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구 · 구미 지역 3이벤트
권옥희_춤비평가

대구시립무용단 기획공연 〈spin off〉

같은 춤, 갇혀 있는 춤



자부심과 견제로 열기가 이는 무대였다. ‘대구시립무용단’(예술감독 김성용)의 기획공연 〈spin off〉(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7월 19-20일). 단원창작 무대에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부안무가(노진환과 권효원)를 초청, 총 여덟 개의 소품을 이틀에 걸쳐 올린 공연이었다. 원작에서 새롭게 파생되어 나온 작품을 뜻하는 ‘spin off 스핀 오프’, 안무가들이 가지고 있던 원작에서 파생된 작품이 아니라 그들의 춤(몸)에서 파생된 것으로 해석하면 될 듯.   

 예술감독과 무용단원, 안무자이자 무용수, 초청안무가와 무용단원들의 협력 관계라는 것은 대등한 두 힘의 긴장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경계)문을 사이에 두고 춤과 현실이 있다. 어느 편에게도 문 밖 저쪽은 자유의 공간이다. 문안에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현실에 춤의 초월이 있고 춤에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면 문은 이미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준욱 〈수평적 곡선-숨쉬는 몸 Ⅰ〉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춤춤을 보자.  

 첫날, 이준욱(시립무용단트레이너)의 〈수평적 곡선-숨쉬는 몸 Ⅰ〉, 춤추는 몸의 다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한 소품. 바로크시대 비발디 음악에 춤을 춘다. 남녀가 몸을 뒤집고 등으로 바닥을 민다. 외국무용수(단원인데, 프로그램 북에 이름이 없다)의 합세로 움직임이 우아해진다. 긴팔과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춤(몸)의 에너지가 좋다. 여자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을 가볍게 원을 돌며 뛰어다닌다. 

 세 명이 나란히 서서 느린 움직임으로 서로를 간섭하고 간섭받으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대각선으로 위치를 바꿔 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여자는 몸을 흔들고 무리에서 물러나 느리게 혼자 움직인다. 움직임에 의미를 담지 않았다. 

 의미를 담지 않은 움직임이라 해도 움직임에 대한 논리구조가 보이는 움직임이 목표여야 한다. 의미를 담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그 최초의 의도를 넘어서는 것. 움직임 그 자체로 독립된 이미지, 몸의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으로 춤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 말이다.




권효원 〈unknown〉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권효원(외부안무가)의 〈unknown〉, 물이 담긴 1,8L 패트 병을 들고 나온 무용수(김혜림). 검정색의 끈 탑에 연습복 긴바지를 입었다. 무릎과 엉덩이부분이 늘어나 있는. 물을 마신 뒤, 물병을 내려놓고 관절을 꺾어댄다. 다시 물마시고, 걸어서 이동한 뒤 방향을 바꿔 팔다리를 뻗고, 접고, 구른다. ‘언젠가는 마땅히 알려져야 할 것들’을 위한 춤이라고 안무노트에 적혀있다. 물마시고, 구르고 뻗고, 관절을 꺾는 것과 ‘알려져야 할 것들’과의 상관관계.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는지도. 열심히 춤을 추고 노력하지만 정작 춤 현장에서 물 마시는(열외) 것들에 대한 얘기라 하기엔 움직임이 상투적이다. 마시는 ‘물’과 미끄러짐의 ‘물마심’이라는 알레고리의 구조 또한 빈약하여 힘을 갖지 못한다. 대상과 대상을, 또는 관념과 관념을 얽어맬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고 해서, 설혹 그것이 그럴 듯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알게 해주는 것도, 심정적으로 더 깊게 해주지도 않는, 우연하고 비본질적이고 밀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무 짓이나 해도 안무로 예술로 포장이 되고, 객석의 박수소리에 모든 것이 묻힐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한참을 구른 뒤, 물병을 들고 서자 박수와 환호가 섞인 요란한 소음(음원). 남은 물로 입을 헹구듯 가글을 한 뒤, 남은 물을 다 마신다. 그리고 끝. 무용수(김혜림)는 적지 않은 양의 물을 다 마시고도 자신이 무엇을(물)을 왜 마신건지 인지 못하고 있는 듯. 안무가는 무용수에게 그냥 물을(만) 먹인 거다. 

 굳이 협업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김동석 〈한숨〉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김동석의 〈한숨〉​. 남자 둘(박기범, 임현준)과 여자 둘(송은수, 박서란)의 춤. 베이지 상의에 같은 계열의 짙은 색 바지를 입었다. 네 명이 바닥에 누웠다가 한 사람씩 번갈아 고개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다시 상체를 일으킨다. ‘한 번의 숨과 순간’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 생각이 10여분이 지나면서 ‘휘몰아치고 가려지다가 단 한 번의 숨을 의식’하면서부터 안무가의 춤 의도가 드러난다. 여자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무언가를 찾는 듯, 움직이자 이어 모두 위를 봤다가, 다시 아래로 다시 위, 아래로 천천히 모였다가 흩어지는 움직임.‘보아야할 것들이’ 보이는 순간을 조심스럽고 느리게 그려냈다.




신승민 〈폭풍전야〉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신승민의 〈폭풍전야〉​. 안무자(신승민)와 박정은의 춤. 엎드려 기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위로하듯 서로 안고 구르다가 떨어지면서는 서로 손을 잡아 끌어본다. 움직임이 좋다. 온 몸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부드럽게 뻗어내는 동작에서 간혹 슬픔이 읽힌다. ‘지나가는 길 위, 침정된 풍경’이라는 안무노트. 움직임과 음악의 전환 없이 같은 톤으로 끝까지 끌고 간 것이 주효했다. 무대 앞 조명 한줄기, 신승민의 가슴을 박정은이 손바닥을 모아 누른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내려는 듯. 그리고 남자위에 엎드린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조명에 둘의 움직임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 젊은이들의 춤(삶)은 지나치게 심각하고 치열하여 불행해 보인다. 성(性)의 경계가 읽히지 않을 정도의 치열한 춤과 절실한 감정이 춤의 서정과 다른 것이 아님을 박정은의 춤에서 읽는다. 좋은 춤(몸)이다. 이 춤(삶)에서 알 수 없는 다른 춤(삶)을 실천하는 일에 구구한 설명조차 늘어놓지 않는다.




노진환 〈Blubberland〉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이튿날. 노진환(외부안무가)의 〈Blubberland〉. blubber블러버-고래의 지방을 일컫는 단어. ‘허세와 거품이 지배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춤으로 그려내고자 한 작품. 열려진 검정색 문 안, 의자에 앉아 뭔가를 먹는 남자, 쇼핑백을 들고 걷는 여자, 여자를 뒤에서 안고 흔드는 남자. 뒤집어지는 소파와 함께 무대 공간으로 넘어오는 무용수들의 나른한 춤, 허세가 묻어난다. 박종수, 이광진, 김분선, 오찬명, 김인회, 도효연, 춤을 잘 추는 무용수들이다. 자신들이 움직이면 춤이 되고, 작품에 의미가 부여될 것이라 믿고 있는 듯하다. 교만이다. 무용수들이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안무가가 분명하게 춤을 요구하지 못했거나(할 수 없었거나)이다. 무대는 탈선의 공간이 되고, 여자에게 길들여지는 남자, 무대는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 된다. 춤으로 폭력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든 건 필자뿐일까.

 마지막, 무용수들이 등을 보이고 앉아 상의를 벗는다. 무용수 앞의 작은 격자무늬의 파티션은 개인의 공간(집)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이나, 궁색하다. 극장(239석) 규모에 따라 작품을 올려야한다. 상상할 수 있는 공간(사이)을 차단한 설치물과 춤, 욕심이 과했다. 춤의 블러버랜드였다. 작품(안무가)에 허세와 거품이 있는 듯.      




김홍영 〈해후〉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김홍영의 〈해후〉​, 검정색 반팔 상의에 긴바지를 입은 무용수(김홍영)가 객석 쪽에서 무대에 오른다. 앞 무대의 검정 문, 전자기타를 들고 의자 위에 앉은 연주자. ‘내면의 여러 감정’에서 오는 ‘순간의 몰입과 환기’를 춤으로 그려내고자 하였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춤으로 관객의 눈을 잡아두지도, 춤으로 자신이 다른 세계로 넘어서지도 못하였다.




김초슬 〈작은 순간〉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김초슬의 〈작은 순간〉​. 여자 세 명과 남자 한명. 새소리가 들리는 숲 속에서 ‘욕심낸 마음을 알아차리고 힘을’ 뺀 여자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몸을 아래로 접어 다리와 상체를 길게 늘인다. 바닥에 누운 남자는 다리 하나에 다른 다리를 얹고 지나는 바람소리를 듣는 중이다(고 하자). 남자가 여자 한 명과 자리를 바꿔 여자들과 같은 동작을 하고, 새소리에 묻어오는 바람(이 보인다고 하자). 무대 공간을 떠도는 공기의 흐름. 실제 느낄 수 없는 미세한, 그러나 고요한 움직임들이 공기를 건드리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을 그려내 보이려는 의도가 드러나기 전에, 툭툭 끊긴다. 여자들이 손을 마주 비빈 뒤 손바닥을 눈에 갖다 댄다. 미숙한 춤 설계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춤의 설계는 다르다.




이준욱 〈수평적 곡선-숨쉬는 몸 Ⅱ〉 ⓒ황인모/대구시립무용단




 마지막, 이준욱의 〈수평적 곡선-숨쉬는 몸 Ⅱ〉. 베이지 색 슈트 차림의 안지혜와 송경찬이 등을 맞댄 채 서 있고, 끈 상의에 바지를 입은 김정은과 김가영, 바닥에 털푸덕 엎드린 채 발만 땅에서 떠있다. 

 몸을 아래로 접었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펼치면서 추는 안지혜의 춤이 이채롭다. 미미한 움직임으로 시작되다가 곧 안에서 분망하게 소용돌이치며 파편화되는, 치열한 움직임이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각도로 상체를 뒤로 기울인 채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가, 다가 선 김가영의 머리를 자신의 머리로 툭 건드리고 냄새를 맡듯 탐색하다가 정지. 어느 순간 미세한 공간의 흐름으로 다시 툭 움직임이 시작되는 춤. 마치 끊어지는 지점까지 나아가려는 어떤 불길 같은 열정이 있는 (즉흥)춤이다. 한계에 이르는 열정은 한 개념의 절대가 되고 그 정신이 된다. 춤 이력에(46세다) 따른, 자기 검열이 있는 무용수다. 반면 송경찬의 움직임, 실망스러웠다. 

 둘이 하나가 되어 상대를 들고, 나머지는 등으로 무대바닥을 기는가 하면 움직임의 속도를 높인다. 동그랗게 공간을 만들어내는가 하더니 춤 언어에 갇힌 이들의 공포. 위로가 되지 못하는 대체들. 여자를 안은 고통의 몸, 송경찬이 김정은을 업고 무대를 돈다. 덫에 갇힌 동물의 이상행동과 같이. 쇠톱으로 쇠를 써는 듯한 소음. 깊이를 알 수없는 소리에 무용수들이 엉켜서 무대를 구른다. 남자와 부딪히자 튕기듯 뒤로 뒹군다.

 벗어놓았던 재킷을 다시 입는다. 깜깜한 무대, 오른 쪽으로 가느다랗게 비쳐드는 조명, 틈이 보인다. 


 무
용수들이 모두 같은 춤(움직임)을 추고 있다. 그것도 이미 오래되어 식상한. 열정과 다르게 실험적이고 우수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외부 안무가의 작품 또한 단원들의 작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차별성이 없다는 말이다. 외부안무가 노진환은 지난해 ‘전국무용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가다. 우수한 무용수들과의 협업이 무색한 작업이었다. 그런가하면 올해 대구무용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권효원의 빈약한 춤 사유가 그대로 드러난 무대, 매우 우려된다. 안무가의 말(춤 언어도 포함)로 무용수들을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안무가의 능력이다. 자신이 원하는 춤을 정확히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춤 철학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험적인 안무에 따른 작품은 남과 다른 사유와 차별화된 춤(움직임)에서 나온다. 움직임의 논리적 구조, 춤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을 넓히는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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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F(수성아트피아 무용축제) 기획공연 ‘전국무용제 역대수상자전’



대구 ADF가 기획공연으로 ‘전국무용제 역대수상자전’(수성아트피아, 7. 17-18.)을 올렸다.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회장 강정선)가 주최하는 ‘전국무용제’ 축하행사로 그동안 전국무용제에서 수상한 17팀 중 5팀을 소환, 무대에 올렸다. 전국무용제에 참가한 대구 창작춤의 역사와 수상한 작가들의 춤의 궤적을 짚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

 첫날, 무대를 보면서 ‘대구가 춤적 자산이 참 많구나’고 혼잣말을 했다. 이 때문에 전국무용제 대구개최에 대한 대구무용계 인사들의 평이 넘쳐났는지도. 이름을 걸기도 하고 숨어서 하는 평도 있었다. 이름을 내놓고 하는 의견에 더 날이 서 있는 것을 봤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매혹적 인물이 없는 춤판이다. 허나 매혹적 인물이 없다고 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춤으로 초월된 세계의 관계는 거울처럼 이쪽이 다가가면 저쪽도 다가온다. 진실된 춤을 추는, 춤 작가의 귀환을 강요하는 장애들, 열정을 부식하는 춤현실의 무기력이 서로 맞서는 두 힘의 소강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춤을 무너뜨리는 회한과 분노는 그 균형에 자주 위기를 몰아옴으로써 춤의 지리멸렬하며 동시에 변화무쌍한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정길무용단 〈민란〉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김현태(정길무용단)(19회 전국무용제 대통령상을 수상). 동학을 주제로 한 신작 〈민란〉을 올렸다. 춤의 현실적 실천을 문제 삼아 하나의 세계상을 선택하고 이 선택으로 관객이 결정되고 이 결정으로 다시 춤작가의 주체가 확보된다. 춤을 만들고 추는 것이 곧 실천인 김현태는 대구 춤의 중견으로 단단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작가다.
 무대 안에 사각 흰색무대. 한 명이 그 가운데 엎드려 있다. 복을 비는 ‘비나리’ 굿음악을 썼다. 흰색무대 가장자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다섯 명, 이어 여섯 명이 추는 춤은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 크게 번져가는 형식이다.
 태평소 소리가 고조되면서 움직임은 더 응축된다. 상승되어가는 춤에 조명이 화사하게 변한다. 보라색, 쑥색, 청회색의 간결한 두루마기형태의 의상과 움직임에 따라 슬쩍 드러나는 붉은색의 안감자락. 민초들의 속마음인 듯 붉고 아름답다. 울분과 한을 굳게 딛고 선 발과 주먹을 쥔 채 제자리에서 흔들흔들 힘을 풀어 추는 춤에 담아낸다. 세 명이 몸을 수그려 흔들면 나머지 세 명이 등을 보이며 보이지 않는 뒤를 봐주듯 돌아서 있다. 그 동작이 마치 적을 향한 울분의 표출과 전술의 구도 같다. 투명하고 슬프다. 김현태는 〈민란〉이라는 큰 이야기에 이르는 그것을 작은 춤으로 불러오면서 말한다. ‘비나리’로 지극정성 길어 올리는 고독한 춤 작업은 작은 것을 엄숙하게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는 태도에 있다고.




전효진댄스컴퍼니 〈슬픈 달빛〉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전효진(대구예술대 교수)의 〈슬픈 달빛〉 (21회 전국무용제 금상 수상), 무용제에서 수상한 작품을 부분 재안무하여 올렸다. 혼자 서 있는 남자와 군무진, 그 위에 올라선 여자. 한 무대, 다른 공간에 배열한 춤 배치로 시작한다. 현대회화를 보는 것 같다. 샤막을 통해 비춰 나오는 옅은 보라색 조명이 무대를 몽환적으로 만든다. 샤막이 걷히고, 조명이 바뀐다. 여자의 훈련된 기다림, 윤곽을 허물어뜨리고 내려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내려선 여자를 남자의 등에 업힌다. 삶(춤)이 무거워진 여자를 업고 끝없는 슬픔 속의 길을 걷는다. 여자가 남자의 등을 밟고 올라서 팔을 들어 이리저리 방향을 가리킨다. 남자 등 위에서의 그녀의 삶은 그 구체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들의 행복은 그녀가 가리키는, 그려내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슬픈 달빛’인지도. 훈련 강도를 알 수 있는 군무진의 춤이었다. 발레전공을 한 안무가의 영향일 것이다. 기다리던 세계를 아직 만나지 못한 춤적 감수성을 서정적인 음악에 잘 담아낸 춤이었다. 안무가(전효진)의 춤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춤이었다.




노진환댄스프로젝트 〈모던 타임즈〉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노진환(노진환 댄스프로젝트)의 〈모던 타임즈〉(27회 전국무용제 대통령상 수상). 붉은 색 조명이 들어오면, 요란한 총소리에 무용수들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뛰어다니고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달린다. 전쟁을 그려낸 움직임이 상투적이다. 반면 검정색 의상을 입은 남자들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대립,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주장을 펼친다. 분열되고 조각난 공간과 권력과 힘의 논리로 통용되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줬으나 쿠르트 요스의 〈녹색테이블〉이 연상되는 그림이다. 역사를 춤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 것이 어떠했는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날카롭고 서늘하게 스치는 어떤 기억,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 아닐까.




댄스컨템포러리준모 〈Winter Journey Ⅱ〉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이튿날, 이화석(전북대교수)의 〈Winter Journey Ⅱ〉(16회 전국무용제 은상 수상). 흰색 슈트를 입고, 군무진은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 군무진의 움직임은 별 의미가 없다. 투명한 공을 바닥에 놓고 위에 엎드려서 균형을 잡고, 공을 머리에 썼다가, 손에 들고 무대를 걷는다. 지난해 장유경의 〈겨울 나그네〉무대에 올렸던 춤에 군무진이 배경으로 들어왔다.




무빙채널댄스컴퍼니 〈희생〉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김병규(무빙채널댄스컴퍼니)의 〈희생〉(20회 전국무용제 은상 수상). 수상한 작품을 부분 재안무하여 올렸다. 상의를 벗은 8명의 남자가 샤막 앞에 엎드려있다. 군무진이 일어나서 움직이자 김병규가 잠에서 깬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대에 들어온다. 어딘가에 닿기를 원하는 듯, 위로 뛰어 오르고 무대를 구른다. 군무진과 섞이면서 추는 춤이 대구의 현대 춤과 색이 다르다. 다른 움직임을 보는 재미가 있다. 아마도 단어 ‘희생’은 김병규의 춤(삶)의 화두인 것 같다. 춤에 피로감이 스며있다. 김병규의 삶(춤)의 발견은 그가 자신의 춤으로부터 느끼는 어떤 깊은 소외감의 확인과 관련되어 보인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김병규의 무대, 반가웠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3여년을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하다 작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새로운 변모에 성공할 때, 그는 아마 이 피로감을 특별히 기억할 것이다.




한국춤더함(추현주) 〈신명〉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축하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추현주(한국춤더함)의 전통춤 〈신명〉. 상당한 시간동안 교육의 현장과 무대에서 지내온 무용가다. 세 명의 북춤을 시작으로 북춤 속에 스며든 추현주의 소고춤. 노랑색 저고리에 청색치마를 입고 풍년가에 맞춰 추는 소고춤이 날렵하다. 가락이 변하면서 소고를 든 군무진이 들어온다. 군무진의 덤덤한 소고춤과 비교되는 추현주의 묵은 춤이(만) 눈에 띄는 무대였다. 전통춤이 가지고 있는 고졸미와 그 화려함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무진의 춤은 날것이어서, 보는 재미가 덜했다. 축하공연으로는 다소 아쉬운 무대였다.

 이번 무대를 시작으로 ‘전국무용제’행사가 이어질 것이다.
 소통을 잘 하고 마찰을 빚지 않고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호흡을 잘 맞추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무릇 동맹이란 공유하는 가치와 목표에 기반해 의견을 나누고 이견이 있으면 조율하는 사이다. 다른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다면) 이들과 어떻게 100%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을까 싶다. 협의의 목표가 상대의 심기를 잘 헤아리고 납작 엎드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의 변화라도 춤판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다면, 폐쇄된 자율성이 춤의 목표일 수는 없다. 자율성은 목표의 원칙이 아니라 방법의 원칙이다. 춤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한 것뿐만이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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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처용’의 현재성과 현대성 



하루 3시간(만), 그것도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는 무용단이 있다. 명색이 프로단체다. 이들과 신작을 올리는 작업이 가능할까. 작품제작비는 타 무용단에 비해 3~4배 적다. 안무, 연출, 음악, 대본비도 없다. 3시간이라는 연습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올해 모두 노조에 가입했다고). 생각해보자. 단원들과 만나 새 작품을 연습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만난다. 거의 다 잊고 오는 단원들, 다시 처음부터 순서를 해야 한다. 작품의 완성도가 걱정된다고 연습운운 하며 무용가의 긍지, 책임, 프로의식에 호소해도 안 된다. 모두 예술감독의 몫이고 책임이다. 감독은 안무구상에 대본을 쓰고, 음악과 의상에 급하면 소품제작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

 좋은 작품을 올린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다. 어찌해야 할까.
 궁금하다. 시(市)는 이 단체가 어떤 춤으로 시민들의 예술향유를 돕고 문화의식을 고취시키기를 바라는지. 그동안 이 단체의 공연을 들어 예술성과 미학적 구조를 운운한 것이, 걸핏하면 왜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며 관객에게 억지 애국심과 눈물을 강요하느냐고 따졌던 것이 무색하고 미안하다. 열악한 제작환경과 알량한 제작비에, 보이지 않는 검열의 창살까지 있었던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그럼에도 무용인들의 입장에서는 존립해야하는 단체다. 슬프다. 모쪼록 시(市)가 좀 더 깊고 넓고 긴 시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춤현장의 위기 앞에서 춤비평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늦게나마 작품을 조명한다.
 구미시립무용단(예술감독,김우석)의 〈엇디하릿고〉(구미문화예술회관, 4. 29.). ‘엇디하릿고’, 어찌해야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망설임과 고백에 가까운 제목에서 예술감독의 고통을 확인한다.

 




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구미시립무용단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랑’ 설화에 따른 대본이다. 신라 헌강왕이 동해 ‘개운포(울산)’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지가 어두워지고 안개가 자욱하자 용의 조화라는 일관(日官)의 말에 용을 위해 절을 짓도록 명하자 동해용왕이 일곱 아들과 함께 나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중 처용이라는 아들이 헌강왕을 따라와 왕이 짝지어 준 여인과 결혼을 하였고, 어느 날 밤늦도록 놀다 집에 와보니 역신이 아내를 범하는(?) 현장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이후 감복한 역신이 처용의 얼굴 형상이 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설화로 궁중무용 ‘처용무’가 만들어진 토대다.
 김우석 예술감독은 ‘처용무’가 내포하고 있는 ‘벽사진경’에 의미를 두지 않고, 아내를(만) 용서하는 ‘포용’과 ‘관용’에 무게를 두고 춤극 형식으로 작품을 풀어냈다. 고루한 형식이지만 춤극이라는 것이 실은 상황을 짧게 보여주는 춤의 연속이다. 즉 짧은 춤 이미지가 주는 효과의 연속인 셈이다. 관객들의 이해와 영혼의 고양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형식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그 효과는 배가 되기도 하는.








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구미시립무용단




 춤을 본다. 동해의 깊은 바다를 보여주는 영상과 바위. 그 아래 선 두 남녀의 춤에 이어 군무진의 춤이 이어지지만 용광과 왕비, 처용과 그의 처 등의 캐릭터 구분이 쉽지 않다. 이어 등장한 역신(서상재, 객원)의 매혹적인 춤과 5명이 추는 현대무용에 가까운 군무와 무대 연출이 한국 창작춤의 고루함을 벗었다. 검정과 흰색 배열의 간결한 의상과 역신의 검정과 붉은 색을 섞은 망토, 이야기의 배경을 잘 설명해주는 무대장치와 감각적인 조명에서 발전과 변화를 읽는다.
 역신(서상재)의 귀기가 서린 매혹적인 솔로, 동시에 무대 천장에서 아래로 툭 떨어져 흔들리는 조명의 극적효과. 무대에 역신이 뿜은 붉고 사악한 기운이 객석으로 번진다. 역신과 처용의 처가 추는 듀오. 정념에 사로잡힌 처용의 처와 역신이 추는 어지럽고 선명한 그림들. 사랑에 빠진 연인이었다가, 연인들이 죽어서도 여전히 정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인 것을 말하는 현기증 나는 춤이다. 이를 지켜보는 처용의 춤은 고통 속에서 다시 고통을 확인하는 춤으로 보인다. 고통 속에서 숨 가쁨은 분열된 자아이기도 하다.
 한 무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 처용과 역신의 춤 배치가 좋다. 고통에 갇힌 처용(김교열, 객원)의 춤이 있는가 하면 덩실덩실 추어대는 역신의 춤이 한 무대에서 펼쳐진다. 선택에 따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세계가 처용에게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연출이다.
 두 무리의 군무진이 들고 나온 깃대. 검정색의 깃대는 역신을, 오방색은 처용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군무진의 춤으로 역신과 처용의 내면적 갈등과 대결을 보여준다. 캐릭터를 잘 해석한, 강렬한 서상재(역신)의 춤이 무대를 장악한다. ‘처용무’ 솔로에 이어 처용형상의 영상, 역신이 이끄는 깃대를 든 무리와의 처용의 전투. ‘역신’을 악으로 규정, 대결(결투) 뒤 역신의 죽음은 ‘처용’을 현재성(현대성)으로 해석한 결말이다.




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구미시립무용단




 마지막 장. 마치 처분을 기다리듯 고요하게 서 있는 처용 처. 여자 군무진의 경쾌한 춤에 이어 처용이 그녀를 용서한 듯, 손을 마주잡고 함께 추는 결말의 군무. 〈엇디하릿고〉로 말하고자 한 ‘포용’과 ‘관용’으로 풀어낸 장. 처용의 내적 갈등과 고통은 안이하게 그려지고, 용서와 화해를 위해 서둘러 봉합한 춤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벽사진경’의 의미는 간데없고 처용의 처에게만 해당되는 ‘포용’과 ‘관용’으로 마무리된 해피앤딩. 결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문제 자체를 없애버리는 해답은 해답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가 파악한 것만을 지운다. 섬세하게 파악하는 이는 섬세한 것을 지우며, 섬세하게 지우는 이는 섬세하게 집착한다. 섬세한 집착은 사상과 해방의 장애가 된다. ‘범아일여’까지는 아니라도 너와 나가 분별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존재함을 자각하는 사상 말이다. 어찌하리까만, 전달하고자 하는 춤의 인상과 효과,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지에 대한 선택 여부는 예술감독의 영역이다.
 한국 창작춤의 고루한 형식이 간간이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의상, 무대미술 등이 이전 무대와는 다르게 발전하였고 스토리에 따른 무용수들의 연기와 춤 또한 눈에 띄게 성장한 무대였다.






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구미시립무용단




 〈엇디하릿고〉. 춤이 주는 감동은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은 작품이었다.
 모쪼록 비평가의 취향보다 못하지 않으면서도 일반 관객의 취향을 넘어서지도 않는, 창작춤의 질과 구성에 관련된 이런 점들을 고려한, 춤을 보는 관객의 반응 정도에 유념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은 국공립예술단체 예술감독의 숙제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 

2019. 08.
사진제공_대구시립무용단, 한국무용협회 대구시지부, 구미시립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