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윤규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
현재와 춤을 잇는 비극(悲劇)의 역전(逆轉)
이지현_춤비평가

김윤규는 실존적 심연에 대한 추상적 에스프리를 풀어낸 〈회귀선〉(2016) 이후 고전적 드라마에 현미경을 갖다 대며 다시 동시대무용극 창작에 시동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본격적 첫발의 이번 작품 제목은 悲劇이 아니라 非劇이다. 그의 고민이 엿보이는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2019.10.18.-10.19. 성수아트홀)에서 우리는 이미 그가 그리스 비극을 불러들이지만, 고대적 비극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는 그간 그의 작품에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는 무게감과 우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도저히 삶의 자기장 안에서 만나게 되는 슬픔과 고통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성찰로서의 고전 비극의 모습이 매우 닮아 있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으로 비극을 끌고 들어와 현미경을 들이대고 성찰하며 어떤 답을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김윤규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 ⓒ댄스씨어터 틱




 ‘오이디프스’와 ‘안티고네’에서 선별된 대사들은 1장 비극의 탄생부터 6장의 프롤로그(내일을 위한 우화라는 부제에 맞게 이 작품의 대미는 다시 ‘프롤로그’이다)까지 매장마다 거의 선두에 그리스 비극풍으로 읊조려진다. 배우 겸 무용수 하지은에 의한 이 대사의 음성은 비극의 한복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주문처럼 강력하고, 대사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과 이질적으로 어우러져 묘한 숭고함을 빚어낸다.
 대부분의 장면은 군무(강민경, 박규리, 심현정, 서진욱, 김정훈, 하지은)로 진행되며 이 무용단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군무의 따뜻함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부대낌, 의지함, 엉켜 하나됨과 파스텔톤 갈색과 주황색을 이리저리 변주해 입은 유사한 의상에 의해 서서히 쌓여 간다. 그래서 무대에서 보이는 이들은 난민, 가족, 형제, 이웃을 합쳐 놓은 듯 공동체로 보여진다. 아무리 이들이 중간에 장면을 위해 서로를 비난하고 뺏고 뺏기며 조롱하더라도 이내 그들은 한 줄로 결연하게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것으로 몸으로 쌓아올린 끈끈한 이미지로 복귀한다.








김윤규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 ⓒ댄스씨어터 틱




 혹자는 벤야민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대의 비극은 근현대에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하나의 예술양식으로서도 비극은 더 이상 이 시대에 불려오지 못한다. 고대의 비극이 옛 법과 새로운 법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비극적 희생 즉 운명적이고 숭고한 죽음 혹은 죄와 속죄에 대한 윤리적 고뇌를 다루는 거대한 것으로 공동체 이념이라는 조건을 갖고 있는데, 이미 공동체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한 근현대의 주인공들에게는 동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주인공들은 고대인들만큼 대의적일 수 없도록 협소한 의식을 갖는 조각들이며 눈앞의 실존적 고뇌에 눌려 윤리적 고민을 할 여유도 없이 그저 냉소적이고 우울하며 그것을 덮어줄 환상만을 찾아나서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슬픔과 고통을 보여주고, 성찰하고, 분노하고, 대안을 찾고, 서로를 끌어안을 때 새로운 역설이 탄생한다. 71년생 김윤규가 포착했듯이 그에게 슬픔과 고통은 당연히 사회와 관련된 종류의 것이고, 그에 대한 정서적, 육감적 답 역시 ‘서로를 살피는 것’이기에 한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정서가 진한 근대사회에 대한 그의 경험과 기억은 아직도 사회 속 존재의 문제를 ‘서로’ 바라보며 해결하려는 따뜻한 몸짓은 우울한 이 시대 현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판타지이다.






김윤규 〈비극(非劇) - 내일을 위한 우화〉 ⓒ댄스씨어터 틱




 현대인들은 더 이상 비극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우울로 자신을 표현한다. 게다가 우울해도 F코드로 시작되는 병명이 알려질까봐 병원도 못가는 상황과 우울증이 아닐까 우려하거나 고백하는 일로 우울을 드러내는 일에는 거침이 없는 기막히게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미 우울이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이번 작품 〈비극〉의 다음 장면은 김윤규 감독이 이 상황을 F코드로 읽어 내려가며 우리에게 들려줄 우화는 어떤 것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현대무용극에 대한 그의 의지는 전통양식에서 단절된 극성을 춤으로 다시 살려내려는 것에 초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단지 예술양식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는 그 이정표를 꽂아 놓고 사색 중으로 보인다. 아직도 만연한 현재적 비극을 어떻게 춤으로 담아낼 것인지 아니 춤이 어떻게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인지를... 곳곳에서 보이는 그의 내공, 비극이든 우울이든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들여다 볼 용기를 갖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우울 속의 희망 제목만큼 비극非劇이다.


*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2019 예술작품지원사업 자기주도형 비평사업’에 의해 댄스씨어터 틱으로부터 사전 의뢰된 비평으로, 서울문화재단이 기존 평가시스템(현장평가, 행정평가)을 개선하여 선정자가 원하는 리뷰 비평을 받아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한 사업으로 진행된 것을 춤웹진에 전제한 것임.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2019. 11.
사진제공_댄스씨어터 틱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