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 박연정 〈망구(望九)-그믐달〉
가곡의 매력, 오브제와 마임을 매치시킨 실험 작업






김혜라: 오늘 이 자리는 춤비평 작업과 관련, 비평가 개인의 리뷰 작업도 중요하지만, 한 공연물에 대한 생동하는 현장감과 직정적인 인상과 여럿의 다양한 관점을 공유할 때 좀 더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 있다는 취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채희완 선생님, 윤지현님 그리고 김연정님과 함께 방금 전 관람한 박연정의 <망구(望九)-그믐달>에 대한 작품 평을 해보고자 합니다.
<망구-그믐달> 작품은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에 선정된 작품이며, 봉산탈춤의 ‘미얄할미영감춤’을 소재로 한 <망구>의 연작입니다. 안무가 박연정은 국립부산국악원 한국춤 젊은 안무가전에서 최우수 안무가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먼저 전체적인 작품에 대한 인상을 나누면서 부분적인 의미 해석과 논평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풍이 배인 발상이 문제

채희완: 저는 망구 시리즈로 된 박연정의 작품을 부산에서 여러 번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공연은 마임이 재미나고 특히 가곡하는 파트너를 잘 만나서 작품구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안정아씨가 가곡창을 청아하고 근사하게 불렀어요. 아이와 진행유도자 몫도 잘해내었고요. 소리는 남도가락이나 메나리조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가곡은 말하고 싶은 소리의 물결이 가사와 함께 적셔오는 참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발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데요. 전체적으로 여러 오브제의 상징성과 서사성을 통해 마임과 오브제 사이의 의미형성에 재미난 발상을 한듯 한데, 얼굴의 하얀 페인트칠이나 덧입은 의상과 색감, 마임과 춤동작 등에서 일본풍의 느낌이 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토의 느낌이 나는데 보고 있노라니 그만 질리기도 했거든요. 차라리 탈을 쓰고 했거나 아니면 얼굴과 목, 혀까지도 강렬하게 탈 이상의 분장으로 덧입혔으면 모를까요. 보이고 들리는 대로 보는 사람이 편히 따라서 놀게 하려고 애써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로선 막상 쉽게 놀 수가 없었네요. 특히 탈춤의 미얄할미를 소재적 주제로 동기 부여한 이 작품에서 일본풍의 발상은 내게는 참 견디기가 힘듭니다.

김연정: 한국적 소재와 전통춤의 틀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큰 숙제입니다. 젊은 예술가 시리즈에 걸맞게 여러 가지 면에서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오브제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이 공연 전체를 흥미롭게 끌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형상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습니다. 반면 일본풍의 느낌을 받았다는 채선생님의 의견에도 동감합니다. 특히 분장이나 의상 등에서 오노식 부토의 인상을 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공연이 춤인가? 아니면 다매체 복합연행인가? 춤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윤지현: 저는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모든 것이 춤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저도 망구의 의상과 하얀 원을 그린 얼굴 분장 등에서 일본풍의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춤 공연 형식을 깨트리려는 노력이 신선했고, 다채로운 장치들과 무대변화가 돋보였는데 몸짓과 마임, 그림자놀이, 소품들, 가곡창 등 다양한 꺼리들이 무대를 지속적으로 장면이 변화되는 공간으로 만들었기에 작가의 많은 고민과 노력을 엿보는 지점이었다고 봅니다. 내용에서도 비약이 있기는 했으나 관객들의 삶의 무게가 망구와 다르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를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혜라: <망구-그믐달>은 그믐달이 차면 비워지며 소생하듯, 망구의 맺힌 한을 풀어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는 굿판으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안무자는 다양한 장치들의 배치와 오브제의 의미망을 촘촘히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소변, 쌀, 종이 같은 일상속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들과 쉽게 버려진 망구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듯 이요.
전체적인 작품구조가 대비되는 장면의 연속성과 속도감이 있어서인지 한 시간 동안 긴장감을 잃지 않고 관람했습니다. 방구를 뀌고 먹고 싸는 저속한 짓, 그러나 더러운 요강 속에서 족두리가 나오며 혼례라는 청춘의 통과의례로 연결되는 아름다움(초년). 전체 무대를 둘러싼 재활용 종이는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영감과 애첩)이 되어 애증과 억울함의 몸짓으로 변모 되었구요(중년). 이는 마치 모래성이 순식간에 사라지듯 허망함의 정서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이 더미(삶의 무게)에 파묻힌 춤꾼한테 쏟아 내리치는 쌀알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고통스럽지만 질긴 삶을 견디자는 의지(노년)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다양한 장치 배치, 소도구를 활용한 시지각적 의미망

 

채희완 : 무대장치와 허공에 걸린 오브제와 몇몇 소도구를 활용해 시지각적 의미망을 엮어낸 것을 초년, 중년, 노년이라는 미얄 삶의 일대기로 감지하셨군요. 예민하고도 풍성한 감성적 지각입니다. 미얄의 삶의 내력을 해체시켜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한 대목 또한 바로 부토식 발상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하얗게 분칠한 얼굴도 그러하려니와 과장되고 사물적인 표정 형상, 물체동작, 물체행각 같은 인체동작의 사물화, 물체화, 요강의 의인화, 요강자체의 자기행위화, 요강의 생물화, 사면벽과 마루를 뒤덮은 재활종이벽의 생물화, 의인화, 이의 활용 등은 여러 양태로 부토춤의 표현모토에 가깝다고 보이는 것이지요.
의식과 육체의 분리, 정신을 배제한 육체자체의 자기표현, 정신의 사물화, 어둠의 춤, 죽음의 춤 등과 같은 춤의식이 그러하다고 하겠는데요. 특히 이런 대목 같은 것이지요. 마지막 종이더미에 뒤덮인 출연자에게 소나기처럼 장맛비처럼 쌀알이 쏟아지는 대목은 더욱 부토적 인상을 배가해주는 거예요. 죽은 이를 염할 때 마지막 입을 벌려 쌀 몇 톨을 떨구어 주는 의식절차를 연상시키면서도, 똑같은 이미지인 거예요. 부토 전문 춤 컴퍼니인 산카이 주쿠의 내한 공연 작품 <경이롭게 서있는 달걀>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벼락 같은 소나기 같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고 던져오는 이미지를 큰 유감없이 받아들인다면 비록 신선한 감은 아닐지라도 재미나고 의미 있는 작품향수가 될 수 있겠지요.

김연정: 채선생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일본의 부토적인 색채들이 의도적 발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우리의 상상력 저층에 스며들어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그것이 더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혜라 : 맞습니다. 비단 이 작업만이 아니라 안무자나 관객들이 민감하게 체감하지 못하는 문화 불감증도 문제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브제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바빠서 선생님들께서 지적하신 일본풍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시 한 번 짚어볼 지점이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전체적인 주제에 대한 얘기를 해보기로 하지요.
박연정은 작품에서 일상적 삶을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 듯 하고 망구의 인생 여정을 환희, 애증, 회한의 정서로 드라마틱하게 풀어내었습니다. 반면 구체성과 추상성이 복잡하게 얽혀 주제의 범주를 너무 확산시킨 면이 있습니다. 요강을 치마 속으로 집어넣어 생명을 잉태한 여인의 충만함과 죽음을 대비시킨 장면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조망하지도 억울함을 강조하지도 못한 격이 되었지요.





미얄의 해체를 통한 축적된 삶의 에너지

 

채희완: 저는 이 작품의 명확한 주제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억울한 것이 무엇인지 그늘이나 한, 죽음이 뭔지, 작품을 보면서 돌이켜볼 수 없거든요. 나이 90을 바라보며 소멸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팜플렛에서 말하고는 있지만, 꽃다운 때도 있었으니 그게 새로운 인생이라지만, 그건 춤으로 뭘 말하는 거지요? 인생은 괜찮은 것이라고들 하는데 춤이 말입니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삶의 무게가 다르므로 오히려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자하는 안무자의 삶의 세계에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미얄적 삶을 대하는 안무자의 삶에 대한 물음이 앞선다는 것이지요. 연륜이 빚어내는 신산고초의 삶의 그늘과, 춤작품의 무게와 깊이는 거의 정비례관계가 아닐까, 새삼 확인해 봅니다.

김혜라 : 무언지 모르는 슬픔, 죽음, 사랑, 청춘, 인생 등의 개념에 미얄이라는 메타포를 추상적으로 대입했기에 의미는 풍성한데 명쾌하게 주제가 잘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안무가는 현실적 미얄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관객의 몫으로 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 논하는 “열린 해석이라는 것”이 자율성을 주는 면도 있으나 실체 없는 허상으로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안무자가 아직은 30초반이라 90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미얄적 삶’을 자신의 세계로 접목하여 체화해 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윤지현: “90을 바라보는 나이의 할머니와 미얄적 삶”이라는 작가의 변과 프로그램의 소개말을 보지 못한 채 공연을 봤습니다. 하지만 ‘한국 여성의 삶’이라는 경험의 보편성만으로도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90세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의 민족 고난과 한국전쟁, 급속한 경제개발과 사회정치의 변화라는 역경 속에 한국근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거기다가 ‘미얄적 삶’이란 혹독하기만 하던 가부장제적 부당함을 견뎌왔음도 함의하는 것이지요. 작가는 자신의 망구를 한국 근대사의 맥락에 연결하지 않았고, 미얄의 억울함에도 연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탈맥락적인 망구의 삶이 주제를 흐리고 있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렇지만 여성의 삶으로서 흔히 상상할 수 있을 법한 과정들, 꿈 많고 발랄하던 소녀시절, 벅찬 희망과 행복한 기대에 찬 결혼과 출산, 그리고 다소 급작스럽고 개연성이 없이 닥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길고 남루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갈등과 슬픔, 좌절, 늙어감 등으로 이어지는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 묘사되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경험한 망구의 삶이 당연히 그 이후 세대 여성의 삶보다 고통스럽고 힘겨워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 세대 여성의 삶과, 그들이 느끼는 삶의 무게가 망구가 느낀 삶의 무게보다 가볍기만 한 것인지 묻게 됩니다. 삶의 무게에 대한 느낌은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작품 속 망구의 삶과 죽음은, 오히려 작가가 경험한 동시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의 삶으로서 보편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 여성이 죽음의 과정에서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이승에서의 삶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여성으로서 내 삶이 겹쳐지고, 여성으로 살아갔던 망구의 삶이 겹쳐지는, 공유하는 경험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채희완: 쉽지 않은 얘기가 나왔군요. 작품의 주관적 해석의 보편성 문제입니다. 현재 한국여성 삶의 보편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규정문제와 함께, 그것도 소통의 문제와 더불어서.

윤지현: 해석의 주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여성 삶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는 간단치 않은 주제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작가가 제시해준 우리 시대 ‘90살의 미얄’이라는 망구에 대한 단서와 정보에 근거한 해석이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괴리를 좁히고, 소통의 문제에도 좀 더 용이하게 다가가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김혜라
: 안무가가 해체시킨 미얄의 실체가 관객들에게 어떤 공감과 소통의 방식으로 해석되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채희완: 이 작품은 시작 전부터 관객을 컴컴한 절집이나 동굴 속 굿판 같은 모양새인 길목으로 안내하죠. 그런데 이렇게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방식을 취할 때는 무방비적인 관중에게는 거부할 길도 만들어 놓아야지요. 관중하고 직접 대화하는 방식도 다소 구태의연했고, 이제는 이러한 연출은 새로운 형식의 작품에선 안보고 싶습니다. 물론 탈춤도 관객을 유인하려고 시작 전에 앞길놀이 방식으로 하지만 이 작품은 지나치게 강요한 듯한 인상입니다.
80년대 초 무세중선생의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같은 작품에서 관중에게 강요한 앞길놀이와는 질적으로나 현장적으로나 의미가 다른 겁니다. <통막살>에서는 관중을 극 속으로 유도하는 단순한 입장의례가 아니라 통일신맞이의 통렬한 의례절차에 관중을 한 통속으로 흡입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연정: 일종의 넋전과 같은 형상물들을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설치해서 관객들에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게 함으로써 의도된 공간으로 초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몸속의 일부와 같은 내밀한 공간에 들어간 느낌, 그래서 망구를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고 봅니다. 작가에게 그 정도의 권위는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윤지현: 관객을 유도하는 일종의 통과의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공연은 망구의 삶을 보여주었지만 이승에서 반추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 저승에서 또는 죽음으로 가는 동안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이 길 건너의 기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장으로 유도하는 하얀 선과 천장에서 늘어진 흰 꽃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선택사항이 아니듯 저승으로 가는 길 역시도 우회할 수 없이 주어진 대로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혜라: 안내되는 길목 마디에서 요강 속에 무대를 둘러싼 재활용 종이를 넣어놓고 요강을 열면 사람소리가 나오는 퍼포먼스를 했죠. 공연을 마치고 되짚어보니 안무가가 보여준 이 대목이 전체 작품을 축약시킨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무대와 객석 배치도 바꿔 놓았는데요. 시간(삶과 죽음)과 공간(이승과 저승)을 바라보는 시점을 다르게 설정하고자 한 듯 보였습니다. 흥미로운 오브제 의미연결에 주력하여 시원한 혹은 절절한 춤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박연정씨는 춤집도 좋아 보이던데요.

채희완: 박연정은 춤도 잘 춘다고 하고 탈춤도 많이 추었다고 합니다. 역시 춤은 몸이고 몸의 움직임이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에서 박연정은 박연정의 새로운 미얄춤을 어느 대목에선 모든 것 제끼고 한 번 신나게 췄어야 하는데 요강하고 놀거나 방구나 뀌고 논 것이 아닌가 싶어 못내 아쉽습니다. 이 작품은 다분히 인형극이나 그림자극 같은 인상이 짙습니다. 현전 탈춤에서 미얄춤은 눈물겨운 한 번의 몸짓과 장단으로 미얄의 삶의 내력과 민중적 소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크게 거슬리는 것은 몇 차례 되풀이되는 “똥따다 똥딱” 하는 뽕짝 장단에 맞춘 실로폰 소리와 토이 피아노선율인데, 또 거기에 맞춘 몸짓도 그렇습니다. 비록 일제 치하를 산 미얄할미의 삶의 애환을 담아내는 대목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직정의 방식이 아니라 패러디로서 풍자의 방식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그러나 3면벽과 천장과 바닥이 온통 재활종이로 싸 발라져 있어 밟거나 뛰거나 눕거나 구르거나 또 종이를 구기거나 째거나 둘둘 말거나 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삐져나오는 크고 작은 소음이 청아한 가곡소리에 그리고 아이 소리에 토이 피아노 소리에 비장단이 아니라 무장단적으로 맞춰졌다는 점이 한편 거슬리기도 하나 참 자연스러웠어요. 물론 밟을 때만이라도 나름 장단의 리듬감이 있었으면 한결 더 자연스러웠겠지요.

김연정: 저는 한정된 공간의 폐쇄성이 누군가에게는 일종의 공포감을 줄 수도 있지만 차분한 안정감을 만들어 주었다고 봅니다. 종이로 바닥과 벽면을 모두 둘러싼 무대 장치가 더욱 그런 느낌을 주었는데요. 그러한 장치를 이용해 일상의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장단을 만들고 형상을 만들고 허물고 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결국 삶의 무게에 매몰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김혜라: 이번 작업은 안 어울릴 것 같은 소리가 오히려 춤추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연자가 무릎을 꺾으며 우연히 치는 듯한 장난스런 토이 피아노 소리를 연주자 차혜리씨가 받아 선율로 연결시켰고, 종이를 뜯어내고 찢고 밟는 소리에 맺힌 감정이 실렸기에 오랜 만에 매체가 주는 생동감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오브제의 생물화 혹은 소리의 의인화로도 해석이 되겠네요. 선율에 몸짓이 머무르지 않고 장단을 넘어서는 춤이 품어져 나왔다면 앞선 희극적 행위가 패러디로 비춰질 멋진 장면이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김연정: ‘미얄할미과장’은 할미가 짊어지고 살아온 축적된 삶의 고통을 무심하게 희화하여 풀어내는 것에 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을 했다고 봅니다. 젊은 판소리꾼 이자람이 <억척가>로 풀어낸 브레히트의 작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억척어멈의 모습과도 연결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면에서 망구가 보여주는 삶의 깊이 있는 무게감이 좀 더 춤으로 절절하게 표현되는 대목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윤지현
: 이 작품은 처음부터 죽음을 묘사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표현방식이 어둡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승의 망구는 살았을 때처럼 잘 웃고, 익살부리고, 표정 짓고, 생기있게 움직였습니다. 저 너머에도 여기와 같은 삶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여기의 삶이 이어지되 고통 없이 이어질 것 같다는 기대를 떠올릴 정도였습니다. 삶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다가오고, 다시 새로운 삶은 지속될 것이라는 건강함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김혜라: 의견을 모아보니 작품에서 시원한 춤을 보지 못한 점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공연이 ‘미얄할미영감춤’을 소재로 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미얄할미춤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어떤 부분은 꼭 조명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미얄의 소재는 어느 삶의 표현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

 

채희완: 이 작품은 되돌아오는 삶의 축적된 에너지를 표현한 듯 한데요. 축적된 삶의 모습을 탈춤의 미얄춤을 통해 추적해 보아야 하지만 미얄의 소재는 내용이건 형식이건 어느 삶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탈춤으로 얘기하면 할망구는 이렇게도 얘기하고 저렇게도 얘기해도 결국 주제는 민중의 끈질긴 삶과 그 소망을 녹아 내는 것이지요.

김혜라: 그래도 전작에 비해 다매체를 잘 활용하여 연작으로 재탄생시킨 점, 춤의 사회적 역할에 고민하고 있는 작가적 관점 그리고 굿의 형식을 1인극으로 재해석해서 재미나게 이끌어낸 점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바라는 점은 박연정이 망구에 사회적 함의만 두고 대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미얄적 삶을 대하는 안무자의 고뇌”가 깊어진다면 현실 삶을 대변하고 공감하게 하는 작업으로 발전하리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나 작품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다면요.

김연정: 우산처럼 생긴 장치에 여러 가지 형상들을 달아 그림자로 비추어 주는 장면은 망구의 지나간 일생을 함께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작가가 담고자 하는 의미와 기술적 장치가 잘 조화된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막혀있던 벽을 뚫고 밖으로 나아가도록 한 장면은 폐쇄된 공간이었던 그곳, 마치 자궁벽을 뚫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의 빛을 맞이하는 듯한 카타르시스가 있었습니다. 그믐달이 지고 새날을 맞이하듯 관객에게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길을 터주는 것 같은 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윤지현: 공연을 끝내고 출구를 만들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객석에서 무대 정면 뒤쪽 벽면에 있던 종이를 찢자 출구를 향한 계단이 드러났습니다. 입장하는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극장 안으로 유도했는데 나가는 길은 무대를 찢어야만, 곧 훼손하여 다시 쓸 수 없게 만들어 극이 완전히 끝나야만 객석에 걸어놓은 최면이 풀리기라도 한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치밀하고 세심한 계산과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채희완: <망구-그믐달> 작품은 오브제와 매체에 파묻힌 폭이 되었으나 몇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로 오브제와 춤과 마임사이를 어떻게 매치하느냐에 따른 실험 작업이라는 점, 둘째 탈춤의 미얄과장이 “한국춤에서 어떤 의미로 되살아나느냐” 하고 되묻게 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가곡의 아름다움과 현실소리로서의 기능을 되새기게 한 감동적인 소리의 발현인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춤의 뿌리와 현실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또 부토의 춤정신에 매혹을 느끼든 아니든 일본색채가 농후한 한국인의 창작춤을 동양인의 눈으로, 세계인의 눈으로, 현대인의 눈으로 오늘 이 땅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도 되물어봅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한 작품을 두고 여럿이서, 말을 맞춰가지 않고 각자 느낌과 생각을 터놓는 자리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차별 없이 차이를 공유하는 자리이지요.

김혜라: 그러한 자리를 처음으로 해서, 한 작품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나눠보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고맙습니다.

2015. 02.
사진제공_공연기획MCT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