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무용단 자유
불안의 시대, 춤에 더 가까이 있기
권옥희_춤비평가

불안한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은 마치 희망 고문처럼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연습실은 닫혔고, 연이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공연 소식에 노심초사, 모두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지 않던가. 이 모든 시간을 가난으로 비워 춤에 더 가까이 있기, 가난한 시간 안에서 자신들의 춤 의식을 확인한 ‘현대무용단 자유’의 춤. 이들의 무대에 의미를 두는 이유다. 문은아의 〈공간의 감정〉과 박근태의 〈처용〉(부산문화회관 중극장, 8월17일), 두 편이 무대에 올랐다.


문은아 〈공간의 감정〉

바다 영상 앞에 흰색의 벽과 기둥, 공간을 지배하는 뼈대만 무대에 세웠다. 벽과 기둥은 서로 분리돼 있으면서도 이동에 따라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공간은 누가 그곳을 점유하며 어떤 문화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흔적이 남으면서 끝없이 변한다. 고정 불변하는 것은 공간뿐만이 아니다. 건축의 기본적 구성 요소에 초점을 맞춘 이 움직이는 설치물은 공간의 유동성, 가변 하는 공간의 속성에 따른 춤의 변화를 담아내는 적절하고 근사한 장치였다.






문은아 〈공간의 감정〉 ⓒ현대무용단 자유




벽에 난 문, 문 입구에 서 있는 여자. 문 앞(안)에 서있거나(안선희), 바닥에 웅크려 앉고, 물구나무를 선 채 거꾸로 벽을 타거나, 무너져 내리거나, 벽 위에 올라앉은, 그녀들이 있는 곳(공간)은 마치 삶의 벼랑 같아 보인다. 모든 공간에 위치한 춤은 아직은 촉수를 감춘 욕망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인, 안무자(문은아)가 욕망하는 공간의 은유로 보인다.

춤은 벽과 벽, 벽과 기둥, 공간을 구획하던 부분들이 이동하면서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면 움직이는 벽 앞에서 춤추기, 분절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남녀 듀오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움직인다. 서로 인내하고 있는 듯한 춤. 지금, 이 곳(공간)을 사는 이들의 우울한 초상이다. 좀 더 섬세하고 유려한 춤으로 관객을 설득했어야. 안무 의도에 따라 다르게 추고, 읽히는 차별화된 춤의 배치가 필요하다.






문은아 〈공간의 감정〉 ⓒ현대무용단 자유




무대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춤(마음)이 변하고 춤의 변화에 따라 공간이 변한다. 특이한 점은 춤은 결코 벽과 기둥(집)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안무자가 지키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인식, (집에 대한)질서와 형식이다.

문은아(안무자)가 벽 위에 올라 앉아 천천히 머리를 빗는다. 그 아래 펼쳐지는 격정적인 군무. 그의 들끓는 내면이기도, 혹은 몸이 깨어지고 마음이 부서진 다음에도 자신이 어떻게 온전하게 남을 것인가를 모색하는 중인지도. 무대는 다시 처음의 공간으로 재배치된다. 캄캄한 무대, 문 앞에 선 이가 전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한다. 문을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 열린 결말의 답은 〈공간의 감정〉 이후 문은아(안무자)의 행보가 말해줄 것이다.






문은아 〈공간의 감정〉 ⓒ현대무용단 자유




그것이 무엇이든 익숙한 공간(문 밖)을 나서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다. 〈공간의 감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춤의 에너지가 상승하며 폭발하는, 결기(춤에 대한)가 상당한 작품이었다. (출연진: 12명)


박근태 〈처용〉

오래 전 살다가 간 사람들의 흔적.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전통가곡의 분명한 가사전달과 읊조리며 섬세하게 빚는 소리가 마음을 흔든다. 세 명(처용, 역신, 처용처)의 무용수가 간격을 두고 무대에 서 있다. 흰색(처용)과 검은색(역신), 흰색 상의에 검정색 바지(처용의 처)의 간결한 의상, 정악에 춤만 배치한 정제되고 세련된 연출이다.






박근태 〈처용〉 ⓒ현대무용단 자유




처용 처와 함께 추는 여섯 명의 군무로 혼란과 갈등, 들끓는 욕망과 격정에 휩싸인 모든 상황을 정리한 것에서 박근태(안무자)의 안무 감각을 확인한다. 엉켜있던 무용수 하나가 높게 든 다리를 지나 발가락 끝까지 욕망을 모아 올린다. 툭 놓지 않고 한 번 더 미세한 떨림을 보여준다. 마치 환락으로 연결된 끈이 거기 있어 닿으려는 듯, 욕망과 집착을 보여주는 좋은 춤이었다. 이어지는 남자(역신)의 솔로, 고통을 춘다. 절제되지 않은 과한 고통의 춤이 민망하다. 처용이 추는 솔로 또한 마찬가지. 역신과는 다르게 서정적으로 춤을 시작하나 마지막 몸을 떨어대는 춤에서 섬세하게 유지하고 있던 감정의 선이 툭 끊어진다. 집착에서 멀리 벗어났어야 할 이가, 그 열망의 흔적을 다 지우려고 역신과 같은 집착의 무게로 춤을 춘다. 자기모멸로 들끓는 심정을 추는 춤이든가 아니며 원망의 제의에 자기를 희생으로 바치는 방식이라면 모를까.

무대 앞, 붉은 조명아래 선 두 남자 모두 더 할 수없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두 남자의 고통은 생경하게 번쩍거리며 떠 있는 집착처럼 읽힌다. 가라앉지 않는 집착의 고통말이다. 춤이 진부해지는 지점이다. 두 남자가 중앙에서 서로 껴안는다. 여자는 멀리 서 있다. 두 남자가 나란히 길을 걷는다.






박근태 〈처용〉 ⓒ현대무용단 자유




처용이 추었다는 용서(해학)의 춤은 박근태의 〈처용〉에서는 없다. 두 남자의 춤에는 열정과 회한과 실망과 나머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먼지처럼 내려앉은 시간이 있을 뿐. 그것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 말하자면 두 남자의 용서와 화해의 춤은 열망의 흔적을 지우려는 집착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섬세한 것을 파악하는 이는 섬세한 것을 지우며, 섬세하게 지우는 이는 섬세하게 집착한다. 이 섬세한 집착과 집착되는 섬세한 것들은 ‘처용’이 전하는 해방(용서)에 장애가 된다.

박근태의 〈처용〉은 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역신) 고통스러우나, 이 고통스러운 집착을 자각하는 자는(처용) 강인하고 섬세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본디 내 것’이라는 게 있을까만. 더구나 그것이 사람일진데. 작품은 탐욕스러운 광기에 대한 일종의 방어이며, 그것이 해답을 흩트리고 지연시키는 계산이라는 점에서는 그 어둠 속에 잠재하는 광란의 힘들과 손잡기처럼(화해) 보였다. (출연진: 8명)






박근태 〈처용〉 ⓒ현대무용단 자유




박근태 작품에 출연한 외부무용가를 시작으로 동문들의 단체라는 ‘현대무용단 자유’에 변화의 바람이 불지, 일회성에 그칠지 모르겠으나 이 단체가 가진 춤의 견고함에의 의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무대였다. 아무쪼록 긍정적 변화로 이 단체가 부산 현대무용의 지표가 되길 기대한다.

춤을 창작하고, 가르치면서 맞닥뜨렸던 고독의 질을 바꾼다는 것은 또 다른 고독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다시 춤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겸손한 삶과 절제된 사고의 틀 속에서 헌신의 용기를 회복하고, 새로운 자리(의자)를 한 인간의 생명력으로 다시 채운다는 것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 

2020. 9.
사진제공_현대무용단 자유 *춤웹진