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효승 〈오피움〉
신체 표현으로 카타르시스 공유한 이색작
김채현_춤비평가

예효승 안무작 〈오피움〉은 아마도 타이틀부터 눈길이 멈추도록 할 것이다(11월 8~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양귀비꽃의 유액을 처리한 것이 오피움이고 아편(阿片)으로도 불린다. 오피움 단어가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통용되는지 몰라도, 아편에 비해선 부정적인 어감이 덜한 편이다.
 아편이든 오피움이든 입에 올리기 꺼려지기는 매일반이다. 공연작 타이틀로서 금기시되는 낱말이나 구절이 이 시대에 얼마나 있을까 싶어도 이처럼 꺼려지는 것들은 있다. 반면에, 언어가 구축해놓은 관념의 장막에 갇히기보다 스스럼없이 그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며 다르게 상상하는 즐거움은 나름 의미를 갖는다. 특히 예술이라면 격을 갖추어 그럴 이유가 있다.
 공연작 〈오피움〉에서는 오피움 실물은커녕 그 유사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피움이 몸속에서 촉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흡입 경험이 없는 한에서는 감지하기가 좀 그렇다. 세상사의 불편을 잊고선 열락에 빠져들게 한다는 오피움의 전설을 듣고 보면, 오피움으로 몸 상태가 어찌 될지 얼추 짐작은 간다. 우선 오피움의 흡입으로 심신이 무장해제될 것이다. 〈오피움〉에서 몸이 억압을 벗어나 감각을 열어가도록 하는 춤은 오피움 비슷한 어떤 무형의 촉발제를 은유한다.




예효승 〈오피움〉 ⓒ김채현




 〈오피움〉은 특정한 줄거리를 갖지 않는다. 여성 1인을 포함해 모두 다섯 춤꾼이 수행하는 움직임들 사이사이에 단속적인 멈춤들이 삽입되는 방식으로 공연은 진행된다. 공연 전 배부된 간략한 팸플릿에는 다음의 4가지 물음이 눈에 띄게 기재되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언제인가요?’ ‘기억에 남는 대화의 순간이 있나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아직 사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나요?’ 줄거리도 없고 등장인물의 배역이 특정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팸플릿(사실상은 무대)으로부터 관람자에게 이런 물음들은 미리 다소 뜬금없이 던져졌다.






예효승 〈오피움〉 ⓒ김채현




 다섯 춤꾼들은 간간이 이러저러하게 바뀌는 형태로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그들 사이에 대립적인 기미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움직임의 양상에 따라 무리의 모습이 변형되긴 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띠지도 않는다. 빠르게 흘러가며 반복되는 음향에 맞춰 춤꾼들이 제각각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서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집단의 움직임이 때때로 강박증 같은 느낌을 동반하며 일정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양상이 공연의 주제처럼 부각된다. 이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반복되는 약한 소음이 배경음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다들 바닥에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느린 동작으로 반복하다가 서서히 고조되는 느낌의 움직임으로 나아가는 대목도 있다.






예효승 〈오피움〉 ⓒ김채현




 어느 대목에선 춤꾼이 마이크를 들고 래퍼처럼 엠씨잉을 할 동안 모두들 그에 몰입해서 광란하는 듯한 모습으로 무대를 배회한다. 또한 무대 좌우로 일시적으로 깔린 하얀색의 대형 베일 속으로 춤꾼 하나가 기어들어가서 그것으로 몸 전신을 감싸서 제자리돌기를 하며 베일을 감아들이면서 마치 여러 자세의 바디 라인이 선명한 하얀 조각상 같은 모습을 연출하는데, 그동안 주변의 두 춤꾼은 엑스터시의 경지에서 노니는 듯하다. 공연 중반부에서 하얀 베일이 무대 전면에 늘어뜨려져 실루엣 효과를 조성하는 속에서 꽤 오랫동안 예효승이 제 홀로 움직임에 몰입하는 모습은 몽유병자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효승 〈오피움〉 ⓒ김채현




 공연 내내 무대 천장에는 금속성 철망이 드리워졌다. 공연 서두에 한 출연자가 커다란 은색 헬륨 풍선을 들고 나와 무대 앞에서 관객을 응시하며 한참 부동의 자세를 취할 동안 점차 얼굴 표정이 슬픈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나머지 출연자들도 같은 풍선들을 들고 느리게 입장하여 그 분위기에 가세한 후 서로 위로하는 듯하다가 풍선들을 천장으로 보냈다. 외부의 억압, 사회적 금제(禁制) 같은 짐을 벗어나는 투의 일종의 의식에 해당하는 이 부분 뒤에 앞서와 같은 클라이맥스, 엑스터시의 대목들이 줄을 이었다. 공연이 끝나갈 즈음 매우 낮은 굉음이 들려오며 바닥에는 인조 잔디 매트가 길게 깔린다. 이어 천장에 매달린 철망과 풍선이 바닥까지 내려올 동안 잔디 매트에 엎드린 춤꾼들은 그 자세로 앞을 향해 느리게 기어간다.
 〈오피움〉에서는 도취를 비롯하여 왜곡과 뒤틀림 같은 여러 양상의 움직임들이 함께 존재한다. 공연 전부터 던져진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언제인가요?’ ‘기억에 남는 대화의 순간이 있나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나요?’ ‘아직 사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나요?’의 물음들에 내포된 진의는 막이 내려갈 무렵 드러나는 것 같다. 일테면 개인의 고독을 노크하는 듯한 이 물음들은 심지어 고독이 억압에 못지않은 억압이라는 해석도 암시한다.




예효승 〈오피움〉 ⓒ김채현




 일상에서 언제나 관람객들은 쾌락으로부터 분노, 강박, 그리고 고독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갖가지 감성을 감내해야 한다. 그들을 향해 춤꾼들은 〈오피움〉에서 움직임으로써 감성의 문을 열고 스스로를 감지해볼 것을 주문하였다. 다만, 관객의 감성이 도달할 지점을 특정하지 않아 오히려 모호한 바가 없지 않았다. 〈오피움〉은 테크닉보다는 강렬한 신체 표현으로 객석과 카타르시스를 공유한 이색작으로서 드문 무대를 제공하였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20. 1.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