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진한 〈우먼〉ㆍ이룩 〈아홉의 잔치〉
자기 색깔에 충실한 춤 2편
김채현_춤비평가

〈우먼: 돌을 던지다〉, 성차별에 맞선 결기 


사각형의 하얀 무대 바닥을 은은한 주홍색 빛이 물들이는 속에서 한쪽에 하이힐 한 켤레와 드레스인 듯한 검정색 옷감이 가벼운 숄처럼 흩어 놓인 장면이 입장객 눈에 먼저 띈다. 무대 정면엔 공공 공간에서 흔히 마주치는 남녀 식별 사인이 흰색으로 나란히 붙어 있다. 〈우먼: 돌을 던지다〉는 표제에서 그리고 공연 시작 전부터 여성 관련 모종의 메시지가 전개될 것임을 예감케 하였다(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12. 8~9.).

 




최진한 〈우먼: 돌을 던지다〉 ⓒ김채현



  황금색 유니타이츠를 걸치고 앞뒤로 나란히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두 여자와 한 남자(최진한 역할)가 공연 첫 신을 이룬다. 마치 말없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세 사람은 드뷔시 곡 〈월광〉 서두의 느린 선율을 배경으로 조금씩 위치를 바꿀 뿐이고 길게 지속되는 이 부분에서 서로 간의 교환도 접촉도 없다. 연이어 한 여자가 누우면 한 남자가 그 위를 겹치고 그러고선 아래의 여자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그 남자 위를 그 여자가 그 위를 겹치고 아래의 남자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그 여자 위를 그 남자가... 이러기를 느긋이 반복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두 상황을 목도할 동안 관객은 남자와 여자가 동류(同類)이자 근원이 동일한 개체인 것을 은연중 상기하기 마련이다.

   이어 드레스 옆에 누운 남자가 일어나 뼈를 쥔 인공팔을 몸에 휘감거나 뼈를 감싸 안는 등 씨름하다가 뼈를 드레스와 하이힐 사이에 놓은 후 검정 드레스를 히잡처럼 머리에 걸치고 사라진다. 이 뼈는 아담의 갈비뼈를 상징할 것이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기록한 〈창세기〉와 〈요한복음〉 〈마가복음〉 여러 구절(‘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내가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었구나’ 등)을 인용해서 여자가 맑고 높게 낭송할 동안에 남자는 두 다리 사이에 끼워진 둥근 화환 모양의 커다란 깃털 장식을 애무하듯 쓰다듬는다.

 





 


   이 지점에 이르러 남녀를 분별하는 성구별의 관행에 대해 〈우먼〉은 좀 유다른 관점을 환기한다. 특히 성구별에 토대를 두는 성차별이 실상은 성구별을 빌미로 그것을 왜곡한 것이라는 점이 감지되는 것이다. 길게 이어지는 다음 장면들에서 앉은 여자의 무르팍에 남자가 엎드려 머리를 얹었다가 여자로부터 두 개의 쇠구슬을 받아 강렬한 독무의 유희를 펼치고 소시지를 받아 그 유희를 오래 지속한다. 독무를 펼치는 그 남자는 안드로진(兩性 具有) 또는 여성 성향을 강하게 풍긴다. 그러는 사이 소시지(또는 콘돔을 연상시키는) 모양에다 물을 채운 투명 비닐이 그 남자(혹은 여성)에게 돌팔매처럼 여기저기서 마구 던져진다. 표제의 ‘돌을 던지다’는 이런 형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전체적으로, 〈우먼〉은 여성 안으로 회귀하는 남성상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두 여자 가운데 한 사람(배우)은 성경 구절을 낭송하고 남자에게 쇠구슬을 전하며 남자(혹은 여성)의 몸부림에 동조하듯 그를 인도해가며, 다른 한 사람(조소 조각가)은 흙으로 인간 형상을 계속 빚어내다가 끝에 가서는 쓰러진 남자(돌팔매 맞고 쓰러진 인간)를 품에 안고선 물로써 몸을 씻기는 세례(洗禮)를 행한다. 춤에서는 유례가 없다시피 하게 ‘젠더 경계를 넘나들어서’ 매우 인상적인 그 남자를 맞아들이는 두 여자는 마치 대모신(大母神)인 감을 준다. 이처럼 〈우먼〉은 중층의 의미를 발산하는 여러 감성적 이미지들을 구사하며 여성을 표현하기를 하나의 성(性)이 아니라 남성의 연원이라 하였다.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에 순응하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매장하거나 여성에게만 돌을 던져온 유구한 세상 풍조는 〈우먼〉에서 성차별의 표본으로 비판된다. 〈우먼: 돌을 던지다〉는 이데올로기로 일상화된 성차별에 맞서 조용히 직격탄을 날리는 힘을 춤으로 구현하는 한편 미투 시대 양성 평등을 다지는 결기를 내비쳤다.




〈아홉의 잔치〉, 탈춤의 허물벗기


저마다 성격이 있어 사람은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성격을 이런 저런 유형으로 나누는 방법 또한 점괘 못잖은 호기심을 일으키곤 한다. 많은 방법들 가운데 에니어그램이라는 프로그램은 사람 성격 유형을 9가지로 분류한다. 에니어그램에서 제시되는 개혁가, 조력가, 성취자, 예술가, 사색가, 충성가, 낙천가, 지도자, 중재자 유형 가운데 각자 어디에 속할지 혹시 궁금하지 않은가. 통계적 접근으로 신뢰도를 갖추려는 이 심리 기법이 정작 신뢰할 만한지 논란이 없잖으나, 스토리텔링 산업계에선 활용도가 높다고 한다. 〈아홉의 잔치〉(12. 11~12. 연희예술극장)의 단서는 에니어그램이다.
   그러나 〈아홉의 잔치〉는 에니어그램의 성격 분류를 쫓지 않으며, 다만 성격 분류가 가능할 만큼 사람의 성향이 다양하다는 기본 사실에 토대를 둔다. 이 공연은 9개의 현대적 탈을 소도구로 동원해서 사람의 성격을 일률적으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부터 환기한다. 공연은 갤러리 형 카페의 가변 무대에서 진행되어 최근 2, 3년 사이 특히 수도권 일대에서 다변화되는 춤 공간의 어떤 자유로워지는 경향을 예시하였다.


 

 




이룩 〈아홉의 잔치〉 ⓒ김채현

 
 

    부분적으로 전통 탈을 사용하지만 〈아홉의 잔치〉에서 기본이 되는 탈은 현대적인 창작 탈이다. 데생에 종종 등장하는 얼굴 각이 진 아그리파상을 연상시키는 탈은 과장된 대형인 데다 저마다 다른 한 가지 색들로 채색되었다. 춤에서 탈을 사용할 경우 대체로 특정 인물을 재현하는 관례(또는 한계)를 〈아홉의 잔치〉는 벗어난다. 착용하면 특정 인물로 변신하는 전통 탈과는 달리 이 창작 탈들은 인간의 성격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상징(또는 확언)하는 용도로 쓰인다.
   색깔에 준해 특정의 성격이 상징되는 것은 아니되 〈아홉의 잔치〉에서 저마다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한 탈들은 결국 이런저런 인간 군상들이 모인 집단을 상징한다.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고 타인을 맹목적으로 쫓으며 탈이라는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상대를 재단하려 드는 습성을 보인다. 이로써 그들이 겪어야 하는 것은 무언의 집단적 불안감이나 두려움의 감정이며 서로 간의 어울림은 좀체 이뤄지지 않는다. 〈아홉의 잔치〉가 이 같은 감정을 진정시킬 길로서 제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다. 자신과의 대화에 침잠하는 인간의 진정성은 사자춤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고 급기야 모두가 어울리는 판이 백중놀이 또는 춤판의 뒤풀이 모양으로 질펀하게 전개된다. 


 




 

  집단무와 독무, 3인무를 두루 적용하면서 〈아홉의 잔치〉는 여러가지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의욕을 다소 완화하는 선에서 〈아홉의 잔치〉의 묘미를 더 높여줄 보완점을 찾는다면, 춤꾼들 간의 겨루기 장면에서 몸들 간의 결합 정도를 높인다든가 작품 전개에서 부분과 부분 간의 연결을 더 조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수도권의 춤 창작 동향에서, 탈춤을 응용하는 작업은 지난 10여 년 사이 퇴조해왔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동향을 보기에 따라서는 다른 진단이 가능하겠고 춤계가 소중한 자산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고 싶다. 탈과 탈판을 자기 색깔로 소화하여 지금 세태에서 인간이 소유한 성격을 들춰 보이는 〈아홉의 잔치〉는 일테면 탈춤의 허물벗기를 시도한 작업으로서 주시됨직하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19. 0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