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메테 잉바르첸 〈69 positions〉, 투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 〈Ality〉
관계성에 입장한 관객의 새로운 경험
이지현_춤비평가

시댄스 2019는 작년의 ‘난민’에 이어 ‘폭력’ 포커스를 중심에 놓고, 해외초청, 국내초청, 협력합작의 섹션으로 풍부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 관객으로서 매우 신선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두 개의 작품이 있었는데, 하나는 폭력 포커스에 중요한 작품으로 올라있는 성과 정치의 문제를 나체로 진행하는 렉쳐 퍼포먼스 작품 메테 잉바르첸(이하 메테)의 〈69 positions〉와 180분간 진행되는 독특한 즉흥공연으로 관객의 입퇴장이 자유로운 열린 구조의 투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이하 투위민머신쇼)의 〈Ality〉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작품은 ‘어떤 자세와 표정으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고, 어느 때보다도 관객은 단순히 ‘보는 자의 수동적 집단’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이 생긴 새로운 역할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직 대부분의 국내 무용공연은 극장에서 이루어지며 극장의 규범은 창작자에게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단순하지만 엄격하게 요구되는 지점들이 있다. 입장 시간을 준수해야 하고, 약속된 일정 시간 이상의 지연 입장으로 공연을 방해해서는 안되며, 입장 한 후 객석에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암전이 유지되며 어둠 때문에 관객은 서로는 물론 공연장안의 비가시적 존재로 남게 된다. 관객은 보는 자이며, 2인자이고 창작자와 창작품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 금지를 부여받은 자이다.




메테 잉바르첸 〈69 positions〉 ⓒCreamart/SIDance2019




 메테의 공연은 리차드 셰크너가 이끈 미국 퍼포먼스 그룹의 작품 〈디오니소스 인 69〉를 오마주하는 의미에서 〈69 포지션스〉 라는 제목으로 관객을 69명으로 제한한 특별한 방식의 공연이었다. 당연히 단 2회의 공연에 140명도 못 들어가는 티켓은 조기매진 됐으며 대다수의 관심을 가진 관객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관객이 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공연이었다. 메리홀의 무대 위에 꾸며진 무대는 크기보다 조금 작게 흰색 프레임으로 뼈대를 만들고 4면에 적당하게 다큐를 제공할 모니터와 보드를 붙여 놓았고(이 보드는 진행에 따라 양면으로 다른 내용이 적혀있어 전환되게끔 만들어졌다), 곳곳에 자료 사진과 책들이 걸려있는 전시용 공간이었다.
 작품의 시작은 메테가 그 입구에 서서 자신의 집에서 손님을 맞는 것처럼 친절하게 눈을 맞추며 69명의 관객을 일일이 맞았고 관객은 꽤나 강한 조명을 받게 되는 무대안으로 입장하게 된다. 입구의 가장 가까운 모니터에서 렉처를 시작한 그녀는 자신이 퍼포먼스 작가로서 〈Meat joy〉 (1964)를 만든 케롤리 슈니만과 나눈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작품의 계보를 훑기 시작했고, 60년대 퍼포먼스 작가인 앤 할플린의 〈Parades and Changes〉(1965), 퍼포먼스 그룹의 〈Dionysus in 69〉(1968) 그리고 야요이 쿠사마의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서의 나체로 진행한 저항 퍼포먼스까지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써 나체 되기 섹슈얼리티 수행한 작품들에 대한 영상과 사진, 본인의 시연을 곁들여 설명해 들어갔다.
 또 그녀는 그런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나체와 쾌락, 욕망에 관한 실험작들 중 인터넷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적 자극을 받는 환경 속에서 개인은 낮이든 밤이든 쾌락을 강요받는 상황을 집단 성교 장면으로 가져온 〈to come〉과 심리적 동기가 아니라 물질적 신체로부터 비롯된 격렬한 표현들에 대한 작품인 〈50/50〉, 이본느 레이너의 〈No! Manifesto〉를 패러디한 〈Yes! manifesto〉 등 작품을 만들게 된 레퍼런스에 대한 소개와 춤추기 시연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시간이 100분 넘게 이어졌다.
 작품에 대한 비평이 아닌, 관객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두 작품을 보려는 이 글의 의도에 비춰볼 때, 메테의 이 작품은 한국의 관객들에겐 자막과 자료 내용의 방대함이 퍼포머와 즉각적이고 자연스런 반응을 주고받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상황은 아쉬웠음에도, 극장에 갤러리 같은 공간을 만들어 관객을 공연장의 한가운데 불러들이는 것에 성공하면서 극장의 고정된 관객과 퍼포머의 위치상의 구분이 폐지되었고 그것은 관객이 공연을 수행하는 수평적 두 축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메테 잉바르첸 〈69 positions〉 ⓒCreamart/SIDance2019




 건장하고 건강한 몸을 가진 그녀의 나체(양말과 스니커스는 벗지 않은) 퍼포먼스는 특별한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객이 어디서 봐도 되도록 허락되었는데 이 역시 관객에게는 수많은 자극 그것도 개인적 관계에서나 가능한 성적인 노출과 행위에 꼼짝없이 노출되어야 하는 상황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했다. 공적 공간에서 금지와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경험은 관객을 가속적으로 불안정하게 하였고, 이 장치는 이 퍼포먼스의 중요한 모멘텀이 된다. 관객은 이미 훈련된 관람태도에 도전을 받았고, 공적인 공간에서 개인적인 자아(personal self)와 욕망하는 자아(desiring self)가 작동되는 것을 뚜렷하게 느끼게 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리서치 기반 창작방식(research based practice)이 자극하는 이성을 때때로 깨워야 하는 매우 갈등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게다가 메테는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에게 지시하는 바가 많아지는데 〈디오니소스 인 69〉에서 사용된 mp3음원을 이어폰으로 제공하며 4명을 불러내 집단 오르가즘 소리를 따라하게 하는데 직접 행위하는 4명을 제외한 나머지 관객들은 합창같이 증폭된 그 소리를 들어야 함으로 인해 불편함은 이제 전면적인 것이 되고 여기서 메테의 작품을 일반적인 다른 작품을 보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진다.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관객의 지각의 영역으로 넘어 왔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메테를 보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기분에 점점 더 민감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이 작품이 관객의 것인 이유이다.




메테 잉바르첸 〈69 positions〉 ⓒCreamart/SIDance2019




 〈69 positions〉가 한국의 관객들과 어떤 퍼포먼스를 만들어 냈는지는 메테만이 비교적으로 느낄 수 있겠지만 내가 참여한 공연에서 관객들은 메테의 카리스마와 과한 친절에 홀리듯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관객은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를 느끼는 일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관객들의 몸은 내적, 규범적 충돌에 긴장한 듯 보였고, 내면이 목소리에 따라 자신의 위치와 퍼포머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었음에도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잘 운영하지 못해 보였다.




투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 〈Ality〉 ⓒCreamart/SIDance2019




 투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의 협력작 〈Ality〉는 관객의 입장에서 또 다른 것을 느끼게 해준다. 입장하기 위해 늘어선 관객에게 진행자는 일대일로 소곤소곤 이 작품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팁을 알려준다. 현실에서 느낀 것들은 잠시 내려놓고 들어갈 것, 편안한 자세로 긴장을 내려놓고 볼 것, 언제든지 나오고 들어가도 된다는 것 등등. 문화비축기지 T1은 유리벽으로 된 공간으로 안과 밖이 소통되는 공간이다. 바닥엔 거울과 흡사한 은색의 플로어가 깔려 있으며 가벼운 염색천이 군데군데 매달려 있다. 관객은 원형으로 놓인 바닥과 의자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으며 이동도 가능하다. 이미 시작된 공연이지만 퍼포머들은 공중을 응시하는 시선으로 현실에 있으나 매우 비현실적인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 마치 마네킨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투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 〈Ality〉 ⓒCreamart/SIDance2019




 이 작품은 파괴와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한 지속된 질문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나는 것의 범위 안에서 작업할 것을 선택했고, 비결정성을 견지하며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상상과 얽히는 공간을 충분히 열어주고 살핀다. 그러면서 행간의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의미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한 규칙은 공간과 몸은 수시로 협상할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것인데, 이 협상 가능성은 모호하거나 몽롱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 실제 요소들을 위한 것이도록 해야 한다. 또 퍼포머는 동작을 구성하지 않아야 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하려는 것만을 피하면서 새로운 감각과 공간들이 나타나길 바라는 갈망만을 유지한 채 그저 존재하거나 움직여야 한다.
 관객은 바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 안에서 그들의 시선이나 그들의 상상과 만난다. 관객은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부유하지만 그들의 자기장과 얽혀들면서 매우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도 관객은 단순한 보는 자가 아니다.




위민머신쇼+조나단 보니치+김유진 〈Ality〉 ⓒCreamart/SIDance2019




 투위민머신쇼와 보니치가 이전 작품인 〈Trans〉(2015)의 주제를 만들어 가면서 창작과 관련된 단어, 용어, 개념의 모음집을 만들었고 이를 객석 곳곳에 비치했는데, 30여개의 단어와 사진으로 구성된 이 용어집은 그들의 생각을 작업할 때 더 잘 분절화하기위해 그들 스스로 만든 것과 다른 사람들이 이미 사용하는 것에서 가져온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단어는 Re-ality이고 마지막 단어는 Wit-ness이며 각각의 단어들은 정말 자신들의 뉘앙스와 개념으로 꼼꼼히 정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유한 개념을 갖고 서로를 감각하면서 움직이고 음악가는 이들과 교감하며 음악을 플레이 한다. 그 외 하늘거리는 패브릭과 거울로 되비치는 이 모든 반영과 관객이라는 변수는 모두 함께 이 작품을 생성하거나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이 관객에게 요구한 것은 ‘이완’이고 메테의 작품과 비교적으로 보자면 이 작품은 현실(reality)보다는 가상(virtuality)이라는 심연에 머물다 온 듯한 경험을 준다. 깊은 물속처럼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무거운 진공감, 또는 우주적 굉음 등이 울리면서 자기의 미세한 감각과 갈망에 명상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공간의 떨림과 그 협상에서 빚어지는 어떤 전개와 그 사이에서 사라지는 의미들은 어느 누구도 결정하지 않고 어느 것도 결정되지 않는 180분 동안 끝없이 이 공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이 모든 것을 느껴야 하는 자다. 퍼포머와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구획 지워져 있는 상태인 동시에 분명하게 다른 역할을 맡은 또 하나의 공연 주체인. 만약 이들이 워크샵을 통해 관객에게 그들의 명상법과 즉흥법을 공유했다면 이 작품은 매우 거대한 우주의 호흡을 관객도 인식하고 체험했을 것으로 상상되었다.

이지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 

2019. 11.
사진제공_Creamart/SIDance201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