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효승 / 류장현
철지난 감성은 철지난 감성이다
김채현_춤비평가

누구나 감지하듯 춤이 우리 곁으로 가까워지는 추세가 뚜렷하다. 뻔한 상식이다. 대극장, 중극장뿐 아니라 갖가지 유형의 공간에 춤이 침투해가는 현상을 여기저기서 목도하는 시절이다. 거대 담론 주도의 시대를 벗어나 새 담론이 한껏 기세를 모으는 흐름이 춤에서도 춤만의 버전으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2010년대에 씨가 뿌려지기 시작한 이런 추세가 일반 사회 현상(대표적으로는 도시 재생사업과 포스트모던적 경향)과 맞물려 이제는 잔뿌리를 내리는 단계에 다다른 것 같다. 일례로, 석유비축기지(서울 마포 소재)를 환골탈태시켜 2017년 가을 탄생한 문화비축기지도 올해로 이미 4년째이다. 가변 무대가 가능한 것은 물론 크고 작은 원형 공간이 여럿 늘린 이 이색지대에서 그간 몇몇 유형의 춤 이벤트가 더러 있었다. 이런 저런 시도와 저런 이런 실험을 되풀이하고 공연으로서의 양식을 강구해가면서 춤의 감성도 때가 되면 변화라는 말로는 부족한 다채로움을 더할 성싶다.






예효승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 ©2020 김채현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Industrial Performance)는 안무가 예효승이 문화비축기지에서 펼친 퍼포먼스다. 제목을 풀이해보면 산업 시대를 회상하는 어느 사람을 소재로 하는 퍼포먼스 정도가 될 것이다. 예술단체 서울익스프레스가 열은 이 퍼포먼스는 공연 퍼포먼스와 전시 퍼포먼스, 두 가지로 구성되었고, 예효승이 펼친 것은 공연 퍼포먼스다(1월 10~12일).
 두 퍼포먼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는 존이다. 존이라고 하는 산업시대의 산물은 플라스틱 인형 모양을 하였고 그 속에 산업시대의 그 모든 것이 압축된 일종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문화비축기지 T6 원형공간에서 진행된 공연 퍼포먼스에서 존은 바닥에 뉘인 채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공연 퍼포먼스 후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서 보름간 진행된 전시 퍼포먼스에서도 존을 비롯 공연 퍼포먼스에 등장한 전체 장치나 소도구가 전시 재현되었다.






예효승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 ©2020 김채현




 1990년대 이전 세운상가는 한국 전자산업과 기술 장인들의 메카였으나 IMF 위기와 함께 들이닥친 3차, 4차 산업혁명의 직격탄에 급격히 오그라들다가, 2016년부터 도시재생사업에 힘입어 이제 한창 부활을 모색하고 있다.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는 이러한 사연을 주제로 하며, 이 이벤트가 어제의 상징인 세운상가와 오늘의 상징인 문화비축기지(다시 말해, 세운상가의 대척점에서 세운상가 시대의 과거 발상을 뒤엎은 시대의 상징!)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은 역사의 뼈저린 아이러니이다.
 공연 퍼포먼스에서 예효승은 지난 시절 존을 제작했고 또 그를 회상하는 노동자 또는 산업인 그리고 존의 역할을 홀로 수행하였다. 그는 소공장의 제작 설비 등속이 존과 함께 배치된 사이를 왕래하며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높은 사다리 위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듯 관찰하는 해설자(나혜영)가 존이 처한 그간의 상황을 소개한다. 산업계가 3차 혁명을 지나 빠르게 4차 혁명 시대로 진입한 이상 과거에 맴도는 발상과 행태로는 생존이 지난하다는 요지의 내레이션이 낭독된다.






예효승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 ©2020 김채현




 예효승의 퍼포먼스 무브먼트는 담백하다. 그것은 인형 존과 나누는 몸짓, 느릿느릿한 걸음새, 높이 매달린 흰 풍선을 들고 느리게 이동하는 자세로 구성된다. 사실상 사물인 존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느릿하게 앞과 뒤로 걷기를 반복하는 걸음새는 서서히 쇠퇴·우왕좌왕·몰락하는 구시대 소공장 산업의 발걸음으로서, 천장 가까이 닿은 풍선은 이제 와서 허상으로 허황돼 보이게 된 구시대의 어떤 상징으로서 해석될 법하다.
 퍼포먼스에서는 구시대 산업과 새 시대 산업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반전을 환기하는 대목이 발견된다. 예효승은 바닥에 놓인 노트북으로 기계를 간단 조작하며 도중에 그는 존 모양의 쿠키를 수시로 구워 관객들에게 손수 나눠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쿠키 제조 과정에서 밀가루 반죽은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자동 장치에 의해 반죽통의 아주 작은 구멍에서 철판으로 저절로 일정 양만큼만 흘러내려서 구워지는데, 아주 섬세하게 반죽들은 철판에 인형 존 모양으로 신기할 만큼 정확히 안착하였다. 아마도 이 과정은 그가 노트북에 입력한 자료에 의해 진행된 것 같다.




공연 후 공개되고 관람자가 쿠키도 집어먹을 수 있는 쿠키 제조기 ©2020 김채현




 그러한 반전 내용이 희미하게 설정된 탓으로 인해 반전으로서 설득력을 갖는지는 애매하게 느껴졌다. 근본적으로, 〈인더스트리얼 퍼포먼스〉에서 퍼포먼스는 퍼포먼스 아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춤 퍼포머는 춤의 테두리를 넘어 행위예술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예효승은 잘 짜인 품새로 여유있게 환기하였다. 이와 같이 새 공간에서 춤과 행위예술의 구분은 희석되고 있다. 덧붙여, 2000년 이후 지금까진 춤계에서 퍼포먼스에 대한 인식과 동조(同調)가 실질적으로 미흡했던 탓에 퍼포먼스가 춤의 감성에 끼친 바가 미약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상황이 빠르게 달라질 가능성은 농후하다.

 춤 공간의 다변화 현상 가운데 또 하나 주목받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갤러리 공연이다. 또한 갤러리의 화이트박스와 유사한 춤 스튜디오에서도 공연이 더러 있어왔다. 공간 규모와 특히 조명 설비 면에서 갤러리에 비해 춤 스튜디오는 제약이 많긴 하다. 그러나 춤 감성의 변화는 춤 스튜디오의 그러한 제약을 도리어 일종의 장점으로 바꿔치는 발상을 촉진할 여지도 있다.
 류장현은 자신의 춤 스튜디오(서울 서초동 소재)에서 공연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를 열었다(언더그라운드, 1. 10~11). 지하층의 소담한 스튜디오로 이르는 입구에서부터 지하까지 계단 공간은 하얀 천으로 드리워졌고 스튜디오 내부의 무대 공간 역시 원래의 하얀 벽과 천장에 더하여 일체의 소도구들이 하얀 천으로 감싸진 상태로 배치되었다. 관객들 또한 입구에서부터 가벼운 하얀 가운을 착용해야 하며 신발도 하얀 덧신으로 가려야 한다.




공연장으로 쓰인 춤스튜디오 언더그라운드. 진입 계단을 천으로 감쌌다 ©2020 김채현




 관객이 입장할 때부터 침침한 공간 맨바닥에 좌석 없이 자유로이 자리잡고 앉는 관객들 틈새들을 출연자들이 천천히 누비고 다니면서 먼저 조그만 캔들의 불빛들로 바닥을 밝혔다. 아울러 하얀색으로 통일된 색감의 분위기는 공연에서 산만하지 않은 효과를 낸다. 이 같은 색감을 택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화이트 큐브?) 평자로선 짐작할 따름이로되, 발상은 신선하다. 이런 색감과 조명 분위기에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의 외부 세계와 차단시켜 어떤 잠재된 내면으로 들어서게끔 유도하려는 의도가 읽혀진다.
 여느 카페나 살롱 풍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무대는 내밀한 공간인 듯이 다가온다. 마력적 느낌의 보이스가 저음으로 독백할 동안 포그가 퍼지면서 류장현이 점점 엑스터시에 접어드는 움직임으로 첫 상황을 열었고, 이어 하얀 자켓을 차려입은 4명의 출연진은 포그가 자욱한 그 속에서 손전등을 휘두르며 걸신들린 것 같은 움직임으로 무대를 샅샅이 훑는 순간들을 연출하였다.




류장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 ©2020 김채현




 일정한 스토리 라인을 갖지 않은 이 공연에서 이후 상황들은 매직 보여주기, 검정 두건을 쓴 사람들의 집단 배회무, 둘씩 짝지은 커플들의 만남과 접촉, 관객들과의 원무 위주의 집단무, 발라드 풍의 기타 솔로와 관객들이 눕는 상황, 맨바닥에 엎드린 바다사자 같은 인형의 독백, 검정색 차림 출연진들의 집단무로 이어졌다. 이들 상황은 연결점 없이 돌발적으로 제시되어 관객은 그때그때 감지하고 호응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는 공연 내내 관객을 향해 손을 내미는(reach-out) 순간을 여러 차례 조성하였다. 기본적으로 관객들 사이를 오가도록 설정한 연출 라인을 비롯해서 마술에서 관객을 보조역으로 초빙하였고, 관객들을 일어나도록 하여 잠시 원무를 함께 하도록 하는 등등으로 관객의 참여를 권함으로써 관객이 자신의 속내와 공연을 연관짓도록 자극하는 효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류장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 ©2020 김채현




 전문 매지션의 여러 매직은 시종일관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했다. 이 또한 예기치 않은 상황의 일환으로 이해되는 한편, 다만 공연의 전체 맥락과 연결될 만한 소지가 무엇인지 애매한 점은 있었다. 매직의 예기치 않은 솜씨는 공연 속에 단순하게 도입되었지 싶다. 그 솜씨에 더하여 (일례로서, 예기치 않은 허탈감 또는 놀라움 같은 정서를 통해) 관객의 내면을 두드리는 순간이 있었더라면 매직에 대한 해석도 입체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2쌍의 커플이 포옹하는 순간을 조성하는 매개체로서 거울은 제대로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프로시니엄 무대에서의 거울과 스튜디오에서의 거울은 그 물리적 차이만큼 이번 공연에서 색다른 느낌을 유발하였다. 거울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유동적 이미지를 배경으로 커플이 이뤄지고 또 다른 커플이 생겨나는 순간에 관객의 감각은 일깨워졌을 법하다. 다만, 거울이 단면이 아니라 양면으로 만들어져 입체성을 더했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거울의 활용이 한 순간에 그치기보다는 이후에도 거울을 활용하는 순간이 두어 번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류장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 ©2020 김채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는 예기치 않은 상황을 연달아 발생시켜 관객을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반복해서 인도하는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관객이 예상할 만한 상황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상황과 상황들을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가운데 관객은 점차 자신의 잠재된 세계에 다가간 것 같다.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에서 촉발될 우리의 정서는 매우 유동적이다. 이 공연은 외로움, 눌린 듯한 느낌, 돌파구가 열렸으면 하는 마음 등등 특정하기가 애매한 복잡한 감정을 노크해나갔다. 속에 감춘 세계를 열어가는 공연의 취지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판단하기 나름이라 하겠다. 관객들 각자는 다른 관객 개개인들의 반응에서 자신의 감춰진 세계를 스스로 열어보는 계기를 갖거나 그에 대해 안목을 키웠을 수도 있다. 이런 뜻에서 관객들의 단순한 반응과 호응을 넘어 감춰진 세계를 열어가도록 하는 참여가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안무자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류장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 ©2020 김채현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는 소규모의 스튜디오형 공연장에서 에너제틱한 춤을 축으로 특히 오늘 청년 세대의 복합적인 내면을 두드리고 관객의 반응을 공연의 자료로 활용한 관객 밀착형 공연으로서 효력을 보였다. 공연 내내 관객은 출연진과 함께 존재하고 더 나아가선 뒤섞였던 편이다. 출연진과 관객 사이의 직간접적인 호응이 잇달았으며, 관객은 작품의 배경으로서 즉 매질(재료, material)로 작용하였다. 여기서 새롭게 주목해볼 점은 관객이 몸으로써 현장에 참여하고 그 몸은 춤 이벤트에 참여하는 몸이 되고 춤 이벤트를 구성하는 몸이 된다는 사실이다. 공연장의 다변화 및 공연의 다양화에 대응해서 향후에도 류장현 특유의 유희적 경향 및 이번 같은 관객 소통 지향성을 바탕으로 관객 밀착형의 춤 공연을 추진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 〈예기치 않게 종료되었습니다〉에 관한 서술은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 리뷰‧비평으로 제공된 글을 일부 첨삭 개고한 것임을 밝혀둔다.  ─ 평자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

2020. 3.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