한국 사회는 지금도 이런 점에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다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낙인찍기, 제조업 공장에서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하대하는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볼 경우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작품이 우리 주변에서, 한국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무용인들이 와서 이 작품을 봤다면 많은 힌트를 얻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아기자기하게 라틴댄스와 중국 부채춤을 더했다. 전반적으로 현실감이 충만했다.

- 등장인물로 잉글리시라고 하는 영국 토박이가 있었고 아이리시, 아시안, 무슬림이 있었다. 처음에 아이리시에게 비하하는 농담을 많이 했었고 아시안과 무슬림에게 전이됐다. 심지어 파키스탄 사람이 검은색 가방을 들자 폭탄이라고 수근 거리면서 따돌리는 장면이 있었다. 나중에는 영국 토박이가 그나마 백인이랍시고 아이리시에게 가서 얘기하는 장면이 있던데 아주 흥미로웠다. 작품의 자체가 매우 정교하고 디테일이 잘 살아있었다.



다문화 속 힐링 커뮤니티댄스에 다가가기

윤성은/더 무브 〈부유하는 이들의 시〉
 



- 공연 중에 갤러리에서 사진전시를 하고, 또 이전에 그 사진들에서 힌트를 받아 만든 공연작인 줄로 안다. 작품은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해외 4개국 난민들의 이야기와 서로의 어울림을 지향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부유하는 이들의 시〉는 공연을 겨냥한 춤 작품이 아니라 공연 출연자의 힐링을 위한 커뮤니티댄스로 보았다. 다시 말해 난민들이 자신을 힐링하는 것으로서 관객이 봐도 안 봐도 무방하다. 공연이라고 했으니 관객 앞에서 내세우긴 하지만 이미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은 힐링을 받았을 것이다. 힐링이라는 것은 구원이랄까, 그런 효과를 갖는데 커뮤니티댄스 측면에서 이 작품을 대할 필요가 있다.

- 이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처음에 팸플릿에 드라마트루기가 작품의 방향에 대해 쓴 글은 공감할 수 있었다. 감히 어떻게 우리가 난민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드러났었고 기대가 컸다. 작품을 보면서는 연출과정에서 과욕을 부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뮤니티댄스의 그림이 그럴듯한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구성원들 간에 소통하고 그들이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 일차적으로 사진작가의 사진을 전시효과를 노리고 공연장 바깥에 전시한 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작품 안에서 그것을 굳이 썼어야 했나 싶다. 난민 특집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전적 이야기만큼 추구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당사자 이야기가 분명히 아닌데 같은 난민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시리아, 르완다 난민을 사진을 대기업이나 구호단체들이 사용하는 퍼버티 포르노 방식과 같이 무대로 가져왔다. 액면 그대로 현실만 전달하는 사진이라면 그 위에 얼룩이 떨어진 것 같은 효과라든지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런 것들은 미술적으로 가미된, 연출된 사진이었고 그것까지는 사진작가의 권한이고 자기의 욕심이며 예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무대 위에 가져와 병풍처럼 둘러놨지 필수불가결한 장치로는 쓰지 않았다.

 



- 중간중간 응원을 갖게 되는 대사가 있었다. 물론 손을 대지 않고 올렸기 때문에 나온 얘기겠지만 말이다. 드라마트루기는 어쨌든 이들이 힘든 과정을 겪어온 것을 복기하는 것보다는 현재 적응하고 있는 모습, 앞으로의 꿈과 나아갈 방향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었다. 바람직하다 생각했다. 어떤 장면에서는 “친구들은 아직도 많이 힘들어요” 같은 대사가 있었고 돌아가고 싶다는 것인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모호한 대사들이 나왔다. 처음 기획과 달리 가면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됐던 작품이다.

- 출연자들이 힐링하는 과정이 중요한 공연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배경이 파키스탄에서 왔다고 하는데 한창 뉴스에서 나왔던 버마, 미얀마, 로힝야는 완전 반대이다. 원래 파키스탄 계통의 사람들인데 무슬림이라 불교국가에서 탄압을 받는 것이고, 이 사람들은 버마 계통의 사람들인데 불교도들이고 파키스탄에 살고 있으니 무슬림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는다. 이들이 한국에 와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작품 자체를 논하기보다 이들이 우리사회에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마찬가지로 저도 작품 내 사진 쓰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대가 너무 좁아 동선이 꼬이는 것도 보여 안타까웠다. 전달방식이 썩 내키지 않지만 이들이 행사를 통해 부각된다면, 그래서 이들을 알아보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난민을 주제로 한 예술행사에서 이런 공연행위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애당초 목표로 했던 것을 달성했는가의 측면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눈에 띈다. 사진 활용도가 퍽 떨어졌으며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정리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참여하는 사람 각자 자유이기 때문에 안무자의 의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안무자라는 사람은 조정 역이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내보여주고 싶은 것, 희망하는 것을 종합하여 걸러내고 다듬는 역할인 것이다. 난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퍼포먼스로서 한국사회에서 대두하는 사회적 이슈를 마침 이런 제전에서 선보임으로써 일상적인 커뮤니티에서 제기되는 현안들을 계속 발굴하는 것을 촉진할 효과가 기대된다. 난민 문제를 방관할 게 아니라 사회적 과제로 계속 문제 제기해야 할 것이고, 무용가는 작품으로서 동참해야 한다.



낙후한 구성에다 주제 의식도 모호해

최은희 & 헤수스 이달고 〈망명〉
 



- 최은희와 헤수스 이달고의 공동안무 작품이다. ‘윤이상과 피에르 불레즈’를 내세웠는데 우선 피에르 불레즈를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가. 베이스 클라리넷 음악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부분 아니라면 피에르 불레즈를 짐작하거나 환기할 수 있는 점이 상당히 막연한 듯하다.

- 윤이상과 피에르 불레즈의 곡이라고 써놨지만 무슨 작품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팸플릿에서 피에르 불레즈는 ‘자발적으로 주류를 떠났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류 중의 주류라 할 수 있다. 다만 피에르 불레즈의 경우는 프랑스 주류 음악계에 등을 돌리고 독일과 미국을 떠돌다 나중에 주류 음악가로 편입되었다. 이런 음악가들을 끌어왔다는 것이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그들을 난민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윤이상과 피에르 불레즈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등등의 의문이 들었다.

- 〈망명〉에서 윤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가운데 앉아있는 여성의 손이 묶인 것, 나중에 법고를 치던 최은희씨의 손이 묶인 것, 그 다음에 여성이 검정테이프로 입을 엑스 표시 당하고 가슴팍에 테이프로 길게 선이 그어진 것이 있겠다. 음악은 어떤 부분인지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쓰인 음악에서 윤이상의 스타일을 감지하기도 어려웠다.

- 표현 방식이 구태의연하고 진부해서 2~30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뻔히 보이는 2인무, 3인무 고루한 방식으로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메시지를 전해야 하니 테이핑을 했는지 몰라도 어색한 지점이었다. 작품이 그렇게 구성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안무가가 작품에 꼭 출연했어야만 했는지 당위성을 감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안무자가 북을 굉장히 힘있게 쳐서 메시지를 전하고 퇴장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고, 굳이 중간 중간 등장해서 무용수들과 같이 소통하려는데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웬만하면 작품과 그 행간의 의미까지 연관성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무리 연결시켜 보아도 구성의 부분들이 잘 엮이지 않았다.

- 작품을 윤이상의 일생이라는 스토리로 따라가 보자. 처음 시작할 때 입을 막고 풀고 나간 것은 독일로 갔던 것으로 보고, 이후 국내로 돌아와 활동을 하려했지만 모두 저지당하는 것을 전체 줄거리로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너무 일차원적인 작품이다.

-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입막음시키고, 그 여성이 상의를 벗겨내고 바지까지 벗겨내는데 그런 시각에서 이 여성 존재는 중앙정보부가 아닐까. 뭔가를 억압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러다가 이 여성이 그 다음에는 억압당한 여성과 함께 움직이는 부분이 적잖이 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이런 점들이 혼란스러웠다.

-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옷을 강압적으로 벗기나, 예술적 표현을 떠나 아직도 그런 장면을 봐야 하나 불쾌감까지 느껴졌다. 반면에 그게 진지한 의도로서 받아들여질 듯하다면, 다만 문제는 그런 부분의 처리가 너무 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선 지금 시대에 일어나지 않는 과거의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당시 이만큼 억압당했다는 것을 예술적 반어법을 사용하여 보여준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지 않다.

- 그렇다면 그 사이에 춤이나 어떤 장치를 통해서 심연의 깊은 것이 표출되었다면 사실적 측면이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심이 되는 춤, 그리고 안무가가 의도했던 모든 것들이 묻히고 말았다. 무엇을 위해서 두 여성이 리프팅하고 회전하는지 모르겠다. 한 여성이 2분 동안 절규했다. 대사 내용에서 튀어나오는 단어가 아마 ‘정의’였던 듯싶고 대사 자체가 분명치 않았다. 이유가 모호한 춤들이 나열되면서 춤이 살아야 하는 부분에서 춤은 소홀히 취급되었다.



신앙적 소망이 격리되는 까닭은?

알리 모이니 〈칼날의 역설〉
 



- 〈칼날의 역설〉은 이색적으로 자유소극장 로비에서 30분간 진행되었다. 여기서 원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물리적 상태에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독무자는 궁극적으로 몸에 칼을 둘러 휘돌며 춤추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서 무엇을 희망한 것인지 묻고 싶다. 작품은 그 곁에 다가서면 위험하다는 것, 그래서 문화적 차이라든지 위협을 암시한다. 그가 읊조린 말을 찾아보니 13세기 루미라는 이란 지역 시인의 시다. 영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달님이시여, 내가 없으면 빛을 내지 마세요. / 시간이시여 내가 없으면 흘러가지 마세요. / 땅님이시여, 내가 없으면 성장하지 마세요.’ 그 무엇을 소망하는 내용이다. 공연 전부터 바닥의 철판에는 이런 내용의 한글이 아랍 글자체로 유려하게 쓰여 있었다. 이런 소망을 외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환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일종의 기도문을 읊으며 알라를 숭배하는 몸짓인데, 역설적으로는 무슬림이라고 하면 무작정 거리감부터 갖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 바닥 철판에 쓰인 글자는 독무자가 반복적으로 돌면서 그 형체가 사라진다. 원래는 무아지경의 원형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신과의 합일을 기원하는 춤(의식)이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신과의 대화가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 타인과 나로 시선을 달리 한다. 그 경계 내지는 간격을 칼이라는 직설적인 도구를 몸에 장착하여 질문하고 있다. 수피 춤은 춤이라기보다 예배를 드리는 구원의 과정이다. 우리나라 절에서도 어느 단계에 올라가기까지는 그저 수행하는 입회자인 것처럼 이들도 수피종단(?)에 입회하면 맨처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옷을 다듬고 가장 마지막에 하는 것이 춤이었다. 이 퍼포먼스에서의 주요 동작은 계속 턴을 도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시리아 사람이 했던 발동작의 유래처럼 이들도 삶이나 예배 방식을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단지 땅과 하늘 같은 합일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 합일시키지 못하는 관계 사이의 경계와 편견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는 것만 같다. 심플하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전달된 퍼포먼스였다.

- 춤으로 신과 소통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와 소통되지 않거나 거리감이 생기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파라독스, 역설이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사이의 경계, 관계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짧지만 예배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 신을 제 홀로 희구하며, 타인은 그에 범접하기 어렵다. 양립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의 희구가 절실할수록 그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출연자인 나는 신과 소통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굉장히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 경우 다른 사람들은 예배를 칼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은 신앙을 포기할 수 없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그것을 편견으로 바라본다. 팸플릿에서도 뚜렷하게 명시된 점이 없고, 알리 모이니 공연을 해외에서 여러 차례 했었던데 자료들에서도 그 명확한 소개는 없이 질문들만 던져지는 편이다.

- 칼날이 회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못 다가간다고 하는데 일차적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무용수 본인이다. 어떻게 멈춰야 상처 나지 않고 안전하게 멈추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주시했다. 굉장히 속도를 아주 천천히 줄여가면서 반경을 좁혀가며 하니까 다칠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이 멈추어지더라. 사실 회전하다 갑자기 정지하게 되면 당연히 다치게 된다. 신앙심이 강한 종교인들은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이 강해진다고 믿고 또 그 때문에 그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소통하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이미 칼날을 몸에 장착했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다가가려는 사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서 그렇게 진중한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다.



독일 극우 사회를 되묻는 반어법의 발상

니키 리스타/박슈타인하우스 프로둑치온 〈볼프강〉
 



- 공연작 〈볼프강〉의 제목은 독어로 볼프강, 영어로는 울프갱으로 발음되며 독어로는 고유명사이지만 영어로는 늑대무리를 뜻한다. 영어식의 표기를 독어식으로 차용한 점이 흥미롭다.

- 독일 극우에 대해 저항하는 예술가들이 꽤 있다. 어느 작가가 베를린에 늑대 떼를 전시한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늑대 무리가 왜 베를린에 넘어왔나’가 소재였다. 국경선을 언급하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이 거론됐는데 이곳은 유럽에서도 극우들이 득세하는 지역이다. 실제로 극우들이 데모할 때 반대쪽에서 데모하는 가장 큰 집단이 터키 이주민들이다. 그 커뮤니티도 극우를 표시할 때 늑대를 뜻하는 손짓을 한다. 〈볼프강〉 작품도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들로 극우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독일 신문 기사를 보면 이 작품이 굉장히 반향이 컸고 화제가 됐다고 한다. 작품 설명에서 늑대들의 영역방어, 사회적 질서, 상징질서를 다각도로 바라보아 그들의 삶을 탐구했다고 하는데 이런 점들이 극우를 희화화하거나 묘사하는 작품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봤다. 작품에서 ‘사실 난 애벌레야’라고 말하는데 이런 장면에서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 대사들의 상당 부분은 늑대=난민으로 대입해도 맞아떨어졌다. 대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양가적인 것을 모두 담았다고 본다. 늑대들의 생태를 정확히 관찰하고 주도면밀하게 표현한다. 클라리사 에스테르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보면 원래 늑대는 모성과 생존력이 강하고 강인한 동물임에도 역사적으로 폄훼받아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찍혔다는 점에서 여자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논지를 보였다. 앞서 늑대들의 행동을 봐서는 굉장히 생명력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해 보이고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고 약간은 동경하는 시선도 있는, 늑대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모두 들어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난민과 집시들을 향한 시선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방인이 가진 기질은 문명사회에서 이미 그런 것이 제거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 사람들 나름의 강한 생명력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고 두려운 측면이 있는 양가적 감정이다. ‘늑대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국경에 세 줄 울타리를 쳐야해’ 같은 대사에서 실제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데 이를 막을 수가 없다는 자조적 입장도 들어있고 한편으로는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인지하는 듯하다.

- 스웨덴은 난민들을 정치적, 정책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다. 그런 나라들을 꼬박꼬박 언급하면서 상대적으로 ‘독일은 늑대들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메르켈 총리가 난민 수용 정책을 폈다가 독일 사회가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작품은 난민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이상적으로 지향하면서 그렇지만 현실에서 느낀 것들을 고루고루 다 담으려고 노력했다.

- 한 여성 출연자가 자신은 포르투갈 출신이고 민주화 이야기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출연진은 모두 유럽 사람이다. 민주화 투쟁을 한 사람조차도 자기네가 울프라고 이야기하는 그 장면에서 이민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현재 유럽인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표현 방식에서 봤을 때 늑대에 대한 동경도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위험하고 피해야 할 무리라고만 생각한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강한 그런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공연 시작 전에 출연진들이 객석에 잠입해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그 중 한명이 공연 중에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은 다 거짓이라고 했다. 자신의 배경 얘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측은지심까지도 꾸며내기에 따라서 그 얘기를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보다.

- 처음에는 이들이 난민으로 되었다가, 마지막 부분이 어색하게 끝난다. 화자가 이야기를 중간에 끊어버리고 마무리되는데, 그런 부분도 커밍아웃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였다. 민주화 운동도 하고, 엄마와 아이도 있어 동정적이기도 하는 등 부분 별로는 이해되겠지만, 무리로 보면 늑대이고 이런 것들이 극우의 행태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독일은 할아버지 세대가 2차 대전을 일으켰던 세대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인의 극우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봤다. 사실 예술이 재밌는 것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 아닌가 한다.

- 다면적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에 열려져 있고 매력적이기도 하다. 반면에 관객에게 해석을 내맡겨 두는 것도 얼마간 무책임한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후반부에 애벌레라는 대사가 톡 튀어나온 것이 단서가 될 수 있겠으나, 베를린처럼 난민이 첨예한 문제가 되는 독일 도시에 안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취지를 단정하기는 다소 무리일 것 같다. 작품의 전체 구성은 웬만하다. 늑대 생태계 묘사하는 부분은 공을 들였고 극우 문제까지 터치하려 애쓴 점도 감지된다.



번역 자막 부재, 소통과 공감을 차단하다

플로랑 마우쿠 〈나의 배낭〉
 



- 이 작품에서 불편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막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가 다문화 사회로 한국이 해외로 자주 진입하고, 해외 작품도 국내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 난민 프로그램에서 대사를 쓰는 작품은 4편이었고 2편은 자막이 있었지만 나머지 2편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대사를 가장 많은 데다 대사도 불어였던 이 작품에 자막이 없었다. 이렇게 번역이 없는 공연은 권장하고 싶지 않고 지양해야 한다. 미리 관객에게 번역문의 요지 또는 전체를 배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댄스 홈페이지에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런 보조 장치가 없어서 작품을 공감하기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작품의 겉모습밖에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작품 형식이나 춤을 잘 춘다느니 못 춘다느니 소감으로 빠지기 쉽다. 전체적으로, 〈나의 배낭〉은 콩고 출신의 난민이 자신의 이야기로써 극심한 불안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잘 묘사했거나 객석에 잘 전달되었는가?

- 콩고 내전은 3차까지 있다. 표면적 이유는 종족분쟁이다. 사망자가 거의 민간인이고 대부분 기아나 약탈로 인해 2차 내전동안 540만명이 죽었다 한다. 콩고 자체가 벨기에 식민지였다. 그런 것들이 모두 녹아난 작품일 텐데 배경에 대한 안내도 없고, 언어 이해를 위한 자막도 없어 아쉽다. 헬리콥터·항공기 굉음도 나오는 등 내전에 대한 묘사가 있었는데 콩고에 대한 대략적 이해 없이 작품을 보다보니 안무가가 담아낸 것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됐을지 의문이다.

 



- 그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작품을 통해 난민의 현실에 대해 관심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모니터가 5-6대 나오고, 형광등을 썼고, 배낭 겸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마네킹인형이 있었다. 스크린 사용이 참신한 내용은 아니다. 난민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상은 사진이 나오기 전에 흑백으로 처리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주목받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뭔가를 얘기하고 싶은 것을 보이기 위해 그 전에 습득했던 춤도 추고, 미디어 설치를 통해 대비시키려 한 것 같다. 궁극적으로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깊이 있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 물론 외국어 사용을 단순히 이미지로써 처리해도 무방한 공연도 있지만, 〈나의 배낭〉같은 경우는 자전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번역이 필수적이었다. 국내로 컬렉션해오는 입장에서 그 작품의 성격을 알면서도 번역을 간과했다는 것은 중요한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2018. 11.
사진제공_시댄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