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떠오르는 안무가전’(이인수 / 이우재 / 정석순 / 박정한)
춤에 코믹을 허하라!
김채현_춤비평가

코믹!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아닌지는 영원한 논쟁감이다. 코믹의 아주 거창한 표현에 해당하는 카니발(사육제; 謝肉祭)이 아무리 짧아도 2천년 이상 해마다 반복된 역사를 일별하면, 과연 코믹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르게 고전적으로 예컨대 역할 바꾸기는 카니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역할 바꾸기 같은 행위가 카니발에서 촉진하는 웃음이 세상천지(天地)를 진동하는 경우가 서구 르네상스 무렵까지는 관행이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카니발이 변질되면서 카니발의 웃음도 많이 상해버렸지만, 그래도 코믹한 행위는 거듭되고 있다.
 지금 같은 강퍅하며 허한 시대에 특히 코믹은 청량제 구실을 하며, 코믹한 예술이 그리워진다면 역시 이 때문일 것 같다. 춤에서 코믹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 이에 대해 답이 궁하기 마련인 것은 실제로 우리의 춤 경향에서 코믹이 저조하다는 뜻이다.
 3월 하순부터 포이동 엠극장에서 ‘떠오르는 안무가전’이 열리던 중에 공연된 4편의 소품들은 매우 우연스럽게도 코믹한 춤들이었다(3월 19~20. 엠극장). 그 모두를 코믹(한) 춤으로 분류하긴 어려울지라도, 적어도 코믹한 경향이나 정서를 담고 있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우재의 <한량의 오후>, 이인수의 <현대식 감정>, 정석순의 <포유(For You) 3.0>, 박정한의 <충청도라 그런가벼~>, 이들 네 작품에서 코믹함을 짚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코믹한 춤이 자리잡는 중이라고 섣불리 예단할 일은 아니로되, 어떤 변화가 춤계 한 자락에서 꿈틀대는 것만은 감지된다.
 <현대식 감정>은 그간 여러 번 공연된 바 있다. 이번에 다른 3작품과 함께 공연되자 그 작품에서 코믹스러움을 발견해낼 수 있어서, <현대식 감정>의 또 다른 층위를 느끼게 한다. 류진욱과 이인수는 둘이서 단짝처럼 호흡을 맞추는 춤으로 계속 주목 받아온 터여서 그 일련의 작품을 일단 짝패 춤이라 부를 만하다. 짝패의 우정을 다루는 영화를 버디 필름이라 하듯이.
 나란히 의자에 앉은 두 남자에게서 <현대식 감정>이 시작하는 순간을 옮겨보면 이런 식이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은 한 남자의 무릎팍에 상대방이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대면 그 다리가 떨리다가 손가락을 떼면 멈춘다. 이런 행위를 반복하면서 둘 사이는 마치 전력처럼 반응하는 관계로 진전한다. 작품에서 씨앗 같은 이 부분은 플로어에서 서로 몸으로 호응하는 다양한 모습들로 전개되면서 짝패 춤에서 마치 핵심이 짝들 간의 이심전심이라는 듯이 척척 조화를 맞춰간다. 그 둘이 조화를 연출하며 동원하는 수단에서 음향도 조명도 차순위로 밀려나고 움직임의 일치가 으뜸이다.
 <현대식 감정>에서 남방셔츠를 걸친 두 남성은 신원이 불투명하더라도 영락없는 20대의 그들이다. 시종일관 시무룩한 표정 또는 무표정인 상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거듭되는 몸의 조화들은 둘의 관계가 매우 오래 묵어 이젠 친숙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전력 통하듯이 자동 반응하는 일심동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들의 우정에도 갈등과 토라짐이 있고, 이것들은 두 사람 몸들의 엉켜들음, 뿌리침 등으로 표현된다. 서로 무심한듯해도 의자에 앉아서나 플로어에서나 서로를 의식해야 하는 열렬한(?) 관계는 둘 중 한 사람이 분신(alter ego)으로서, 단짝 친구로서, 다툼꾼으로서 해석될 여지를 열어놓게 된다.
 <현대식 감정>이 코믹한 것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이 전기 통하듯 재빠르게 자동 반응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몸 움직임을 즉각 반응으로 복사해내는 것은 엉뚱하면서도 나의 분신이나 단짝 친구의 그것이라면 이해 못할 바 아니며, 상대방에게 합치된 듯한 수동적 상태를 전달하는 움직임은 코믹하다. 한 짝이 없으면 한 짝이 허전해지는 그런 미묘한 관계를 코믹한 반응으로 묘사한 <현대식 감정>은 오랜 기간 몸과 마음으로 움직임을 맞춰온 짝패 춤꾼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춤이라 생각된다.

 


이우재 <한량의 오후>

 


 이우재의 <한량의 오후>는 니진스키를 배경으로 한다. <한량의 오후>에서 니진스키의 그 독특한 움직임이 재료로 쓰였다. 니진스키 <목신의 오후>의 오후가 던진 여러 파장 가운데 상반신을 정면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은 당시 관행을 돌파한 것이었고 역사 속의 기록이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이집트 벽화나 니진스키 <목신의 오후> 재현작에서나 볼 수 있을 뿐 그다지 활용되지도 않는다. 혹시 부토에서 그런 시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니진스키의 체취가 강렬해서 상반신 정면 제시 움직임은 여차하면 모방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개성이 강한 작품이나 움직임을 인용하다보면 그런 부담도 따른다.
 <한량의 오후>에서 한량은 상투 틀고 바지저고리 차림을 한 조선 한량이다. 배경의 병풍과 바닥의 화문석 자리는 그곳이 조선임을 더 보여준다. 만취(滿醉)한 그가 꿈에서, 또 깨어나 권번에서 권번 주인 딸을 만나는 것이 <한량의 오후>의 스토리텔링이다. 이우재는 힙합으로 움직임을 다듬어왔으며 연전에 <소나기>에 힙합 안무작을 제공한 바도 있다. <한량의 오후>에 등장하는 춤은 주인 딸의 날렵한 회전무 중심의 한국춤과 취중의 한량이 잠시 선보이는 힙합이며, 여기에 목신의 앞서 소개된 그런 동작들이 대폭 첨가된다.

 


이우재 <한량의 오후>

 


 <한량의 오후>는 니진스키의 계보를 의식하되 힙합과 이우재의 관점에서 응용한 작업이다. 한국춤이나 힙합이 목신의 동작들과 어우러져 <한량의 오후>에서는 일종의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 스트라빈스키의 그 곡을 배경으로 주인 딸과 펼치는 대무는 니진스키의 흔적이 역력하면서도 니진스키와는 다른 이우재 식의 활달함이 스며 있었고, 이런 점에서 그건 단순 모방이 아니라 의도적 패러디로서 의미심장하다. 목신과 요정처럼, 한량과 놀던 주인 딸이 어미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달아나는 아쉬움에는 코믹한 정서가 이미 깔려 있고 이를 패러디된 목신의 동작으로 묘사한 점 역시 코믹으로서 격조가 느껴진다. 이우재의 과감한 시도 역시 강조될 일이다.
 언어가 무기력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부각시키는 것은 <포유(For You) 3.0>가 어떤 뒤집기로써 작품을 전개하는 것과 연관된다. 작품 첫 머리 무대에 해설자가 등장하여 작품을 소개하겠다고 하지만 그의 말은 곧 효과 음향에 파묻혀버린다. 아무튼 해설자의 소개 순서가 끝나고 네 사람의 움직임이 전개되는데, 풀 화이트 조명이나 스포트라이트 속의 동작이 집단적으로 매우 급박하게 소개된다. 빠른 굴신과 빠른 너울짓 그리고 회전들이 초고속 주법의 바이올린이나 록 음향에 맞춰 펼쳐진다.
 여기서 간간이 등장하는 해설자는 멈춰 정지한 춤꾼들을 이리저리 끌어 옮기는 말하자면 자신이 소개한 작품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자로 군림한다. 작품 과정에서 춤꾼들의 온몸을 뒤흔드는 급속한 움직임들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풀이될 만하다. 작품 끝에 한 춤꾼이 그 남성 해설자를 넘어뜨리고 강제로 상의와 하의를 벗겨 엉덩이를 들추는 순간 대반전이 일어나며, 새 해설자 역시 먼저 해설자의 해설 행위를 반복하지만 역시 말은 효과 음향에 묻힌다.
 이런 일련의 엎치락뒤치락 과정들을 정석순은 상당히 면밀하며 집중성이 높게 구성하였다. 옷이 벗겨진 그 남성 해설자의 등판에 적힌 ‘For You’는 사실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단에 지나지 않으며, 새 해설자 역시 그런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포유>의 네 남성 춤꾼들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어떤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터질 듯한 움직임으로 실현하였다. 말이 오리무중에 숨어버리고 엎치락뒤치락 각자 자기대로 발버둥치는 그 모습들로써 인간사를 코믹하게 터치한 것은 정석순의 개성을 잘 나타낸다.
 향토색이 뚜렷한 춤은 이즈음 매우 드물다. 언필칭 ‘촌스럽다’는 반응부터 유발할 향토색은 대충 말해 90년대 이후 춤에서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지역의 정서나 세태를 무대화하기보다는 그런 것을 등한시하고 어딘가 한 곳으로 쏠리는 경향이 드세 보인다. 이런 경향을 춤의 획일화, 중앙집중화 등으로 부르곤 하는데, 자기 자신의 관심사와 이를 구현할 춤 양식을 중앙집중화된 그곳에서 찾으려는 세태가 깊어가고 있다. 전국이 1일생활권으로 축소되고 정서가 유사해지는 마당에 무리한 주문일진 몰라도, 향토색과 현대성 및 자기 양식을 동시에 찾아낼 곳이 중앙인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박정한의 <충청도라 그런가벼~>는 제목이 주는 어감이 촌스럽거나 정감 있거나 둘 가운데 하나이다. 연극적 전개 부분과 춤을 결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충청도라 그런가벼~>가 지닌 미덕은 자기 고장의 기질을 춤 소재로 삼았다는 데서 찾아진다. 시중에서 흔히 말해지는 충청도 기질을 단서로 사람의 양면성을 진단하는 이 작품은 미련한 사람도 미련하지만은 않다는 일종의 잠언으로 수용된다.

 


박정한 <충청도라 그런가벼~>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대사와 가수 박재홍의 뽕짝 가요 ‘충청도 길손’을 섞어 향토색을 구체적으로 갖춘 이 작품에서 연극 대사를 하는 출연자는 반(反) 충청도 사람이며 충청도 사람 박정한을 골탕 먹이기 일쑤다. 막판에 연극 대사 출연자가 자기 덫에 걸려 충청도 사람 박정한에게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리듯이 상황은 급히 역전된다. 이런 흐름들 속에서 강한 재치와 유머가 관객들을 즐겁게 하면서 충청도 기질 같은 향토정서를 음미하게 만들었다. 박정한의 활달하며 유장한 춤이 전반적으로 보아 극적 전개 속에서 간간이 끊기는 점을 비롯하여 작품의 춤성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는 한편으로 향토 기질을 코믹하게 그리고 무대에서 제대로 형상화해내는 박정한의 시선은 남다른 점이 있다.

 


박정한 <충청도라 그런가벼~>

 


 코믹한 춤은 얼마간 마음을 비워야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예술과 으레 결부되는 인간, 문명, 영원한 사랑, 진실 등등과 같은 거대 담론에 고개 숙이는 차원에서는 코믹한 춤이 나타날 확률은 낮아진다. 이 말은 예술에 대한 관념이 포용력을 가져야 코믹한 춤이 자리잡을 것이라는 뜻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웃음은 삶의 윤활제이자 균형추이며 그 공감대는 예측을 불허한다. 오락처럼 진행되는 듯싶어도 페이소스 같은 품질이 코믹한 예술(춤)을 좌우할 것이므로, 코믹한 그것들이 오락일 것이라는 편견 섞인 기우부터 버려야 한다.

2011.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